연재를 시작하며 : 동아시아로 가는 길 1987년 민주화의 진척과 1989년 탈냉전의 물꼬가 트이면서 한국 지식계의 일단에서 동아시아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중 수교와 일본 대중문화 개방, 남북 정상 회담 등 일련의 구조 변동으로 동아시아는 점차 그 '육체성'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한때나마 개혁 정부 하에서 '동북아 시대'가 정책적 차원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기도 했다. 동아시아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합류할 수 있는 드문 학술적 주제였고, 국가의 정책적 과제와 시민 사회의 운동적 지향과도 어울릴 수 있었던 예외적인 화두이기도 했다. 이제 그간의 동아시아에 대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되짚어 보면서, 담론의 질적 심화를 도모할 때라고 여겨진다. 9·11로 출발하여 3·11로 마감되고 있는 21세기의 첫 10년의 경험이 새로운 사상적, 실천적 과제를 요청하고 있는 탓이다. 윤여일은 '수유너머R'의 연구원으로 동아시아 사상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이병한은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한국학 센터에 머물고 있다. 전자는 1979년생이고, 후자는 1978년생이다. '죽의 장막'이 걷힌 동아시아를 생활 세계의 실감으로 경험한 세대이자, 동서의 권력이 반전되는 새로운 세기를 목도하고 참여하게 될 이행기의 세대이다. 그런 감각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북과 남, 그 남/북을 둘러싸는 신/구 제국들을 아울러, 긴 호흡으로 현재와 과거를 조감하고 미래를 더듬어 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매주 한 편의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대화가 20세기 초의 안중근과 신채호, 20세기 중엽의 안재홍과 여운형 등이 가려 했으나 가지 못했던, '동아시아로 가는 길'을 다시 잇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
▲ 우리에게 '동아시아'는 무엇인가? 동아시아는 과연 실체가 있는 개념인가? ⓒ프레시안 |
동아시아론의 유산화를 위해서
대화가 한 차례 오갔을 뿐이지만 답하신 글을 보니 앞으로 함께 고민해야 할 여러 대목들이 집힙니다. 답하신 글은 한 호흡으로 써 내려가신 듯하지만, 저는 되도록 잘게 나눠 논점들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이런 정리는 거듭되겠죠. 논점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둬야 대화가 축적될 담론공간을 벼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답하신 글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논점은 여러 가지이지만, 지금은 두 가지 대목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제가 대화를 시작하며 현재를 동아시아론의 버블기라고 진단했던 내용에 관해 현재 동아시아론은 추상적 관념 세계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골격을 세워가는 도정에 들어선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아마 이렇듯 현 상황에 대한 진단이 갈리는 것은 그 진단을 통해 이후 무엇을 주목하고자 하는지의 차이에서 비롯되겠죠. 먼저 저의 문제의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겠습니다. 담론은 기본적으로 버블적 속성을 띱니다. 담론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자기 운동하는 성격도 갖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상계에서 화두가 되는 담론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동아시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런 기본적 속성에 더해 현재 동아시아론은 '동아시아'가 지역 범주인지 사유 지평인지 문명권인지 경제 권역인지 역사의 유산인지 미래의 기획인지가 모호한 채 동아시아의 상을 뚜렷이 거머쥐지 못하고 있으며, 동아시아론에 담긴 문제성이 옅어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동아시아론의 활황을 버블기로 진단한 것은 어떤 위기감에 따른 것입니다. 겉보기의 풍요로움이 담론의 생명력을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지금 동아시아론의 사상적 체력이 고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을 때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버블기라고 진단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는 아닙니다. 현 상황을 버블기라며 기존의 동아시아론을 뭉뚱그려 비판한다면, 이제껏 축적되어온 소중한 시도들을 외면하고 말겠죠. 그렇다면 이병한 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세대론적 단절과 인정 투쟁의 욕망이 투영된 것일지 모릅니다.
저는 지난 글에서 동아시아론의 유산화 작업을 강조했습니다. 즉, 기존의 동아시아론을 포괄적으로 부정할 것이 아니라, 내재적 비판을 통해 동아시아론의 사상사적 의의를 도출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동아시아론에 남아있는 사상적 생명력을 측정하고, 기존의 동아시아론 가운데 진정 동아시아론에 값하는 연구와 그렇지 못한 연구를 가려내야 합니다. 이 시도가 우리의 대화에서 저의 한 가지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버블기라는 진단이 실상에서 벗어나더라도 현재의 담론을 사상사의 유산으로 삼으려는 노력 속에서 비로소 그 담론은 이후의 성장을 기약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직면하는 문제는 어떤 기준을 근거해 사상사적 가치에 값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선별해낼 수 있느냐입니다. 이상의 문제의식에 관해 이병한 님의 견해를 묻고 싶습니다.
2
애초 동아시아론의 내용과 지향이 불분명한 채 자기 운동하며 확산된 것의 한 가지 주된 이유는 '동아시아'라는 개념이 지니는 실체성과 신축성이 모순하지 않은 채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는 여느 학적 개념과 달리 물리적 실체를 함유하기에 이 개념과 접목되면 현실성과 역사성을 띠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었습니다. 그 속에서 여러 학문 영역은 지금껏 다뤄오던 내용을 '동아시아'라는 애매한 담론 공간으로 옮겨 연구의 확장을 꾀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구들 가운데 일부는 "왜 동아시아여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물음을 누락한 채 동아시아를 모호한 지역 범주로 삼고 그 말의 신축성에 기대어 연구 범위의 확장을 꾀한 탓에 동아시아론의 모호함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현실과 마주했을 때 담론의 물질성이 휘발되고 추상성, 관념성을 노출하는 결과를 낳고 말겠죠.
또한 한편에서는 그 말의 신축성에 기대어 동아시아는 한국의 논리를 지역 수준에서 확대 재생산 하기 위한 지평으로도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그간 지정학적 조건에서 한국의 역할론을 도출해내는 논의가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동아시아론의 현실적 용법입니다. 다만 한국의 조건을 특권화시키는 동아시아론은 실천의 당위성을 강조하더라도 그것이 역내의 현실적 조건에서 얼마나 실천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역내 타국의 공간을 얻을 수 있을지라는 의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한국 중심성을 전제로 하는 동아시아론은 동아시아에 대한 지역 인식을 왜곡시킨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한·중·일을 곧 동아시아로 상정하거나, 한·중·일을 아우른다고 해도 한국을 중심에 두고 컴퍼스로 돌린 것처럼 도쿄, 베이징, 상하이 정도에 시야가 국한되거나, 한·중·일을 거론하더라도 국민 국가라는 착시 현상에 빠져 그 사이의 비대칭성을 놓치는 지역 인식의 왜곡이 발생했습니다.
정부와 시민단체, 학계와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욕망해 동아시아론은 활황을 구가했지만, 한국 중심성의 논리가 새겨진 동아시아론이라면 그것은 동아시아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내수용 담론이 되고 말 것이며, 동아시아에 관한 물신화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결국 사상사적 가치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3
따라서 저는 잠정적으로 동아시아를 지리적 인접성에 기초한 지역 범주 이상의 의미로 활용하되 동아시아 개념의 신축성에 기대어 추상적인, 즉 분석 불가능한 수사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는 동아시아의 용법을 발굴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발 동아시아론이라면 그 용법을 한국의 현실 상황에 기초해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발 동아시아론의 조건은 동아시아를 아우를 만한 실체가 한국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의 역사적 경험이나 경제·외교적 능력도, 중국과 같은 거대한 지리적 규모도 없습니다. 오히려 한국은 자신의 의지와 통제 범위를 초과하는 외부와의 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그 비대칭성에 내재함으로써 자신의 원리성을 발굴해내야 하는 조건에 처해 있습니다.
바로 동아시아가 세계 체제의 주변에 자리하며, 또한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열위에 있다는 '이중적 주변성'에 근거해 동아시아적 시각을 육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현실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원리성이란 동아시아를 아우를 만한 실체적 요소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만큼 현실적 조건과 변수들에 따라 탄력적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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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논점만을 정리하는 데도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사실 정리에 이르지도 못했습니다. 이병한 님께서 의견을 개진해 첫째 논점을 구체화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둘째 논점입니다. 이 대목은 그냥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병한 님께서 보내신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동아시아론이 동아시아학으로 진화하지 못한 점이야말로 못내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 하여 'University'를 '大學'으로 되감는 21세기의 東(아시아)學 운동이 절실합니다, '론'이 없는 '학'의 맥 빠짐만큼이나 '학'이 뒷받침 되지 않는 '론'의 허약성을 통렬히 자각합시다. 개별 연구자들이 기존의 대학 체제에 투항하여 흡수·병합될 때 동아시아론은 정녕 거품일까 우려됩니다. 동아시아론과 동아시아학의 공진화가 화급한 것이지요. 대학을 탈환하여 낡은 지식 체제를 재편하고, 그 새로운 제도적 기반에서 축적된 학식으로 담론의 날을 한층 벼리는 쌍방향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저로서는 그다지 생각해보지 못한 대목이어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물음을 구성한다면 이렇습니다. '동아시아론'과 '동아시아학'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동아시아론'의 제도화는 어떤 이유로 필요한가요. 그것이 기존의 대학 체제의 전환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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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밖에도 논점은 더 있습니다. "중국을 동아시아로 감싸 안는 작업은 일본이 동아시아에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것보다 한층 지난한 과제일는지 모릅니다"라는 문장에서는 동아시아 내부의 비대칭성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라는 논점을 취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한반도는 비단 4대 강국의 경합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들이 상징했던 서로 다른 근대성의 교착지였기 때문입니다. 유럽발(發) 근대성이 만개한 곳이 미국이었다면, 그 내부로부터의 저항이 소련을 낳았습니다. 비서구에서 근대성에 가장 기민하게 적응하여 우뚝 선 나라가 일본이었다면, 중국은 이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근대성을 구축해온 비서구의 선두주자입니다. 20세기를 상징하는 서로 다른 근대성이 교착하고 갈등하던 곳이 바로 한반도였고, 그 격렬함만큼이나 심란한 근현대사를 통과해 왔습니다. 그 쓰디쓴 역사적 경험의 되새김질이 폭넓은 소통의 원천입니다."
여기서는 동아시아를 발화하기 위한 한국의 장소성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지라는 문제가 부각됩니다.
6
그러나 이것들은 후일 대화의 주제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병한 님이 말미에 "왜 동아시아인가"라고 제게 물은 것에 관해서는 답변이 되지 않은 듯합니다. 사실 저로서는 첫째 논점이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한 초보적인 절차입니다. 그러나 애초 계획은 그 물음에 관해 이론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제 개인의 체험으로 바짝 끌고 와 이야기를 전개해보고 싶었습니다. 동아시아에 관한 저의 실감은 제가 동아시아를 사고할 때 중력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작성하고 싶었던 다른 이유는 이병한 님의 글에서 "치국과 평천하 사이에 동아시아가 있음을 항시 기억합시다"라는 표현이 무슨 뜻일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유의 지평이라는 각도에서 동아시아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게 이병한 님의 저 문장은 다소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치국과 평천하 사이"에 무엇이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논자들에 따라 동아시아는 국민 국가 단위의 자국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장으로 모색되기도 하지만, 국익을 지역 수준에서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논리로도 활용됩니다. 또한 동아시아 공동체는 서구적 근대와 자본의 세계화에 맞선 대안으로 지향되기도 하지만, 지역 협력체를 구축해 경제적 근대화를 기도하기 위한 틀로도 연구됩니다.
이병한 님께서 생각하시는 "치국과 평천하 사이"란 무엇인지가 궁금해 먼저 동아시아에 관한 저의 실감을 밝히고 물음을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대화거리가 가득 찼네요. 그것은 조금 뒤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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