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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새로운 정의는? "서로 돕는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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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새로운 정의는? "서로 돕는 동물!"

[親Book] 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

사람은 3원색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개는 2원색으로 본다. 개가 보는 세상은 흑백 영화의 장면과 똑같다. 새들 가운데 일부는 4원색, 5원색으로 세상을 본다. 4원색, 5원색의 세상이란 얼마나 다채롭고 찬란할까. 또 어떤 새는 자기장을 실제로 본다. 자기장까지 보이는 지구의 모습은 또 어떨까.

사람이 보는 지구와 개가 보는 지구와 5원색의 눈을 가진 새들이 보는 지구와 분명히 다르다. 그렇다면, 어떤 지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정확한 지구일까.

모든 동물과 식물은 신경계가 있다. 그래서 모든 동식물 개체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고 소통하고 또 대화한다. 인도의 위대한 과학자인 찬드라 보스는 일찍이 식물의 신경계 존재를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기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측정하는 핵심 용어로 자리 잡은 '스트레스'는 원래 금속의 피로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금속의 정신 건강(!?) 용어가 사람들의 의학 용어로 전용된 셈이다.

동식물의 의사소통 도구는 소리, 초음파, 화학 물질에 이르기까지 정말 놀랍고도 신비스러울 정도로 다양하다. 새들의 지저귐과 돌고래의 초음파와 소나무 뿌리의 갈로탄닌은 모두 다 같은 종끼리의 대화 또는 외부의 존재나 자극에 대한 반응, 인식, 교류이다.

사회성 동물인 개미의 의사소통 도구는 페르몬이다. 개미들은 페르몬으로 인식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대화하고 집단을 유지한다. 페르몬을 제거하면 개미 집단은 곧바로 붕괴되고 군집에 속한 개미들은 모조리 죽는다.

사회성 동물인 사람의 소통과 교류 수단, 자기 인식 수단은 언어이다. 사람은 오직 언어 안에서만 인간이 된다. 인간의 의식과 정신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에게서 언어를 제거하면 개미와 마찬가지로 그 언어 공동체는 붕괴되고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도 곧 죽는다. 물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또 다른 공동체 사회로 편입되면 살 수 있지만 말이다.

1974년 맹크스 어를 구사할 줄 아는 마지막 인간이었던 네드 매드럴이 세상을 뜨자 맹크스 어와 맹크스 족 공동체는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1987년 쿠페뇨 어 사용자였던 로신다 놀라스케스가 94세로 죽자 쿠페뇨 족 공동체와 쿠페뇨 어도 역시 멸종되고 말았다. 1990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와포 족과 와포 어가, 1992년에는 카프카스 북서부 지역의 우비크 족과 우비크 어가 마찬가지로 멸종의 길로 들어섰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태스매니아 공동체와 태스매니아 어도 그렇게 사라졌고, 오늘날 250여 개에 이르는 호주 원주민 공동체와 언어도 그렇게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187개 아메리카 인디언 공동체와 언어 가운데 150여 개는 이제 인디언 원주민이 더 이상 배우지 않는 언어로 추정된다. 이 모두가 얼굴 흰 학살자들, 백인과 자본주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 범죄 행위이다.

"사람은 사회적 삶 속에서 언어적 영역을 산출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만이 언어적 행동 조정을 통해 새로운 현상계인 언어의 나라를 산출한다. 이것은 행위의 공동 개체 발생적 조정을 통해 생긴다." (237쪽)

▲ <앎의 나무>(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최호영 옮김, 갈무리 펴냄)는 지금까지 서양 과학이 제시한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해석과 전혀 궤를 달리하는, 일종의 혁명과도 같은 새로운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인식 행위 자체에 대해 근본부터 재검토하면서, 놀랍고도 참신한 생각을 펼쳐 보인다. 단세포에서 출발해 긴긴 여행을 거쳐 수십억조 개의 세포들이 결합한 '메타 세포체'로 변화한 생명체들, 특히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고 행동하는지 근본에서부터 다시 질문을 던진다.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핵심 주제는 생물체의 자기 생성 체계라는 속성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율성을 갖고 스스로 자유롭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생성한다. 이런 자기 생성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의 기적 같은 다채로움과 또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를 활짝 열어놓는다.

개와 사람과 새들이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 실재란 없다. 모든 생명체들이 똑같이 인식하는 확고부동한 세계란 없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인식 주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이다.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란 수백만 개의 운동 뉴런과 수천억 개의 중간 뉴런, 수천만 개의 감각 세포로 구성된 신경계를 통해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그 능력 범위 안에서 타인들과 함께 '만들어낸 세계'일 뿐이다. 우리는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함께 인식할 수 있게끔 만들어낸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인식과 행위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만들어낸 인식이자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란 우리의 인식 능력이 만들어낸 인식 가능한 세계인 것이다.

사실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생물체들을 외부 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는, 달리 말하면 자연의 노예로 보는 측면이 강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런 진화론을 뿌리부터 전복시킨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생성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각 종마다 독특한 자신들의 감각 기관이 만들어낸 환경을 산출해내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체가 갖고 있는 인지 활동의 본질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따라서 진화가 아니라 자기 생성 체계의 '표류'가 다름 아닌 생명체의 역사이고 현재이다.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가는 돌멩이처럼 이 표류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스스로 표류해가는 생물체 자신인 것이다.

서구 자연과학은 물질을 '객관적인 실재'로 상정한 다음 물질의 궁극을 찾아내고자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갰다.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전자, 양자, 중성자로, 다시 미립자 등 점점 더 궁극의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근본 물질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 나선 결과 발견한 것은 어떻게 보면 광대한 우주처럼 텅 빈 무(無)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찰나가 곧 영원처럼 보이는 존재의 무상함이었다. 여기에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고 물질을 인식하려고 하는 그 주체인 인간의 인식 범위와 능력의 문제가 늘 빠져 있었다.

우리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신경계가 인지하지 못하는 너무나 거대한 불가지의 세계가 있음을, 인식 불가능한 우주가 있음을 솔직히 깨달아야 한다.

바로 이런 한계를 명확히 인식할 때, 소통과 교류의 언어를 통해 존재하는 자기 생성 생명체로서의 인간 삶과 인간 사회의 근본 동력은 경쟁이 아니라 상부상조의 협동임이 분명해진다. 자기 생성 능력을 갖고 있는 사회성 동물로서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소통과 교류를 통한 공생과 사랑의 세계여야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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