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에게도 현대 도시는 선망의 공간이었다. 무슬림의 한 여성은 자신의 삶을 규격화시켰던 마을을 벗어나 낯선 도시로 이주하였을 때 무한한 자유를 만끽했다고 전한다. 1960~70년대에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던 많은 시골 처녀의 가슴 속을 상상해보라. 이들에게 서울은 두려운 공간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젠더 규범을 벗어나 자신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현대 도시는 전통적 젠더 규범의 급격한 변화가 감지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도시 공간이 전통적 젠더 규범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현대 도시에도 여전히 이분법적인 젠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테헤란로의 전면은 주로 은행, 병원, 변호사 사무실 등 지식 집약적 생산자 서비스업 중심의 경관을 자랑하지만 그 뒷골목에는 각종 요식업, 숙박업, 노래방, 안마 시술소 등 소비자 서비스업의 간판이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도심의 전면은 많은 남성들이 종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하이테크(high-tech) 서비스업으로 장식되어 있는 반면 도심의 배후는 주로 여성들이 많이 종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하이터치(high-touch)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대도시 교통 계획은 가사 및 육아를 위한 교통 이동이나 일/가정을 양립해야 하는 취업 주부의 이동을 고려하는 데 소홀하다. 따라서 여성들은 밤거리나 공적인 공간에서보다 사적 공간으로 간주되는 주거지 영역에서 더 많은 안전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전통적 젠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도시 공간은 어떻게 가능한가? 젠더 이분법에 의해 구축된 공/사 영역의 경계는 변화될 수 있는 것인가? 기존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차이의 공간은 어떻게 생산될 수 있는가?
일찍이 앙리 르페브르는 개방적 도시의 가능성이 "도시에 대한 권리(right to the city)"를 주장함으로써 창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도시 거주자들이 도시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리", 도시 공간을 충분히 "전유할 권리" 나아가 예술적 상상력을 통하여 도시를 "작품"으로 만들 권리 등을 행사함으로써 도시를 차이의 공간으로 생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도시권의 행사를 통해 자본의 추상적 논리나 계급 이데올로기에 의해 모든 것이 동질화되는 추상적 공간과는 '다른' 공간이 생산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관심은 국가 권력이나 계급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차이의 공간을 생산하는 데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젠더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난 차이의 공간의 생산의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 오세훈 전 시장의 서울시가 2007년부터 시작한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여행 프로젝트)'. ⓒwomen.seoul.go.kr |
그러나 흥미롭게도 르페브르의 이 혁명적 사상을 여성주의적 도시 공간의 생산과 결부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2007년도부터 시작된 서울시의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여행 프로젝트)'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서 여행 프로젝트는 여성의 도시권을 주장함으로써 가부장적 도시 계획 하에서 여성들이 공공 영역의 사용과 도시 정책 결정에의 참여로부터 배제되어왔음을 비판하고 나아가 여성들이 모든 도시 공간에 접근하고 이를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회복시켜주고자 한다.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의 조영미에 따르면, 여행 프로젝트 사업은 무엇보다도 공공 공간에서의 여성의 사용권을 확대하는 도시권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행 프로젝트의 영역별 사업은 공적 공간 특히 거리, 교통 기관, 도심 공원 사용에 대한 여성들의 안전 문제, 자녀를 동반한 여성의 공공 시설 등 공적 공간의 접근성 확대, 화장실 등 이용 편의성 증대를 위한 사업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밖에도 여행 프로젝트는 도시 관련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여성의 도시 참여권 실현을 위하여 여행 동반자와 여행 프로슈머 집단을 구성하였다. 여행 동반자는 여성주의적 관점을 고려하는 전문가로서 자문, 사업 평가, 모니터링을 제공하였으며 일반 여성으로 조직된 여행 프로슈머는 지역 사회의 도시 공간 불편 사례를 현장 조사하거나 여성의 공공시설 이용을 조사하였으며, 2009년에는 전문가와 함께 여행 화장실 및 주차장 인증 평가 조사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볼 때 여행 프로젝트는 여성의 도시 전유 및 참여권을 보장함으로써 도시를 기존의 젠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차이의 공간 즉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방향을 지향하였다. 구체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공공 영역에서의 남성 대 여성의 변기수를 1:1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한다. 이미 공공기관이나 쇼핑 센터에는 여성들의 편의를 고려하는 여행 주차장을 눈에 뛸 만큼 설치하였고 밤거리를 밝혀주는 안전장치도 점차 마련할 것이라고 한다. 유모차를 끌고 나올 수 있도록 보도의 턱을 없앤 여행 거리도 확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 여행 프로젝트는 과연 기존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차이의 공간을 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인가? 유모차를 끌고 거리를 활보하게 된다면, 아이를 데리고 쇼핑하는 데 불편이 없어진다면 도시에서 여성은 행복한가? 그것은 성적 이분법에 따라 도시에 그어진 공/사 영역의 경계를 어느 정도나 무너뜨리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여행 프로젝트가 어떤 여성들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를 좀 더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2008년 기준 여행 프로젝트에서 가장 많은 사업 비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 '여가 및 문화'(22퍼센트)였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여성 친화 문화 프로그램, 여성 체험/정보 프로그램 등과 같은 여가 및 문화, 정보화 및 교육에 많은 사업 비율이 할애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여성들이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지 않는, 사적인 영역에서 자녀 양육을 전담하는 중산층 가정주부가 아닌가? 그렇다면 여행 프로젝트는 사실상 중산층 가정주부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기제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여행 프로젝트는 양육을 담당하는 중산층 가정주부의 활동 영역을 확장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서 여성들의 주무대는 여전히 가정으로 간주되며 여성은 아이를 데리고, 혹은 아이를 맡기고 취미 생활을 위해서 공적인 영역에 나오는 것으로만 표상될 뿐이다.
조영미 역시 이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적어도 2008년까지의 "서울시 여행 프로젝트의 주요대상은 기혼의 임산부, 아이가 있는 중산층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래서 주요 사업도 수유방, 유모차, 화장실, 주차장 등으로 어린 자녀가 있는 여성들을 위한 사업이 많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품으로서의 공간, 기존의 젠더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공간을 생산하기 위해서 여행 프로젝트는 이제 '그의 여성'이 아니라 '다양한 여성들'의 요구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여행 프로젝트는 싱글 여성, 미혼모, 레즈비언 등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빈곤층 여성의 일자리 마련에도 소매를 걷어붙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2010년 여행 프로젝트는 여성들의 다양성을 고려하는 사업들을 포함시키고자 노력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출산율을 고려해야한다는 명목 하에 다시금 여성들에게 결혼을 강제하고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지금, 이러한 노력들이 실질적인 정책에서 얼마나 결실을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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