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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그날 밤 일은 나만의 비밀이에요!

[김용언의 '잠 도둑'] 스티븐 밀하우저의 <황홀한 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 낮은 오직 하나의 눈 뿐."

프랜시스 윌리엄 부딜론은 1852년 이렇게 읊었다. 매일 매일의 낮 역시 제각각 다르겠지만, 매일 매일의 밤이야말로 개별적인 고유함으로 빛난다. 낮은 외부와의 접촉(택배를 받는다든가, 새로운 대출 시스템을 굳이 설명해 주겠다는 카드 회사와 딱히 기분 좋지 않은 통화를 한다든가, 회사 컴퓨터 앞에 앉아 억지로 일하는 척 하든가)을 지속해야 하는 '생산'의 시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밤은, 우리들 각자의 밤은 다르다.

누군가는 가족들 모두가 잠든 밤에야 비로소 평온하고 맑은 기분으로 작업대 앞에 앉을 것이며, 누군가는 어둠이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밤이 되어서야 드디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릴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낮의 고통을 잊게 해줄 술기운에 스스로를 내맡길 것이며, 누군가는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라며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정처 없이 산책할 것이다. 밤은, 누군가에게는 낮만큼이나 생산적인 시간이며 '오늘 하루' 중 유일하게 마음 놓고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이며 가장된 유쾌함을 던져버리고 본래적인 우울함으로 침잠하는 시간이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진 게 맞다.

밤중에서도 여름밤은 또 다르다. '야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가장 긴 계절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겨울밤의 모험은 집 안에서 맴돈다. 하지만 여름밤을 다루는 많은 작품들은 주요 행위가 바깥에서 벌어진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김난주 옮김, 북스토리 펴냄)가 그랬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최종철 옮김, 민음사 펴냄)과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조동섭 옮김, 미디어2.0 펴냄)이 그랬다.

▲ <황홀한 밤>(스티븐 밀하우저 지음, 윤희기 옮김, 아침나라 펴냄). ⓒ아침나라
스티븐 밀하우저의 얇고 사랑스러운 소설 <황홀한 밤>(윤희기 옮김, 아침나라 펴냄) 역시 그처럼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대한 달의 마법에서 출발한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끝나가는 날, 8월의 마지막 밤과 9월의 첫째 새벽이 겹치는 무렵에 이 소설을 읽었다.

코네티컷 남부의 어느 무더운 여름 밤,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낮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하나씩 집을 나선다. 밤이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오, 어떻게 해봐. 해보란 말이야. 바로 이 순간,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돼." 열네 살 소녀 로라는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없는 어딘가를 찾아 밤거리로 걸어 나간다. 다락방에서 결코 끝내지 못할 소설을 쓰는 서른아홉 살 하버스트로는 유일한 말벗 카스코 부인을 찾아간다.

"정말 인생의 이 시점에서, 지금, 정말 제게 필요한 것은 신선한 공기 한 모금입니다. 같이 가시죠? 길만 건너면 됩니다. 두 시는 넘기지 않을 겁니다."

소년들은 딱히 목적한 바 없이 도서관의 문을 따고 들어가 그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 '여름 폭풍' '밤의 침입자' '검은 별' 등의 별칭으로만 알려진 무법자 다섯 명의 여학생들은 빈 집에 잠입하여 갈증을 해소할 주스를 마신다. 다락방에 버려진 낡은 인형들이 하나씩 깨어나 춤을 추고 짝사랑하는 상대방을 눈여겨본다. 이때 외눈박이 곰 인형이 구슬프게 노래한다.

"나도 구애하고 싶다. 나도 구애할 수 있을까?"

해변에서 만난 남자와 충동적으로 달빛 아래 사랑을 나누는 스무 살의 자넷, 바깥세상이 보고 싶어 진열장을 몰래 빠져나온 아름다운 마네킹, 맨발로 정원을 걸어 다니는 외로운 여자는 제각기 잊을 수 없는 밤을 만든다.

"어디에도 없을 이 여름 밤. 이 은밀한 장소, 이 가문비나무 아래서는 늘 똑같은 밤. 단 한 번의 이 밤이 영원한 밤이고, 지금 이 순간이 영원이었다. (…) 그때 그녀는 젊었다. 거침이 없었다. 결코 다하지 않는 밤에 불가능한 일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아침 햇살이 막 밝아올 무렵, 그들은 자신들의 비밀을 간직한 채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낮에 예정된 현실적인 일정들이 지난밤의 모험을 망쳐버리기 전에, 그들은 꿈으로 행복하게 도피한다. 밤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황홀한 밤>은 74개의 짤막짤막한 장으로 이뤄져있다. 각 장은 산문시거나, 그림엽서거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튀어나온 서표의 한 구절처럼 찰나의 선명한 이미지만 남기고 스러져간다. 이 글 자체가 꿈의 성질과 많이 닮았다. 설화나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 현실의 미국 작은 마을에서 되살아난다. 목양신 판이 '피리 부는 사나이'로 탈바꿈하고, 정숙한 달의 여신 다이애나는 염탐꾼의 시선에 노출될 뻔하고, 피그말리온 왕과 조각상 갈라테이아의 간절한 사랑은 기적을 가능케 한다. 몽마(夢魔) 서큐버스는 달의 여신으로 치환되고, 아폴론과 다프네의 외사랑은 피에로와 소녀 인형의 희비극으로 변형된다.

신화의 현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밤이라는 시간대가 가지는 이미지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일 것 같다. 빛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어떤 의미로든 혼자만의 시간을 살게 되는 단위. 그 안에서 인간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서양 언어에서 '밤'이라는 단어는 'N'으로 시작한다. <황홀한 밤>의 원제는 'Enchanted Night'다. 'N'을 거듭 발음할 때 수반되는 희미한 콧소리와 성대의 떨림, 밤의 변덕스러운 매혹과 닮았다. 'K'나 'D'를 발음할 때의 단호하게 결정론적인 음색과 상반되는 'N'의 세계에서, 꿈 역시 희미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게 찾아온 밤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일 <황홀한 밤>을 읽고 밤을 사랑하게 된 이들이라면 크리스토퍼 듀드니의 아름다운 문학 에세이집 <밤으로의 여행>(연진희·채세진 옮김, 예원미디어 펴냄)도 한번쯤 일독하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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