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얼음과 불의 노래>를 읽거나 혹은 1권(Game of Thrones)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간 미국 드라마()를 볼 계획이 있는 이라면, 얼른 창을 닫아라. 줄거리를 미리 알려줘 독서의 김을 빼는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다만 책을 읽을지(드라마를 볼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당장 시작해라!"
도발적인 제목의 프란츠 부케티츠의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이덕임 옮김, 이가서 펴냄)의 서평에서 뜬금없이 <얼음과 불의 노래>를 언급한 것은, 비슷한 시기에 읽은 이 두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겹쳤기 때문이다. 모두가 영웅을 원하는 시대에, 왜 우리는 겁쟁이가 되어야 하는가?
영웅이 사라진 시대
<얼음과 불의 노래>는 일곱 가문이 지배하는 가상의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패권을 쥐려고 혹은 목숨을 건지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그린 판타지다. 신자유주의 시대정신을 제대로 구현한 냉혹한 판타지로 평가받을 게 확실한 이 소설을 쓴 조지 마틴은 독자 입장에서 정말로 분통이 터지는 악취미를 가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사건의 틈바구니 속에서 독자가 특정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려는 (혹은 정을 주려는) 순간, 저자는 그 등장인물을 가차 없이 죽여 버린다. 1권부터 5권까지 오는 순간 그나마 신의 명예 사랑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영웅의 풍모를 지닌 이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살아남는 이들은 대개 결정적인 순간에 비루하게 목숨을 구걸한 '지질한' 이들이다. 그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며, 신의 명예 사랑 따위는 헌신짝 취급도 하지 않은 포식자의 손길을 피해서 살고자 안간힘을 쓴다. 이런 모습은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의 다음 주장과 겹친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집 안에 갇힌 두 명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오지도 못한 채 아이들과 함께 불에 타 죽은 용감한 소방관의 이야기는 우리를 괴로운 감정에 빠지게 한다. 정말 그는 진정한 영웅일까? (…) 오로지 자신의 용기로 살아남아 여러 사람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 경우가 아니라면 차라리 겁쟁이로 사는 편이 낫다." (50~51쪽)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프란츠 부케티츠 지음, 이덕임 옮김, 이가서 펴냄). ⓒ이가서 |
"적자생존의 법칙은 겁쟁이의 생존이다. 물론 이 공식은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최전방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젊은 병사는 다윈의 관점으로 보면 적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기 위해 다리의 난간 위에서, 달리는 기차의 지붕 위에서 그대로 뛰어내리거나, 곰 우리로 뛰어드는 젊은이도 적자가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89쪽)
더 나아가 부케티츠는 '영웅 만들기'로 과연 누가 이익을 보는지 묻는다. "선을 위해, 황제와 조국을 위해" 죽은 영웅의 시체가 산처럼 쌓일 때 과연 진짜 이익을 본 그들은 누구인가? 그가 보기에 우리가 아는 영웅은 "권력 게임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복종했거나 권력자 앞에서 용맹성을 보여야 했던 불쌍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부케티츠의 지적은 <얼음과 불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런 대화와 마주친다.
"방안에 영웅이라 할 만한 세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왕, 사제 그리고 돈 많은 부자였지요. 그들 사이에 기사가 하나 서 있었습니다. 신분도 비천하고 품은 뜻도 없는 기사였죠.
세 사람은 각각 그 기사에게 다른 두 명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내 말을 따라라. 난 너의 군주다.' 왕이 말했습니다. '내 말대로 해라. 신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사제가 말했습니다. '내 말대로 해라. 그러면 많은 금이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부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살아남았을까요?"
겁쟁이가 살아가는 법
<얼음과 불의 노래>가 전 세계의 많은 독자로부터 호응을 얻는 까닭은 (미국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나서 한국에서도 인기가 한창 상승 중이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잿빛 세계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이 말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문제는 지금부터다. <얼음과 불의 노래>의 그 수많은 불쌍한 주인공이 그렇듯이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가득한 이 잿빛 세계에서는 살아남는 것조차 힘들다. 부케티츠는 이런 잿빛 세계에서는 겁쟁이야말로 살아남으리라고 확신한다. 그가 말하는 겁쟁이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겁쟁이는 한 집단의 일원이 되기 전에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올지 항상 질문하고 (이 집단이 나의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집단의 강령이 요구하는 생명을 위협하는 모험 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지는 않는다. 이런 사람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자이며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 (201쪽)
그렇다면, 겁쟁이는 "연약한 여성이 강간당하고 아이들이 학대에 시달리는 상황도" 외면해야 할까? 포식자들의 횡포를 보더라도 "그저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닌가?" 어차피 이 잿빛 세계에서 안간힘을 써서 포식자 하나를 제거한다 한들 그를 대체할 또 다른 포식자가 더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겁쟁이를 찬양한 부케티츠의 얘기를 들어보자.
"겁쟁이는 (…) 자기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잘 알고 있으므로 다른 이의 두려움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돕고자 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다. 그렇지만 겁쟁이는 곤경에 처해도 가능하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판단해서 이에 따라 행동하려 한다." (208쪽)
겁쟁이들의 연대
사실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도발적인 질문에 값하는 알찬 책은 아니다. 자신이 던진 질문의 무게에 짓눌린 부케티츠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한 탓에, 이 책은 동물 행동학의 사례 모음과 어설픈 사회 비평이 뒤범벅된 아쉬운 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던진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케티츠가 지적한 "자기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불러일으키는 "타인에 대한 연민"은 중요하다. 사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인들이 강조한 황금률("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과 곧바로 통하는 도덕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겁쟁이가, 아니 보통 사람이 이런 황금률을 실천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렇게 황금률을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포식자에게 먹히기 딱 좋은 이들이 아닐까? 포식자는 남에게 대접은 받을 대로 받고, 대접을 할 필요가 없게끔 상대를 제거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겁쟁이는 "자신의 목숨이 달아날까 무서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까?
아니다. 부케티츠가 언급하지 않은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겁쟁이들의 연대'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자신과 비슷한 부류라는 것을 확인한 겁쟁이들이 서로 힘을 모은다면, 그들이 생존할 가능성은 혼자서 대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겁쟁이들끼리 서로 살육하는 끔찍한 상황을 피할 수 있듯이.
겨울이 오고 있다!
오늘날 자원 고갈, 기후 변화, 식량 위기 등과 같은 '외부 충격'을 경고하는 목소리에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있다. 낙관주의자들은 대개 "이런 경고는 과장일 뿐"이라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대개는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고 강조한다. (이런 낙관주의자가 대개는 포식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는 점도 기억하자.)
다른 한 편에서는 이런 외부 충격이 인류의 생존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조만간' 닥치리라고 경고하는 비관주의자들이 있다. 겁쟁이라면 낙관주의자, 비관주의자 둘 중 어느 편에 서야 할까?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최우선인 소심한 그들은 아무래도 비관주의자 편에 설 가능성이 클 것이다.
겁쟁이들이 연대해 외부 충격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지금부터 궁리하고 실천한다면…. 만약 정말로 외부 충격이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된다면 그들이야말로 최후에 살아남는 자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그야말로 포식자를 향한 겁쟁이들의 통쾌한 복수가 되지 않겠는가!
사족 하나. 그러고 보니, 포식자와 겁쟁이들의 생존 게임이 한창인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도 대륙 북쪽의 장벽 너머에서 괴물들이 호시탐탐 남쪽을 노리고 있다. 조만간 올 긴 겨울을 기다리면서. 정말로 이 판타지는 세기 말, 세기 초 인류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은유다. <얼음과 불의 노래>를 읽으며 겁쟁이가 만드는 미래를 상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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