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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마지막 눈물…"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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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마지막 눈물…"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김대중 평전 '새벽'·1] <김대중 평전>을 시작하며

<김대중 평전>을 시작하며

삼가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을 더듬어 본다. 2004년 봄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관'이란 직책의 두 사람이 찾아왔다.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소주를 한 병쯤 비웠을 때 자서전 얘기를 꺼냈다. 대통령의 뜻이라 했다. 한 번도 얘기를 나눈 적이 없는 대통령이 그렇게 곁에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대통령 자서전 집필, 그러나 나는 선뜻 수락할 수 없었다. 욕심이 났지만 내 역량을 내가 알고 있었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지 "글 잘 쓰는 대통령이 계신데 뭐가 걱정이냐"고 했다. 그 말에 겁 없이 뛰어들었다.

김대중도서관 집무실에서 대통령을 만났다. 청와대를 나와 사저로 돌아온 그에게는 독한 시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꽃 피는 봄이었지만, 그해 4월은 인생에서 가장 쓸쓸한 시기였다. 권력은 떠났고, 대신 병이 찾아들었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소위 가신 출신들은 총선에서 거의가 떨어졌고, 측근 몇은 감옥에 있었다. 현직 대통령 노무현은 '대북 송금 특검'을 전격 수용하여 전직 대통령의 가슴을 찢었다. 아무나 햇볕 정책을 조롱했다. 죽도록 일했던 5년간이 꿈만 같았다. 김대중에게는 신장 투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동교동 주변에는 낙조가 깃들었고, 늙은 가신 몇몇만 주변을 서성거렸다.

모습이 너무 초췌해서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그때 막 불붙기 시작한 한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불교와 유교를 들여왔지만 중국보다 더 훌륭하게, 더 기품 있게 발전시켰다면서 우리 민족의 문화 창조력을 얘기했다. 한국 전쟁 때 그 많은 나라에서 이질적인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모두 우리 것으로 정제했다며 문화 자정력을 되새겼다. 앞으로 세계가 한류는 물론이고 우리 민족을 주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논리는 거침이 없었다. 가장 절망적인 시간에 가장 희망적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저런 사람의 생이라면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그를 만났다.

2006년 7월 첫 구술이 있었다. 대통령은 처음과 끝이 같았고, 어디를 치고 들어가도 선후 좌우가 바뀌지 않았다. 단언컨대 그 분은 진실했다. 2년 동안 40여 회의 구술을 했다. 하의도 시절부터 집필해 나갔다. 처음에는 대통령의 삶이 그저 높은 산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산맥이었다. 다 오르면 다른 봉우리가 있었다. 길을 잃어 되돌아 나오기도 했고, 너무 지쳐서 하늘만 보기도 했다. 재주 없고 지혜가 턱없이 부족함에 절망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참고 기다렸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를 담은 1권을 2009년 4월말에 완성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글을 드렸다.

'세월은 수상한데 5월이 무심히 가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을 뵌 지 벌써 5년이 흘렀습니다. 자서전 초고를 감히 완성했습니다.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대통령님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감동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돌아보니 행복했습니다. 다시 시대가 천박해지고 시국은 엄중합니다. 부디 강건하셔서 시대의 미혹과 불의를 물리쳐 주십시오. 삼가 올립니다.'

휴가를 내서 지리산 자락 실상사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비서실에서 "대통령께서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7월 7일 동교동 사저에서 뵈었다. 대통령은 자서전 2권(대통령 재임기와 퇴임 이후)도 마저 집필하라고 했다. 그날 대통령이 눈물을 보였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권양숙 여사를 붙들고 깊고 길게 우는 모습을 봤었다.

"지금이 꿈만 같습니다. 50년 동안 얼마나 희생이 많았습니까. 사람들은 날보고 가만히 있으라 그러는데, 내가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민주주의가 저렇게 후퇴하는데 내가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지하에 있는 의사, 열사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으면 나라도 나서야지요. 비록 힘이 없고 병든 몸이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 눈물 앞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새삼 생각했다. 대통령의 눈물이 가슴 속으로 흘러들었다. 가는 길이 너무 멀어 아득했지만 나는 그 눈물 앞에 다시 힘을 얻었다. 대통령은 나를 자서전 편집위원에 임명했다. 지상에서 준 마지막 임명장이었다. 그리고 나흘 후인 7월 13일 폐렴 증세가 있어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들었다.

ⓒ프레시안(손문상)

김대중 도서관에서 국정 기록을 읽고 있었다. 옆방에서 여비서가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8월 18일 한낮이었다. 대통령 서거, 그 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눈앞이 깜깜했다. 서거 이튿날, 장례위원회 측에서 내게 추도사를 쓰라고 했다. 홀로 김대중 도서관에서 그 분을 기렸다. (추도사는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이 읽었다.) 언론에 발표할 2009년 마지막 일기도 정리했다.

그분은 가셨고, 다시 <김대중 평전>을 쓴다.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그분을 만나면서부터 평전을 구상했다. 인간 김대중의 결과 향을 뽑아서 전하고 싶었다. 이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영역 속으로 들어가겠다. '나만이 아는 김대중'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김대중'도 찾아 나설 것이다.

이 땅의 보수나 진보나 김대중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아는 척'만 하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은 우리에게 매우 구체적이고도 투명한 삶을 남겼다. 사형수에서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갈아엎었다.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게 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청사에 빛날 것이다. 그럼에도 이 땅의 지식인들은 김대중을 '적당히' 외면하고 있다.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

돌아보면 정치인 김대중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내일은 새날이 펼쳐질 것이라 믿었던 긍정의 정치인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수난의 시간들을 내일의 에너지로 바꾸었다. 스스로를 믿었고 사망의 골짜기에 떨어졌어도 미래를 설계했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이를 이겨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죽이려했던 가해자들을 용서했다. 그는 신군부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김대중은 한줄기 바람에도 흔들리는 약자였지만, 결국은 진정한 강자의 삶을 살았다. 국민에게 외면을 당하면서도 믿을 것은 국민밖에 없었다. 그것이 김대중의 숙명이었다.

퇴임 후에 만난 김대중 대통령은 현자의 모습이었다. 미움은 모두 사라지고 얼굴에는 평화로움이 피어났다. 나는 그것을 읽었다. 그는 역사에 반동이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앞으로 발전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을 비난했던 그 많은 사람들과 미움이 다 지워진 다음에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 후손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제 김대중을 역사에 묻어야 한다. 이 평전도 그 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그래서 두렵다.

우리 시대가 저물고 한반도에는 새로운 주인이 등장할 것이다. 그들은 편견 없이 역사를 뒤적여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찾아내 그에게 경배할 것이다. 온 몸을 바쳐 진정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그는 평화의 다른 이름이다. 온 몸을 바쳐 평화를 만들고 그 속에 들었다.

마지막은 고운 노을이었지만 내일은 새벽으로 다시 올 것이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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