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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이토록 反 민주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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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이토록 反 민주적이라니?

[프레시안 books]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실망했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수비수 뒤로 공이 교묘하게 흘러들어갔다. 오프사이드 라인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 공격수는 공을 몰고 들어가 골키퍼를 제치고 골을 넣으면 된다. 그 순간, 수많은 관중은 함성을 지르며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 기실, 시원한 장면이다. 쭉 뻗어 들어가 골망을 흔들기까지 과정이 말이다.

그런데 만약 공격수가 제 흥에 겨워 현란한 재주를 피우며 드리블을 해 골문까지 간다면 관중은 어떤 기분이 들까.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 펴냄)를 읽으며 똑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펴냄)가 나온 다음, 우리 지식 사회는 민주주의 논의가 왕성하게 펼쳐질 수 있는 마당이 열렸다.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고병권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더욱이 이명박 정부의 잇따른 비민주적 국가 운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라는 대중의 열망이 광범하게 퍼져 있다. 이때 고병권이 마침 그 주제로 글을 썼으니 주목받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고병권은 골을 넣는 데 보다 드리블하는데 더 관심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민주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지극히 현학적인 방법을 택했다.

마르크스와 니체를 공부한 그가 최근에 플라톤을 비판적으로 읽었던 것일까. 초장부터 데모스와 아르케를 운운하며 설명하기 시작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물론, 플라톤을 빗대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흉이 될 리는 없다. 그런데 웬만한 교양과 지식 없이는 민주주의를 논한 책을 읽기 어렵게 썼다는 것에 토 달 수는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플라톤이 나오는 1장은 약과다. 주권, 인민, 대의를 열쇳말로 해 논증을 구사하는 2장은 심하다 싶었다. 중요한 말을 하는 듯해 열심히 쫓아갔지만, 허탈했다. 1장과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까지는 좋은데, 1장에 비해 논증의 힘이 약하다는 느낌이다. 단상을 늘어놓은 4장은 없는 게 낫다 싶었다.

좀 쉬웠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책이 들어 있는 시리즈가 학술 총서도 아니고 어려운 철학 개념을 쉽게 풀어주겠다는 의도가 담긴 개념어 총서 아니던가. 독서의 민주주의라는 게 어려운 것을 알기 쉽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적이지만은 않은 책이 되어버렸다. 그냥 골만 넣으면 안 되었을까? 속 시원하게. 단순, 무식하게 보이더라도.

흥미로웠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펼쳐나가는 논증 과정이 재미있었다. 아마 민주주의를 이런 식으로 풀어낸 책은, 과문이라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별로 없는 듯싶다.

민주주의를 지극히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던 플라톤은 민주주의에는 올바름의 기준이나,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아르케가 없다는 말이다. 단지 민중이나 주체라는 뜻이 담긴 데모스의 의견만이 지배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의 아르케 없음은 단순한 지배 없음이 아니라 기준 없음, 척도 없음, 근거 없음을 의미한다."

고병권은 마르크스를 본 뜬 것일까. 그가 헤겔을 전복했듯이 플라톤을 뒤집는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는 제멋대로라고 폄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서 고병권은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남용, 위반, 잉여, 차이, 분란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들이 부정적이라 여기는가. 아니다. 긍정의 힘이 숨어 있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에는 세계의 생성과 변화, 다양성을 긍정하는 힘이 숨어 있다. 낭시가 말했단다. 민주주의는 스스로 발명해야 한다고. 고병권은 이를 다시 이런 식으로 풀어 말했다.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의 근거가 몰락할 위험을 각오하고 비판의 심연에 기꺼이 자신을 개방하며, 그런 개방을 통해 정체 갱신의 힘을 얻겠다는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동의한다. 민주주의를 고병권 식으로 새롭게 정의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통찰에 이를 수 없는 법이다.

"민주주의는 정체를 규정하는 특정한 근거(원리, 척도, 기준)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그 근거가 한계를 드러내는 곳, 그것이 비판에 직면한 곳에서 제기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민주화가 의미하는 것은 교정이 아니라 이행일 것이다. 즉 체제를 그 척도에 비추어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척도 자체를 바꾸는 일이 민주화라는 것이다.

(…) 따라서 민주화의 성패는 체제의 이행에 있는 것이지 그것을 가장 많이 주도한 사람이 최고 권력자 자리에 앉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민주화가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의 집권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문제다."


"근거를 공유하지 않고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다양한 존재들이 공동의 삶을 구축할 수 있는가, 서로 연대할 수 있는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란 이처럼 자격이나 조건, 척도를 넘어 다양한 존재들이 연대하는 것이고, 자기에게 부여된 형상을 넘어 공동의 삶, 연대의 삶을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병권은 청소년,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장애인의 연대에서 이행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읽다가 속으로 외쳤다. 브라보!

이상한 일이다. 왜 소장학자들은 기회만 되면 최장집을 씹어대는 것일까. 고병권도 최장집에 시비를 건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정당들이 득표를 위해 투표자 다수의 관심이나 선호에 반응하는 노력'에 있다면, 소수자들은 아마도 그런 민주주의에 의해 폭력적 배제를 경험할 것이다"라고 포문을 연다. 정말, 최장집은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대체로 최장집의 논의는 시민사회 영역에 갇혀 있는 갈등을 정당 구조를 통해 사회에 전면화하자는 뜻에 무게를 두고 있다. 소수자라면, 더욱 정치 세력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때 비로소 갈등의 사회화에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다.

더욱이 고병권은 "민주주의는 좋은 지배자를 가진 삶이 아니라 지배자 없는 좋은 삶"이라 했다. 원칙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게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이상을 말한다면 무엇을 말하지 못하겠는가. 최장집은 이런 이상에 동의하지 않는 정치공학자일 뿐일까. 오히려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정치를 모색해 이상에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정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논의에 쌍방성이 있으면 좋겠다. 언제 소장학자들과 최장집이 끝장 토론이라도 하고, 이를 책으로 냈으면 좋겠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에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다. 치고 빠지거나, 못들은 척하지 말고 말이다. 나의 소박한 믿음은, 민주주의에 대해 민주적으로 논의하는 사회야말로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꼭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답을 내리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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