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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의 고백 "이승만은 제 정신 아닌 '늙은 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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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의 고백 "이승만은 제 정신 아닌 '늙은 악당'"

[해방일기] 1946년 6월 16일

1946년 6월 16일

해방 직후 이승만의 귀국 과정에서 미국 국무부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시점 이승만의 입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45년 4월에서 6월까지 샌프란시스코 회의 기간 중의 반소-반공 선전활동이었다. 이것은 전후 처리에서 소련과의 협조 관계를 중시하는 국무부의 기본 방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후대하고 귀국을 도와준 것은 국무부의 기본 방침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소련과의 적대 관계를 원했고, 그것은 당시 미국 군부에서 널리 공유하고 있던 자세였다. 맥아더에게 불려가 도쿄에서 이승만을 만나고 돌아온 하지가 그에게 칙사 대접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승만은 하지에 대한 영향력을 밑천으로 임시정부 세력을 자기 휘하에 끌어들이려 했다. 김구 등 임정 주류는 이승만의 입장을 존중했다. 그러나 휘하에 들어가려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스크바 3상 회의 전에 독촉을 통일 전선으로 만들려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3상 회의 직후에는 김구 세력이 반탁 운동의 물결을 타고 미군정을 물 먹이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그리고 미소공위 개회 전에 민주의원을 우익 주도의 통일 전선으로 만들려는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좌익 주도의 민전이 훨씬 더 통일 전선에 접근한 모습을 보였다.

우익 영도자로 자리를 굳히는 이승만과 김구에게 하지가 불만을 품을 만한 조건은 계속 쌓여갔다. 3월 이승만의 '광산 스캔들'이 터져 나왔을 때 즉각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난 것도 하지의 신뢰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5월 하순까지 하지의 정치 고문으로 있던 이승만의 측근 굿펠로에게 하지가 6월 23일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을 "늙은 악당"으로 지칭한 데서(<우남 이승만 연구>(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572쪽) 이승만에 대한 하지의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5~6월경 하지의 이승만에 대한 태도를 서중석은 이렇게까지 설명했다.

1946년 5, 6월경 하지 장군의 이승만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하지와 러치 군정장관은 이승만이 과대망상으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1946년 6월 초, 하지 장군은 어떤 정신병 의사로 하여금 이승만과 다소 은밀하게 면담을 가지도록 일을 진행시키었다고 한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397쪽)

김구는 미국인들에게 전혀 신뢰를 받지 못했다. 5월 22일 미 국무-육군-해군 3부 합동 회의에서 국무부 점령 지구 담당 차관보 힐드링이 "그동안 우리가 김구를 지도자로 선택했던 것은 적을 동지로 알고 지지해온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를 계속 지지할 경우 장차 미국의 입장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95쪽)

6월 6일 힐드링은 육군부 작전처로 대한 정책에 관한 각서를 보냈는데, 미군정에 대한 한국인의 지지 기반을 넓히고 미소 간 교섭에서 미국 측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담은 것이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95~396쪽에서 그 내용 일부를 재인용한다.

한국에 자치 독립 정부의 수립, 유엔 가입, 경제 건설, 교육의 강화는 미국의 기본적 대한 정책이다. 한편 당면한 정책으로는 소련과의 협상에서 미국이 유리한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미국 정책에 대한 한국인의 적극적인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 미군정은 부득이 해방 후 귀국한 정치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정계 은퇴를 유도하고, 가급적 일본 통치 기간 중 한국에 남아 있던 사람 가운데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 한국 정계에 태풍의 눈이며, 말썽의 근원인 몇몇 정객들을 임시로 정계에서 은퇴케 한다면, 미소 간에 원만한 합의를 모색하는 것은 물론, 남한 안의 각 정치 세력을 매우 고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정계에 남아 있다는 것은 소련과의 합의를 점점 어렵게 할 것이며, 소련이 반소적인 그들을 모스크바 결의에 따른 임시 정부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은 일리가 있다.


미소공위 개막 때 인사말에서 소련 측 대표 스티코프 중장은 소련에게 위협을 주지 않는 국가가 한반도에 세워지기 바란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일본 항복 전부터 '얄타 밀약설'을 들먹이며 반소-반공 태도를 분명히 한 이승만, 그에 동조해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배격해 온 김구는 굳이 지목해서 밝히지 않아도 소련에게 기피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새 국가를 이끌게 되면 소련에 위협을 주는 태도를 취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소련과의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존재라 하더라도 이승만과 김구가 미국과 미군정에 대한 조선인의 지지를 어느 정도 잘 키우고 모아줄 능력과 성의를 보인다면 이용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극우파 중심으로 우익을 결속시키는 데만 열중해서 임정마저 분열시키고 중도파까지도 민전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조선에 상당한 수준의 사회 경제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는 국무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하지 같은 반공주의자라도 막무가내로 배척할 수 없게 되었다.

좌우 대립의 전선은 2월에 민주의원과 민전 사이에 형성되었다. 우익에게 형편없이 불리한 구도였다.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받드는 민주의원은 그 핵심 인물인 안재홍의 눈에도 "고궁에서 한담"이나 나누는 존재가 되었다. 정치적 과제를 능동적으로 추구하기는커녕 미소공위의 협의 상대 신청을 놓고도 영수들의 눈치나 살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민주의원의 실패로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빠졌다. 이승만과 굿펠로의 단독 정부 주장은 이미 불리해진 협상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 길을 가자는 것이었다. 이것을 하지는 하나의 옵션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지만, 그 하나의 옵션에만 만족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의 행동 방식으로 볼 때, 단독 정부를 세우더라도 원만한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고, 그것은 점령군 사령관의 책임이 걸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는 민주의원보다 대표성이 강한 조직을 원했다. 그렇다고 민전을 포용할 수는 없었다. 중도파가 민전에 가담했지만 주도권을 공산당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중석은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49~353쪽에서 합작파와 비합작파를 "민전 내부의 두 조류"라고 설명했는데, 공산당은 민전을 유일한 민주주의 세력으로 규정하며 중간파의 존재를 부정했다.

오늘 조선의 정치적 분열은 좌우의 분열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와의 원칙적 분열이며, 오늘에 있어서는 '중간파'라고 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우리의 옳은 견해를 실천으로써 증명한 것이다. (<해방일보> 1946년 2월 20일자,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51쪽에서 재인용)

5월 초순에 미군정이 공개한 조봉암의 편지에도 공산당의 지나치게 경직된 민전 장악 시도를 비판한 대목이 있다. (5월 10일자 일기) 편지의 일부를 미군정에서 조작했다는 본인의 항의가 있기는 했지만, 이 비판은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민족 전선은 잘 될 줄 아오마는 역시 통일 전선으로서는 우리 당원이 과대히 침투했기 때문에 비당(非黨) 군중의 능동적 활동을 스스로 제약시키고 있다고 보오. 당이 크고 옳은 전선을 내세운 바에는 대중을 그 길로 나가도록만 하면 족하지 않겠소. '지방에서는 당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여야 된다.' 등의 지령은 과오로 생각되오.

미군정과 우익의 자세에 변화가 있어도 민전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은 공산당의 확고한 장악 때문이었다. 공산당은 민전을 앞세워 민주의원을 고립시킨 유리한 형세를 고수하기 위해 민전이 더 이상 우익을 향해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하지가 좌우 합작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민전보다 우세하면서 미국과 미군정을 지지하는 통일 전선이었다. 한민당, 한독당과 민주의원에도 더 이상 영수들의 편협한 노선에 묵종만 할 수 없다는 중도파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민전과 좌익에서도 공산당의 강경 노선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심지어 공산당 내에서도 조봉암의 편지에 보이는 것처럼 박헌영 노선에 대한 반발이 나타나고 있었다. 양측의 합작파를 미군정이 지원하면 극우파에게는 따라오는 것밖에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니 민전보다 더 기반이 넓은 통일 전선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하지의 계산이었다.

5월 초순 미소공위 정회와 함께 시작된 미군정의 다각적 좌익 탄압(5월 13일자 일기)도 공산당의 고립에 초점을 둔 좌우 합작 추진 방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봉암 편지의 공개와 정판사 사건은 분명히 공산당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5월 25일 합작을 위한 첫 준비 모임 때 공산당은 수세에 빠져 있었다.

강경 노선으로 통일 전선 노력을 거듭거듭 좌절시켜 온 공산당의 입장이 약화되어 있던 상황 덕분에 중도 우파 인물들이 희망을 가지고 모임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용욱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1946년 봄의 시점에서 미국이 중간파에 주목하게 된 것은 미소공위 결렬 이후의 상황 변화와 남한에서 중간파의 정치적 위상 제고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중간파에 접근한 이유가 중간파가 당시 정치 상황에서 지닌 고유한 역동성, 즉 조직적으로는 미약하지만 민족 통일 전선 형성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와 적극적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미국은 중간파가 일방적으로 소련에 치우치지 않고 있다는 점, 그러나 방치해 두면 소련에 우호적인 세력이 되어 정치적 균형과 지지 기반의 상실에 일조를 하게 될 것이라는 점, 또 이들의 개혁 지향적이고 자유주의적 성격을 잘 이용하면 일정한 한도 안에서 개량주의적 개혁을 실시할 수 있고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 보다 주목하였다. 즉 미국은 중간파가 대소 반공 정책의 추구에도 유용하다는 점과 이들을 통해 미국의 정책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 1차적으로 주목하였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정영욱 지음, 중심 펴냄), 126쪽)


이렇게 본다면 하지가 바라본 좌우 합작이 진선진미(盡善盡美)한 정책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현실적 타당성을 가진 건실한 정책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 정책의 성공을 위한 일관된 노력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단적인 문제가 친일파의 옹호와 등용이었다. 친일파에게는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고, 행정 조직과 경찰에서 그들의 역할이 좌우합작의 성공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단독 정부 수립도 좌우 합작을 통한 민족 통일 국가 수립도 확고한 목표가 아니라 대등한 옵션으로서 선택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가 방치되었던 것이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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