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특히 "이들 폭격은 신의 징벌이자 인간의 복수였다"며, "드레스덴은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의 복수"였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군국주의에 희생된 아시아인의 복수, 특히 731부대 생체실험에 동원된 마루타의 복수였다"고 했다.
"불벼락"을 맞은 독일은 개과천선했지만, 일본의 "어떤 지도자들은 침략 역사를 부인하고 망언으로 아시아의 상처를 들쑤신다"고 비난했다. 특히 "아베(安倍晋三)는 웃으면서 731 숫자가 적힌 훈련기에 올라탔다"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의 행동은 그의 자유다. 하지만 신에게도 자유가 있다. 마루타의 원혼(寃魂)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그래서 일본에 대한 불벼락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도 신의 자유일 것이다." 제2의 불벼락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 히로시마 원폭투하장면 ⓒ프레시안 자료사진 |
그러자 일본도 발끈하고 나섰다. 일본 정부는 서울 대사관을 통해 <중앙일보>에 항의하는 한편, 관방장관은 "정말로 분별없는 언급"이라고 강한 유감을 표했다. 또한 피폭 도시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시장들도 피폭자의 고통을 무시한 것이자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일부 우익 단체들은 반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파문이 커지자 <중앙일보>도 진화에 나섰다. 서경호 대변인은 "김진 논설위원 개인의 시각과 주장이며, <중앙일보>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고 밝혔고, 당사자인 김진도 "일본 원폭 희생자와 유족을 포함해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유감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그러나 <중앙일보>회사 차원의 발빼기와 김진의 '유감' 표명으로 넘어갈 사안은 아니다. 김진은 물론이고 회사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가 필요할 것이다.
미국이 100% 이성적?
더 중요하게는 김진 개인의 문제로 넘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칼럼 및 이번 파문을 다룬 기사들의 댓글을 살펴보면 비판 못지않게 격려 메시지도 쏟아지고 있다. 이러한 정서의 밑바탕에는 최근 일본 일부 정치인들의 도발적 언행뿐만 아니라 일본의 피폭에 대해 '당할 짓을 했다'는 한국인 일각의 정서도 깔려 있다. 미국의 원폭 투하의 배경과 동기에 대해 객관적이고 균형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무고한 시민 20여만 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만 명의 원폭피해자가 평생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아왔으며 이 가운데에는 '강제 징용-피폭-외면'을 당해온 조선인 피폭자 7만 명이 있었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 고통이 일부 2세, 3세에게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현실이다. 김진이 이러한 피폭자들의 고통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다면 이런 식의 칼럼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미국을 신격화하면서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려는 태도이다. 그는 인간의 정치적 선택을 '신의 징벌'로 승화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미국의 무오류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깔려 있다. 이러한 분석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김진 위원은 3월 11일 자 칼럼(☞바로가기)에서 "역사상 처음 핵을 사용한 건 미국이다. 1945년 일본에 핵을 쓸 때 미국은 100% 이성적(理性的)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목적은 일본의 항전(抗戰) 의지를 꺾는 것이었다"며, "어디를 때려야 정신적·군사적으로 일본이 충격을 받을지 미국은 냉철히 따졌다"고 적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는 스탈린을 겨냥한 무력시위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우선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미국의 원폭 투하와 일본의 항복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 사이의 관계를 30년 동안 추적해온 미국의 핵 전문가인 워드 윌슨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은 광범위한 사료 분석을 통해 일제의 항복은 소련에 참전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내고 있다. (☞참고자료 : 워드 윌슨의 <포린폴리시> 기고문)
또한 트루먼 행정부 내에서조차 일본에 천황제 유지를 약속해주면 조기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며 협상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가 일본이 거부하자 원폭 투하를 강행했고 일본이 항복하자 천황제를 유지키로 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미국의 원폭 투하 의도가 다른 데에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바로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던 소련을 겨냥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더 짙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폭 투하를 강하게 주장했던 번스 국무장관은 핵무기를 "문 뒤의 총"이라고 부르면서 "소련을 더욱 잘 다룰 수 있게 하기 위해" 원폭 투하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를 간파한 스탈린은 미국의 원폭 투하를 자신을 겨냥한 무력시위로 간주하고 소련의 핵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을 서두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또한 김진이 "100% 이성적"이었다는 미국 정부의 조치에 절망과 실망을 느낀 많은 과학자들은 반핵주의자로 돌아서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국제 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런 사실들이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 중고등 교과서에도 '일본이 원폭을 맞고 항복을 선언했다'는 식의 서술에 머물러 있는데, 이는 '미국의 원폭 투하=해방의 무기'라는 굴절된 역사 인식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독일·프랑스 공동역사 교과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원자탄이 아니었다면 연합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없었을까? 어쩌면 미국은 이 값비싼 신무기의 파괴력을 시험해 보는 동시에, 자국의 우월성을 소련에 과시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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