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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사기꾼이 펼치는 종횡무진 '역사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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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사기꾼이 펼치는 종횡무진 '역사 스페셜'

[프레시안 books] 찰스 밴 도렌의 <지식의 역사>

<지식의 역사>(찰스 밴 도렌 지음,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대단하다 못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지식을 찾아'란 부제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지식'은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다루는'역사'는 그 범위를 어디까지 정할 것인지. 막연하고도 만만치 않은 제목이다.

그러니 책 소개는 성격 규정으로 시작할 일이다. 한 마디로 책은 문명사를 다뤘다. 문화사는 많이 들어봤는데 문명사라니 하고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문화사에 과학기술사를 더한 것이다. 철학, 예술 등 인문 분야의 흐름을 훑으면서 파피루스의 발명에서 컴퓨터의 기반을 닦은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까지 발명, 발견과 과학자에도 내용의 상당 부분을 배려한 형식이다.

사실 이런 주제는 한 사람이 개관하기 쉽지 않다. 저자에게 일차 관심이 가는 이유다. 이 책의 경우, 저자는 이를 다룰 자격을 일단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밴 도렌 가문은 미국의 대표적이 문인들을 다수 배출한 지식인 가문이다. 시인, 작가, 문학평론가로 다양한 활동을 펼친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퓰리처 상을 받았다. 어머니는 소설가로 활약했다. "유일하게 책을 쓰지 않은 밴 도렌"이라는 큰어머니마저 30년 넘게 일간지 서평 담당자로 활동했다. 말하자면 지은이는 타고난 저술가란 이야기다.

▲ <지식의 역사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지식을 찾아>(찰스 밴 도렌 지음,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갈라파고스
핏줄이 반드시 책의 수준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란 지적이 나올 수 있겠다. 이런 염려는 지은이의 다채로운 이력이 덜어준다. 미국의 명문 대학인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희한하게도 천체물리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영문학 강사를 거쳐 그 유명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자로 17년간 일했으니 말이다. 미국의 경우 전문가인 저자들과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전문성을 갖춘 편집자가 적지 않다니 이 정도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두루 논할 만한 지적 소양을 갖춘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이야기가 잠깐 옆길로 흐르지만 지은이는 화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찰스 밴 도렌은 1950년대 미국에서 붐을 이뤘던 TV 퀴즈쇼의 챔피언이었다. 두 명의 출연자가 21개의 문제를 놓고 겨루는 NBC의 <21>에서 우승하면서 미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한데 이것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각본에 따라 박진감 넘치는 대결을 연출한 결과로 드러났다. 그 후폭풍으로 퀴즈쇼는 사라지고, 본인은 의회 청문회에까지 서야 했다. 숱하게 손가락질을 받는 신세가 된 그는 반 은둔 생활을 하다가 대학 강사에서 사전 편집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찰스 본인으로서야 호된 시련을 겪었지만 이런 인문 교양서를 쓸 바탕을 닦는 기회를 얻은 셈이어서 전화위복이 되었다 할까.

어쨌거나 저자의 내공과 인간적 깊이가 어우러진 책은 흥미롭다. 연대기처럼 사건이나 권력 지형 변화 위주로 서술하는 대신 흐름을 짚는 형식이어서 여느 역사책과는 다른 재미와 정보가 그득하다. 특히 고대사를 다룬 대목에서 지은이의 탁견이 드러난다.

약 3000년간 존속한 고대 이집트 문명을 4쪽 분량으로 압축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해 가능한 한 변화를 회피했다는 특징을 콕 집어낸다. 이집트 문명의 정체성을 지적하고서는 "변화만을 위한 변화라면 과연 무슨 장점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만약 지금 그대로의 삶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면 굳이 무엇 때문에 그걸 변화시켜야 하겠는가? 전제군주의 관점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더 나쁠 수밖에 없다. 이집트인은 (…) 전제군주들에게 대단한 가치를 지닌 비밀을 발견한 셈이었다. 심지어 우리 시대의 전제군주들 역시 그 비밀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인더스-갠지스 문명을 다루면서는 계급 차별 제도인 '카스트'가 오랫동안 존속한 이유는 무엇일까란 의문을 제기해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던지는 것도 그런 예다.

이 책에서만 읽을 수 있는 귀띔도 있다. 오늘날까지 그 영향을 미치는 바빌로니아 인의 중대 발명이 뭘까. 이는 숫자 표기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자릿값 기수법이다. 가령 '568'에서 5는 100자리, 6은 10자리라는 뜻이라는 약속이 없었다면 인류는 상당히 성가신 숫자 표기법을 사용해야 하고 이럴 경우 더하기 빼기부터 원리가 달라졌으리라. 결국 문명의 토대가 달라지거나 발전 속도가 더뎠을 것이란 추론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

과학적 방법론을 창안해 과학 발전에 큰 전환점을 마련한 르네 데카르트의 한계를 거론한 대목도 신선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철저한 회의론이 어떤 경우엔 잘못 해석된 나머지 프랑스 과학 발전을 두 세기나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고 봤으니 말이다. 영국이 미적분의 공동 발견자라 할 독일의 라이프니츠의 더 효율적인 용어법 대신 자국의 뉴턴 용어법을 고집하다가 한 세기 이상 수학 발전이 뒤처진 사례 역시 마찬가지다.

르네상스가 활짝 꽃 피우게 된 배경 설명도 돋보인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을 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피난민들이 다양한 그리스-로마 고전을 가지고 와 탁월한 원고가 급증한 점과 함께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사망한 결과 그들의 재산이 남았고 그들의 옷이 더 많은 책을 저렴하게 인쇄할 '천 종이'의 공급원이 되었다는 풀이는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란 감탄이 나오게 한다.

책은 이처럼 유니크하고 흥미로운 대목이 많지만, 대부분의 책의 그렇듯 한계와 아쉬움이 있다. 우선 서양의 지식사란 한계가 있다. 중국 문명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다룬다 해도 진시황의 통치 이념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법가'가 아니라 유교의 가르침이라 잘못 설명했다.

이는 저자가 미국인이란 점에서 비롯됐지만 워낙 방대한 주제를 다루다 보니 넣을 만한데 놓친 대목도 더러 눈에 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원인을 유럽 열강 간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풀어가면서 한스 콘처럼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충돌로 보는 시각은 비추지 않은 것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19세기 이후를 다룬 대목부터는 내용이 성글다. 사실 별도의 책으로 다뤄도 모자랄 주제니 그럴 만도 하지만, 주요 인물 약전 식으로 풀어간 체제를 읽다 보면 지은이가 버거워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한 1991년 현지 출간됐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역사서로는 특이하게 다가올 100년을 예측한 마지막 장(章)의 내용은 이미 어긋난 부분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가 부정적으로 본 CD로 이뤄진 참고 자료 도서관, 3D 영화, 디지털 카메라가 상용화가 된 것이 그런 예다.

이런저런 아쉬움을 느끼니 책의 원제에 숨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The History of Knowledge'라 하는 대신 '어떤' 혹은 '하나의'란 뉘앙스를 담은 'A History~'라 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학기술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까치 펴냄>나 <인간 등정의 발자취>(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바다출판사)를 함께 읽을 것을 강추한다.

참고로 이 책은 1995년 고려문화사에서 같은 제목의 두 권짜리 책으로 출간된 바 있음을 덧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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