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 교수는 글을 많이 쓰지 않았는데 올해 초에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오래 전에 발표한 글을 정리해서 묶은 이 책의 제목은 참으로 시의적절하게도 <다시 언론 자유를 생각한다>(한길사 펴냄)이다. 첫 번째 글인 '지식인은 누구인가'는 2001년에 발표된 것인데, 그 첫 부분에서 그는 지식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지식인은 그 시대, 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부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비판의 대상은 언제나 기성 구조이며, 구체적으로는 그 시대, 그 사회의 권력이나 기득권 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은 항상 권력의 기피 인물이며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백안시된다. 그래서 언제나 지식인은 '주변적 존재'이며 권력에게 사육당하지 않는 존재이다. (<다시 언론 자유를 생각한다>, 15쪽)
권력이나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은 지식인의 본질적인 과제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지식인은 권력이나 기득권 세력에 의해 억압받기 쉽다. 민주화의 후퇴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크게 모으고 있는 정치적 현안은 아마도 정권 내부의 권력 투쟁일 것이다. 집권 3년차에 접어들면서 박영준 등 공신파와 정두언 등 쇄신파의 갈등과 대립이 아예 심각한 투쟁의 양상을 보이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두언 의원은 문제의 핵심은 '권력 투쟁'이 아니라 '국정 농단'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흔히 '왕차관'이라고 불리는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막강한 권력으로 국정을 농단해서 정치와 경제의 모든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서 박영준 국무차장도 기자회견을 열어서 자신의 결백을 강력히 주장했다. 최고 권력의 최측근인 두 사람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여기에 쏠리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발단이 된 사건이다.
그것은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시민 김종익을 오랫동안 사찰한 사건이다. '사찰'이란 쉽게 말해서 '감시'를 뜻한다. 본인이 모르게 본인의 모든 활동과 관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생각까지 엿보는 것이 바로 사찰이다.
사찰은 개인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 사찰의 대상자는 모든 사회 활동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격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사찰은 극히 엄격하게 실행되어야 한다.
한 시민에 대해 정부가 법을 철저히 어겨가며 사찰을 저질렀고, 그 결과를 이른바 '비선'을 통해 상층에 보고했고, 그 사실이 드러나자 적나라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아직까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피해자를 사상이 불순한 자라거나 노무현 정권의 비자금을 세탁한 자라며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 박영준 국무차장(왼쪽)과 정두언 의원(오른쪽). 최고 권력의 최측근 두 사람이 이번 국무총리실의 사찰 사건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정권의 혼란이며, 정권의 혼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고통이다. ⓒ뉴시스(왼쪽)·프레시안(김하영) |
이번에 드러난 사찰 사건은 이 정권이 광범위한 사찰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사찰 정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중대한 증거일 수 있다. 공신파와 쇄신파의 대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드러난 정권의 혼란이며, 정권의 혼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드러난 국민의 고통이다.
권력과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는 지식인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사찰이 행해지는 곳에서 국민의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문제가 있어도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으니, 문제는 더욱 더 악화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국민의 고통은 더욱 더 커지게 된다.
사찰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사찰 정권'에 대해 우리가 깊이 우려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고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이다. 그것은 시민들을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자신을 목적으로 만든다.
'사찰 정권'의 개혁은 사회의 발전에 앞서서 사회의 안정을 위해 극히 중요한 과제이다. 그 문제가 널리 알려졌으나 제대로 개혁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만성적인 불안과 불신의 상태에 빠지기 쉽다. 지난 2년 사이에 나도 계좌 추적과 이메일 압수 수색을 당했다. 전자는 환경운동연합 간사의 횡령 사건을 수사하는 중에 당한 것이며, 후자는 이동관 홍보수석의 명예 훼손 사건을 수사하는 중에 당했다.
나는 둘 다 명백히 과도한 수사였다고 생각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둘 다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했다는 사실이다. 한참 뒤에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너무나 참담해서 한동안 어쩔 줄을 몰랐다. 은행 거래와 이메일 소통은 생활의 두 축이다. 나는 두 축이 상당히 파괴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찰 정권'의 작동 방식과 그 목적에 대해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상 경찰이 모든 사람을 언제나 감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떻든 그들은 하고 싶은 때면 언제든 감시의 선을 꽂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내는 소리는 모두 들리고 캄캄할 때 외에는 그의 모든 동작이 세세히 감시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살아가야 하고 또 그게 본능으로까지 습관화되어 있었다. (<1984년>, 김병익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6~7쪽)
20년쯤 뒤에 미셸 푸코가 흥미롭게 추적하는 '감시 권력'의 문제를 조지 오웰은 이렇듯 훨씬 생생하게 형상화해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조지 오웰이 다룬 국가는 '빅 브라더', 즉 '대형'이라고 불리는 독재자가 통치하는 독재 국가인 반면에 미셸 푸코가 다룬 국가는 독재 국가와 민주 국가를 모두 포괄하는 근대 국가이다. 미셸 푸코는 심지어 민주 국가라고 하더라도 심각한 감시와 인권 침해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던 것이다.
일반 시민마저 사찰의 대상이니 지식인은 더욱 더 그렇지 않을까? 토건국가의 극단화에 해당되는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살리기'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 애쓰는 나로서는 자연스레 2008년 3월에 불거졌던 '교수 사찰' 논란을 떠올리게 되었다. 2008년 3월 25일, 전국에서 거의 2500명의 교수들이 참여해서 '한반도 대운하 반대 전국 교수 모임'이 발족했다.
그 다음날인 3월 26일, 공동대표의 한 명인 서울대학교 김종욱 교수를 무려 3명의 형사들이 찾아갔다. 그들은 '한반도 대운하' 반대 서명에 참여한 교수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질문하고, 특히 교수 모임과 당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일상적인 정보 수집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렇다면 이 정권은 정말 '사찰 정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잘못된 정책을 잘못된 방식으로 강행하지 않는다면, 법을 어기고 사찰을 시행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잘못된 정책의 예는 다시 말할 것도 없이 '4대강 죽이기'이자 '대운하 1단계'인 '4대강 살리기'이다.
오늘날 이 나라를 만들어 놓은 위대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어떤 사찰로도 지식인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의 우려와 비판을 제압할 수 없다. '사찰 정권'은 문제를 더욱 더 악화시킬 뿐이다.
탈정치화를 조장하는 권력 투쟁과 국정 농단의 논란을 넘어서 배가 아니라 아예 나라를 산으로 몰고 가는 '사찰 정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4대강 죽이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욱 더 굳세게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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