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에서 야권이 구축해야 할 전선의 성격과 관련해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한쪽은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다른 한쪽은 사회경제적 이슈를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입장 모두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백낙청 교수는 민주주의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식의 '민주 대 반민주(=독재)'의 구도가 더는 적용되지 않는다 해서 민주주의 문제가 덜 절실한 것은 아니다. 사실 민주화는 87년 체제에서도 여전히 핵심현안이었고, 이를 '정치적 민주화'는 됐는데 '경제적 민주화'가 안 되었다는 식으로 정리하는 것도 안일한 태도다. 이는 분단체제의 근원적 비민주성에 대한 인식 부족인 동시에, 박근혜 전 대표를 상대로 하는 승부에서 복지보다 민주주의 이슈가 한층 파괴력을 가질 것을 간과한 전략적 오류이기도 하다."
백 교수의 언급은 충분히 주목해 볼만한 언급이다. MB 정부에서 확인되는 민주주의 후퇴는 MB의 개인 스타일보다 분단체제의 비민주성, 강자·승자독식의 경제를 위한 불가피한 조건으로서의 민주주의 위축 등의 측면에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후퇴나 위축은 사회적 역관계를 반영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온전하게 구현하도록 하는 '민주투쟁'이 사회경제적 조건을 확장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무릇 좋은 민주주의는 서민의 삶을 낫게 만든다.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민생이 안정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검증된 명제다. 민주주의와 '먹고 사는' 문제를 따로 떼어내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민주주의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관철될 때 정부도 서민의 이해와 요구에 맞는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래리 바르텔스(Larry M. Bartels) 교수가 미국에 대해 '불평등 민주주의'(unequal democracy)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민주를 강조하는 입장에 대비되는 관점이 사회경제적 이슈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의 대표적 주장은 최장집 교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 정당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당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다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야당이 특히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어떤 정부가 될 것인지를 준비한다는 것은 경제운용에 대안을 갖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뜻한다. 야당도 유능하고 실력 있는 정부를 만들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여야 간 정치경쟁의 중심축을 이동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치와 열정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타협이 어려워 대결의 정치를 불러오는 민족문제 내지 이념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부터, 협상과 타협이 가능한 부의 분배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문제로 갈등 축을 이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의 주장을 배타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차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전선을 민주주의 이슈를 중심으로 편성하느냐, 사회경제적 이슈를 중심으로 하느냐는 매우 큰 차이를 낳는다. 전자의 경우, 민간인 불법사찰이나 MB의 내곡동 사저 건, 검찰개혁 등의 이슈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또 박근혜 후보의 5.16 발언 등 과거사 인식이나 장준하 선생 의문사 따위의 사안에 초점을 맞추어서 공세를 펼쳐야 한다.
반면에 사회경제적 이슈에 초점을 맞출 경우엔 경제민주화나 복지, 비정규직 문제와 같은 노동개혁 등의 아젠다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절박한지 생각해 보면 이런 관점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반MB는 민주주의 문제와 먹고 사는 문제가 동시에 작용해서 빚어진 현상이다. 때문에 어느 하나에 방점을 찍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민주화를 이룩한 지 25년이 지나 반민주를 일상에서 체감하기 힘들고, 민주세력에게 정권을 10년 맡겨봤으나 별로 달라진 삶을 체험하지 못한 국민들로선 이제 민주를 표방하는 것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서민들의 삶이 너무 힘들고 불안하다. 김기원 교수의 진단 그대로 우리 국민들은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라는 3개의 키워드로 요약되는 어려움의 해소를 갈구하고 있다. 일하고도 빈곤에 시달리는 '워킹 푸어'(working poor)가 350만 명 가량이다. 집을 담보로 잡히고 대출받은 이자에 월급 절반 안팎을 쏟아 붓는 '하우스 푸어'(house poor)가 5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에듀 푸어'(edu poor, 교육빈곤층)의 규모가 300만을 넘어서고 있다. 노인 빈곤율(전체 노인 중 중위소득 미만에 속하는 노인의 비율)은 45%로 34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일본(22%)·그리스(23%)·미국(24%)의 두 배에 달하고, 2위 아일랜드(31%)보다 14%포인트나 높다. 이 정도면 '올드 푸어'(old poor, 노인빈곤층)란 말이 생겨날 지경이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기권은 보수의 핵심전략이다. 이들을 투표장으로 불러내지 못하면 진보개혁 진영의 미래는 없다." ⓒ프레시안(최형락) |
바르텔스 교수의 단언처럼 빈곤 등 불평등은 정치적 결과물이다. 서민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세력·정당이 무능해서 정치에서 패배한 결과 부자의 편을 드는 정책이 실행됐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는 말이다. 사실 집권했을 때나 야당일 때 모두 진보개혁 세력은 서민의 삶을 살피는 데 소홀했고, 무능했다. 따라서 빈곤과 양극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민의 편을 드는 세력·정당이 유능해지고, 그럼으로써 서민들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정당을 통해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은 민주주의 후퇴와 먹고 사는 문제가 결합된 '가난한 민주주의'(poor democracy)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민주주의'는 1% 부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것뿐만 아니라 서민의 편을 드는 세력·정당의 정치역량이 빈곤하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 서민이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한편 그 세력과 정당이 유능한 민주주의를 말한다. 표현을 만들어 보면, '행복한 민주주의'(happy democracy)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유능한 정당에 의해 서민의 이해가 잘 대변됨으로써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그 결과 서민이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가난한 민주주의에서는 서민들이 정치의 효용을 체감하지 못한다. 누가 집권하더라도 자신의 삶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굳이 투표하러 나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투표동기를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기권을 선택하고 있다. 사실 사회경제적 약자의 기권은 보수의 핵심전략이다. 이들을 투표장으로 불러내지 못하면 진보개혁 진영의 미래는 없다. 이들은 민주화 이후에 대거 투표장을 떠났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진 이상 이들을 움직일 동인은 고단한 삶을 개선할 정책대안이다. 보수와 다른 해법, 서민 지향의 해법을 가진 정당대안이 눈에 띌 때 투표동기를 갖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윤리적 관점이 아니라 생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이 아니라 부자민주주의 대 서민민주주의 프레임이 옳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주의 차원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사회경제적 차원을 결합하려면 결국 어떤 민주주의이냐의 문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해답이 행복한 민주주의, 서민민주주의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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