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은 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을 배출했다. 인종 문제로 내전까지 치른 나라였으니 실로 어려운 일을 해낸 셈이다. 당시 대선에서의 투표율은 63%였다. 4년 전 대선에서의 투표율(56.7%)에 비해 6.3%포인트 늘어났다. 대개 투표에 나서지 않았던 젊은층, 소수인종, 여성들이 대거 투표장에 나선 탓이다. 그런데 이 투표율이 2년 뒤 중간선거(by-election)에서는 40.3%로 떨어졌다. 왜 그랬을까?
미국 선거의 경우 흔히 대선보다는 중간 선거의 투표율이 낮게 마련이다. 하지만 20%포인트가 넘는 대폭락은 이런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진실은 2008년에 투표장에 나섰던 사람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권한 데에 있다. 사실 선거는 누가 자신의 지지층을 투표장에 더 많이 나가게 하느냐의 싸움이다. 민주당 성향의 유권자들이 덜 투표하니 상대적으로 공화당 지지 투표자의 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낮은 투표율에 의해 민주당은 참패했다. 하원에서 63석을 잃었고, 상원과 주지사 선거에서 각각 6개 지역에서 패배했다.
투표율이 낮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민주당이 자신들의 지지층에게 투표장으로 나갈 동기를 부여하는 데 실패한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공화당 지지층의 결집이다. 여기에 티파티(tea party)의 역할이 있다. 분석에 따르면 티파티 구성원들은 주로 백인 노년층에, 부유하며,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여 공화당의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65세 고연령층에서 공화당은 민주당에 비해 2008년 8%포인트 더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2010년엔 21%포인트를 더 얻었다. 티파티는 오바마의 건강보험 개혁으로 노인들의 건강보험 혜택이 줄어들 것이란 우려를 집중적으로 제기해 노인들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한 쪽은 결집하고, 한 쪽은 이완됐다. 이러면 선거결과는 뻔하다. 느슨한 쪽이 지기 마련이다. 미국의 민주당 지지층은 왜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을까? 오바마 탓이다. <정치적 뇌>의 저자 드류 웨스턴 에모리대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간명하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2009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월가의 38개 대형 금융회사가 자사의 투자자 및 경영진에 총 1400만 달러라는 사상 최고의 경이적인 돈다발을 안겨주도록 방치했다. 결국 지지층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기는커녕 그 정서를 달래는 데에도 실패했다는 뜻이다. 투표장에 나가서 찍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 않았으니 패배는 당연하다.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와 2010년 중간선거 당시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프레시안 |
2012년 19대 총선, 마치 2010년 미국의 중간선거를 보는 듯하다. 2010년 6월의 지방선거부터 20~30대 유권자들은 이명박 정권을 혹독하게 매질했다. 여기에는 40대도 동참했다. 그래서 '2040세대'란 말까지 등장했다. 그 절정은 2011년 10월의 재보궐 선거였다. 이런 흐름 속에 보수는 혁신을 선택했다. 당헌·당규까지 고쳐 박근혜를 전면에 내세웠다. 화근으로 지목되던 인물(MB)은 가시권에서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떨떠름해하던 보수가 다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 당을 지지하는 것이 창피스럽던 중도의 일부도 다시 마음의 문을 열었다.
야권은 혁신 대신 통합을 선택했다. 2007년과 2008년의 대선·총선 패배 이후 만들어진 분립구도를 정리하자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정당 지지율에서 새누리당을 앞질렀다. 그런데 거기까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공천에서의 구태와 취약한 리더십, 전략 부재 등으로 그 좋던 분위기를 망쳐놓았다. 그렇게 헤매던 중에 민간인 불법사찰 문서가 대량으로 공개됐다. 너무 반가웠기 때문일까, 민주통합당은 이 이슈를 다루는데도 익숙한 무능을 연출했다.
기자회견장에서 2007년이라고 찍힌 문건을 흔들었다. 한심한 실수다. 비근한 예가 있다. 1996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과 밥 돌이 붙었다. 여론에서 밀리던 돌 진영에서 멋진 아이디어를 냈다. TV토론에서 클린턴을 궁지에 몰아넣기로 했다. 최근 백악관에서 해고된 직원을 방청석, 그것도 클린턴의 바로 앞자리에 앉혀 클린턴을 당황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이 회심의 묘수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 클린턴이 그 직원의 얼굴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통합당은 성급하게 하야, 탄핵 운운했다. 대체로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무리한 결론을 강요하면 누구든 불편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탄핵의 아픔을 겪어본 사람들이 너무 쉽게 탄핵까지 운운하면 불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쾌감이나 짜증을 낳는 수준이다.
2012년 3월 한국, 일방은 절박감 속에서 새롭게 해보자며 결속했다. 다른 일방은 어영부영하면서 성패도 나기 전에 전리품 챙기기에 바빴다. 공천 얘기다. 이쯤 되면 판세가 뒤바뀌는 건 당연지사다. 절대 우세에서 시작된 선거 분위기는 박빙 혼전으로 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시절 어려움에 처한 것도 지지기반을 흩트려 놓은 탓이 아니던가. 이러니 저자거리의 장삼이사가 민주통합당의 리더십 부족을 거론하고, 골목의 필부필부가 전략부재를 탓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의 투표율은 46.1%다. 17대 총선은 60.6%다. 4년 만에 14.5%포인트가 빠졌다. 왜일까, 그리고 도대체 기권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 수입 수준이 높은 시민이 투표에 더 적극적이라고 한다. 못 사는 동네일수록 투표율이 낮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먹고 살기 힘들면 물리적으로도 투표장에 가기 쉽지 않다. 그런데 정작 진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바로 정당의 문제다.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해 주는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을 찍었을 때 내 삶이 달라진다면 투표할 동기가 생길 것이다. 다시 말해 없는 사람일수록 찍을 마음이 생기게 해줘야 한다. 그것은 정당의 몫이다. 정당이 자신들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삶을 바꿔줄 것 같으면 당연히 결속한다. 또 불편이나 손해를 감수하고 투표장에도 나간다. 민주통합당이 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말할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하려나. 몰라도 너무 모르고, 못 해도 너무 못 한다.
미국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 불평등을 용인하는 하류로 취급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투표제도다. 사전에 유권자로 등록해야 하는 것 외에도 여러 장치가 쉽게 투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지금도 공화당은 투표 억제(voter suppression)를 고수하고 있다. 보수성향의 헤리티지 재단 설립자 폴 웨이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투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불평등한 투표 참여 때문에 부자 편향적인 정책결과가 생겨났다는 사실은 학자들에 의해 공인된 사실이다. 사회 구성원의 이해와 요구가 골고루 반영되는 민주주의가 강한 민주주의(strong democracy)다.
민주당이 경제적 약자, 서민의 표를 동원하는 데 실패하면 계속 중산층의 요구에 끌려 다녀야 한다. 물론 중산층의 요구를 받아들인 게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발언권이 강한 중산층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상대적으로 저소득층,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겐 소홀하게 된다. 그들은 정치적 의사표현에 불리하거나 둔하다. 줄곧 성장이나 보수에 경도되어 왔던 이들이 이 정부 들어서서 계층적 자각을 해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민주통합당의 미래는 없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의 목표는 간단하다. 투표율을 60%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20~30대 및 저소득층의 지지와 투표 참여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대선도 해 볼 만하고, 그 후에 강한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무릇 선거승리는 하나의 계기일 뿐 전부가 아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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