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엔 전 세계적으로 60개가 넘는 국가에서 정권교체를 걸고 선거가 벌어지는 역사적으로 드문 광경이 펼쳐진다. 세계가 과도기의 격동에 사로잡힐 것인지, 변화 속에서도 지속가능한 평화와 안정을 이룰 것인지에 관심이 쏠린다.
동북아시아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이며, 우리가 속한 곳이다. 작년 말 북한에서 먼저 예상 밖의 '정권교체'로 시동을 걸었다. 사안의 중차대함과 폭발성에 비해서 그간의 정세는 소강상태를 넘어 안정적이기까지 했다. 정중동(靜中動)일 수도 있고 동중정(動中靜)일 수도 있다. 그것을 결정할 최대의 변수는 한반도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령의 존재다. 죽은 줄 알았는데도 늘 되살아나는 유령은 곧 냉전의 잔재다.
▲ 한미 연합 '키 리졸브' 훈련 장면 (2011년) ⓒ연합뉴스 |
한편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의 승리로 신자유주의 시장화와 국가통합, 글로벌 거버넌스 등의 대안이 대대적으로 모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데올로기나 국가의 역할이 축소압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패권경쟁과 국익갈등의 국제정치가 기존 권력에 제공했던 우호적 환경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사회주의 정권들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냉전, 보수 및 기득권세력들이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가는 체제전환의 과정에서 피를 덜 흘린 것은 다행이었으나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는 탈냉전 도래의 핵심 영향권에서 비켜서 있었다. 동서독과 남북한은 공히 냉전체제의 상징이고 핵심이었지만, 구조적 역학은 달랐다.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서독을 한편으로 하고 소련-바르샤바조약기구-동독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동맹간 대결구조의 중심은 기본적으로 미소간 적대적 구도였다. 이 때문에 소련의 붕괴는 구조 전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었고, 독일 통일로 이어졌다. 반면, 한반도를 둘러싼 북-중-러의 북방 삼각체제의 중심은 중국이나 소련이라기보다는 북한이었고, 한-미-일 삼각체제의 중심은 미국이었다. 즉, 북-미간 적대구도가 한반도 냉전체제의 핵심이었다. 때문에 소련의 붕괴로 냉전 대결구도가 약화되기는 했지만 붕괴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냉전의 잔재는 마치 유령처럼 20년을 넘게 동북아를 떠돌며 역내정치에 꾸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역외국일수밖에 없는 미국의 패권 유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국 및 일본과 기존의 비대칭적 동맹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강력한 도전자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할 명분이 제공되었다. 중국도 손해날 것이 없던 것이 내부 반발을 무마하고 기존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에 유리한 환경이었으며, 중국이 가진 독점적인 북한 레버리지의 가치가 더 높아졌다.
이러한 소위 '적대적 공생'은 또한 북한 정권으로 하여금 체제위기 속에서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며, 한국과 일본의 보수우익 기득권 세력에도 정치적 자산을 꾸준히 보급해주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북핵 위기가 이들 권력을 위한 공통의 땔감이었고, 평화와 다자적 국제질서를 추구하는 변화와 진보세력의 입장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서로를 필요로 했던 남북한 기득권
그렇다면 2012년, 앞으로 전개될 동시다발적 권력 이양의 상황에서 한반도의 유령은 과연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유령의 존재를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북한 변수가 매우 중요하다. 남한 보수 세력의 정권 연장 여부와 미국 보수 세력의 정권 획득 여부 역시 북한에 못지않은 핵심 변수다.
북한은 남한의 주요 선거가 있을 때마다 남한의 보수우익 세력을 비난했지만, 적대적 표현과는 달리 실제로는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때로는 남측의 조작이나 과장도 있었으나, 북한 스스로가 남한 대선의 변수로 등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보수우익 세력을 이롭게 했다. 이번에도 북한 당국은 이명박 정부와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서 소위 '역적패당'의 재집권을 저지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정말 그것이 북한의 진정한 의도라면 북한은 한반도의 유령을 불러내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북한 이슈가 주요 선거의 변수가 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는 말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내부 결속의 필요성이 높아질 경우 적대적 공생의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표현처럼 남북의 기득권층은 '싸우는 형제'로 반세기동안 서로를 역설적으로 필요로 해왔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선두로 재집권을 위해 뛰고 있는 여당 대선 주자들이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에 어떤 접근을 하게 될 것인가도 관심거리다. 현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해 보다 전향적인 대북 자세를 보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상황이 불리해질 경우 언제든지 다시 유령을 찾아 나설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위력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과거와는 달리 득실 계산이 명료하지 않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유령은 보수우익의 정치적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유효하다. 남북관계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어서 얻을 표보다, 대북 강경노선을 선언해서 얻을 표가 아직은 더 많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갈림길에서 북한이 혹시라도 선제적으로 자극해올 경우 다시금 북풍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휘둘러질 수 있다. 특히 현재 정치권의 화두인 '복지'에 있어 여야간 차별화가 점점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안보의 효용 가치는 상승할 수 있다.
유령과 단절하지 못한다면…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변국의 상황도 한반도 유령의 가치를 상승시킬 조짐이다. 러시아에서 권위주의 정권의 재등장을 정당화하는데 유리하며, 중국의 경우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효력이 감소하고 있는 공산주의를 대체하려는 민족주의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또한 경제기적의 신화가 꺼지며 동반 추락하고 있는 일본 보수 우익이 부활을 모색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다.
미국은 어떤가? 민주당 정권이 아직까지는 잘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많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란과 북한의 핵문제가 미국과 서방이 한편으로 그 대척점에 중국과 러시아를 서게 만드는 대결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물론 오바마 행정부는 재선의 문턱에서 북한과 이란 문제가 악화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이미 이란 문제가 미국과 서방의 경제제재와 이란의 호르무즈 봉쇄 위협, 그리고 이스라엘의 폭격 위협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유가가 급상승하며 오바마 행정부에 부담이 되고 있는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에서마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피하려 것이다. 전략적 인내로 대변되는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은 그 후반부를 '전략적 관리'로 일단락 짓고, 새로운 시도는 재임 이후로 미루려 할 것이다. 지난 주 베이징에서 열린 제3차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도 이러한 의도가 여실히 반영되었다. 구체적 성과가 없음에도 미국은 애써 회담 자체에 의미를 두고 지속시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런 미국의 입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역으로 이용해 강하게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월 27일부터 3월 9일까지 실시되는 키 리졸브 한미연합훈련을 둘러싸고 북한이 격렬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3월 26~27일 양일간 서울에 개최되는 핵안보정상회의에 대해서도 우려가 없지 않다. 비핵화와 평화라는 명분을 앞세우기는 하겠지만 실제로는 미국 주도로 이란과 북한의 핵개발을 공동으로 비난하는 자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요소요소의 상황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한반도의 유령이 빨아들이며 힘을 키우고 있는 모양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은 그래서 더더욱 중요하다. 반세기를 훨씬 지나 또다시 20년을 넘기며 분단과 냉전의 삶을 살게 만드는 유령과 이번에도 단절하지 못한다면, 민족의 미래는 또다시 국내정치적으로는 기득권에 의해, 국제정치적으로는 강대국간 패권경쟁의 인질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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