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결과 가운데 필자가 주목한 합의는 한미간의 긴밀한 공조와 협력을 바탕으로 비핵화 문제를 다루어나간다는 점과, 보다 구체적으로 1) 남북 비핵화 회담, 2) 북미대화, 3) 6자회담의 수순을 밟는 3단계 해법 원칙을 재확인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남북 비핵화 회담이 전반적 비핵화 대화 틀의 단초라는 데도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클린턴 장관이 합의해준 것을 쉬운 말로 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자, 그럼 한국 정부 방식으로 비핵화 문제를 한번 해봐라. 미국은 단독으로 치고 나가지 않고 당신들이 하는 것을 보고 행동하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미간에 긴밀한 공조아래 움직이겠다.' 이는 북미대화나 미국의 대북 쌀 지원을 우려해온 한국 정부에 선물을 준 셈이다.
하지만 힐러리가 선물만 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 서울을 방문했을 리 없다. 그 선물에는 상당한 압박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것은 미국이 하염없이 '전략적 인내'로 일관할 수 없으니 좀 적극적으로 해보라는 주문인 것이다.
이 3단계 구상에 따라 언론은 일제히 '사상 첫 남북 비핵화 회담'이 성사되느냐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한 것 같다. 언론에 산만하게 인용된 정부 당국자들의 말들에 따르면, 이제 공은 북한으로 넘어갔으며, 북한이 응해 오면 우리 측도 회담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 지난 16일 한국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오른쪽) ⓒAP=연합뉴스 |
그러나 필자는 이 구상이 비록 다양한 양자대화와 조율의 끝에 나온 방법론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성이 떨어지며, 어떻게 보면 가장 나쁜 접근법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성공보다는 상처투성이로 점철될 험로를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희망을 갖지 않는 편이 현실적일 것이라 판단된다.
그 이유로는 제1단계로 설정된 '남북 비핵화 회담'이 너무나 복합적인 이슈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고난도 과제라는 점 때문이다. 남북 비핵화 회담이 비핵화의 '단초', '돌파구'가 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보다는 6자회담 프로세스 혹은 외교적 해법에 대한 한국 정부의 딴죽걸기 산물이라는 성격이 강하다고 해석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애당초 6자회담 재개를 위한 3단계 접근 구상은 두 핵심 당사국인 남과 북이 대결과 적대의 관계를 갖고 있는 한 미국과 중국의 적극적인 행보가 어려우니 우선 남북관계를 일정하게 개선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대화가 일어나야 될 것이고, 바로 그 점이 미국과 중국이 요구한 바였다.
그러나 지난 2월 열린 남북 군사 실무회담에서 보았듯이, 현재 한국 정부는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할 아무런 전향적 의지가 없으며, 이런 이명박 정부의 마음자세가 변하지 않는 한 비핵화 회담에서 "일정한 성과"를 낼 수 없다.
천안함 사태 및 연평도 포격 사건과 6자회담의 연결고리가 끊겼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이 아님은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발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말들에도 이것이 혼란스럽게 내비쳐지고 있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정도를 해소할 정치적 유연성이 없이 현재까지 끌고 왔는데 어떻게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사건을 북한 당국과 마주 앉아 차분히 대화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남북 비핵화 회담에서 "일정한 성과"가 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엄격한 단계론을 내세우면서 정치적 유연성 발휘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진정성"이라는 용어가 그렇듯이 "일정한 성과"야말로 자의적인 해석에 가장 취약한 표현이다. 의지가 있다면 유연한 해석이 가능하고 의지가 없으면 무한히 엄중한 해석을 해도 무방한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남북 회담의 "일정한 성과"라는 것은 이미 선결요건처럼 제시되어 있는데, 1)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의 중단, 그리고 미사일 시험발사의 중단, 2)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농축우라늄 시설 조사, 3) IAEA 사찰단의 영변핵 시설 복귀 등이 북한이 취해야 할 조치라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취하면서까지 북측이 남측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한다? 필자가 이해하는 북한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얻는 것은 애매모호한 그런 게임을 북한이 수용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북한이 그럴 수 있었다면 핵문제는 벌써 해결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언론에서 이미 지적되고 있듯이, 북한이 한국과는 어물쩍해서 넘어가고 북미대화로 넘어가겠다는 전략 구사를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 현재 북한이 취해야 할 선(先) 조치들과 한국 정부의 엄격성과 강경성으로 미루어볼 때 그마저 통할 소지가 없어 보인다. 남북 비핵화 회담이 '비핵화'에 방점이 가있는 한 이번 3단계 구상은 실패할 것이다.
핵 프로그램을 포함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은 한국을 위시해 동북아 이해상관국가들에게 용인될 수 없는 문제다. 북한은 WMD를 자신을 적대시하고 대결적 태세를 갖고 있는 국가나 세력으로부터 체제 안보와 경제 지원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이 단순논리가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철되지 않는 한, 비핵화는 이룰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으로 가버린다.
'2.13 합의 이행 프로세스'를 문제투성이로 여기고 6자회담을 암묵적으로는 무용지물로 간주하면서 대안으로 내놓은 이번 3단계 비핵화 구상이야말로 문제투성이로 보인다. 그 앞날이 엄청난 험로일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회담이 결렬되고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욕해대고 하는 앞길이 내다보인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하나의 프로세스로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그것을 관리할 인내와 태세가 회담 당사국들에게 있는가?
비핵화 방법론에 묘책은 없다. 과거 방식에 문제가 있어서 북핵 문제가 이 지경까지 왔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뭔가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음에 이 일을 떠안을 사람들로부터 동일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자신들부터 "진정성"을 갖고 적극적이고도 전향적으로 한번 돌파해보기를 원한다.
마침 다음 주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유럽의 원로 지도자들이 평양을 방문해 국제적인 여론 조성에 나설 모양이다.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를 잘 활용해 비핵화 프로세스가 빠른 시일 내에 재가동되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힐러리 클린턴 장관의 압박성 선물이 동북아 안정과 한반도 평화에 대한 축복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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