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만남은 베를린 자유대학이 주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10주년 기념행사 자리에서 이뤄졌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3월 이 대학에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이 선언 약 한 달후 남북은 역사적인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베를린 자유대학은 김 전 대통령의 베를린선언이 남북 정상회담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이런 연유로 이번 만남을 주선했다고 한다. 두 '설계자'는 청중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방정책과 햇볕정책에 대한 공개 대담을 가졌다.
임동원 전 장관은 그 대담에서 동방정책이 단순히 동서독 간의 화해협력에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동방정책은 단순히 동독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아니라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 대한 일종의 '지역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는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과 차례로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유럽 지역의 평화 질서를 창출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의 통일도 가능했다고 에곤 바르 전 장관은 설명했다.
동방정책이 그렸던 큰 그림은 햇볕정책이 추구했던 것과 유사하다. 햇볕정책 역시 남북의 화해·협력은 물론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를 통한 동북아 냉전구조의 해체를 지향했고, 궁극적으로는 동북아 평화공동체 형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을 거부했다. 서독의 보수 정당 기민당은 동방정책의 실효성을 인정해 정권을 잡은 후에도 정책을 변화시키지 않았지만, 정권을 잡은 한국의 한나라당은 햇볕정책을 철저히 무시했다. 무시한 정도가 아니라 북한의 버릇을 고치겠다면 한반도의 시계를 냉전시기로 되돌리려 했다. 그 결과 한반도에는 다시 군사적 충돌의 먹구름이 몰려왔고, 동북아 지역에서는 신(新) 냉전의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에곤 바르와 임동원이 만난 지 4개월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프레시안>이 늦게라도 임 전 장관의 독일 방문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같은 목표를 지향했던 동방정책과 햇볕정책은 왜 다른 운명을 맞게 됐는지 그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또한 햇볕정책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정책이 무엇을 지향했던가를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중요한 만남을 이명박정부는 물론이고 국내 어느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몰랐는지, 알고도 무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지난 1일 서울 문래동의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임동원 전 장관은 독일에서 듣고 느꼈던 점과 요즘 정세에 대한 생각을 긴 시간에 걸쳐 말했다. 이날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에곤 바르(왼쪽)가 서독 연방총리청 차관이던 1971년 12월 20일 미카엘 콜 동동 연방총리청 차관(오른쪽)과 양독간 우편·통신·교통 등에 관한 회담을 하기 위해 만난 장면 ⓒ German Information Center |
"독일 기민당, 사민당 동방정책의 실효성 솔직히 인정"
프레시안 : 에곤 바르 전 경제협력부 장관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오른팔로 동방정책의 설계자였다. 햇볕정책의 설계자인 임동원 장관의 대화 내용이 궁금하다.
임동원 :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0주년 기념으로 베를린 자유대학 헨리 포드 기념관에서 공개적인 대담을 가졌다. 독일 청중들은 한국의 햇볕정책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햇볕정책과 동방정책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묻기도 했다.
두 정책의 유사점은 냉전 체제에서 만들어진 분단국가가 민족 통합과 민족 공동체 형성을 지향하면서 화해·협력을 통한 변화를 추구해 상호 의존을 높여 가는 접근을 했다는 것이다. 또 기계적 상호주의가 아니라 한 쪽(서독, 남한)이 다른 한 쪽을 리드해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선공후득'(先供後得) 형식을 취했고, 서방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동독·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는 것도 유사했다.
다만 두 정책은 배경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한반도는 독일과 달리 동족상잔의 전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적대관계가 장기화됐으며, 미‧중‧러‧일 4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동방정책은 데탕트라(동서 화해)는 배경이 있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역내에는 화해와 평화를 위한 기류가 없었다.
동독과 달리 북한에는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않았고, 주민에 대한 집단주의적 통제와 감시‧감독을 통한 공포정치를 펴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 또 독일에서는 사민당에서 기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됐어도 기민당이 일관성 있게 동방정책을 유지해 통일을 이뤘지만,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부로의 정권 교체 이후 햇볕정책이 전면 부정되어 결국 남북의 신뢰가 파탄났다는 점은 결과에서의 차이였다.
프레시안 : 바르 전 장관의 발언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을 소개한다면?
임동원 : 우선 독일 통일은 동독 사람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흔히 독일 통일에 대해 흡수통일이란 표현을 많이 한다. 동독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서독이 강요하고 끌어들여서 통일한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에곤 바르는 '동독 사람들의 선택'을 강조했다.
바르 전 장관은 동방정책을 통해 동독인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 동독인들의 그러한 선택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화해를 통한 변화', '작은 걸음의 점진적 변화'를 추구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독은 빌리 브란트 정권 이후 20년 동안 매년 평균 32억 달러 정도의 인도적·경제적 지원을 동독에 제공했다. 장기적인 정책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대북 지원을 많이 했을 때 겨우 1년에 2~3억 달러였고, 그 중에서 인도적 지원이 2억 달러였다.
서독이 그렇게 하니까 동·서독 간에 인적 교류도 늘었다. 매년 700~800만 명이 오갔다. 동독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서독에서 친척도 만나고 물건도 사가면서 접촉을 통해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다가 결국 때가 되자 동독 시민들이 비폭력 시민혁명을 일으켜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 총선거로 민주 정부를 수립한 후 서독과의 협상으로 통일에 이르게 됐다.
통일에 앞서 동독인들에게는 세 가지 '옵션'이 있었다. 서독 기본법 23조에 의해 즉각 통일하는 방안, 먼저 통일헌법을 제정해 대등한 입장에서 통일하는 방안, 우선 국가연합을 만들고 연방제로 단계적인 통일을 하는 방안, 이렇게 세 가지였다. 그 중에서 동독 국민들의 48%가 첫 번째 방안을 지지한 것이다.
사실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가 통일 1년 전인 1989년 11월 발표한 통일 방안의 내용을 보면, 점진적‧단계적 통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상호협력적 공존을 위해 '계약적 공동체'를 만들고, 다음으로 과도적 단계의 국가연합을 만들고, 이후 연방제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총 4~5년 걸려 이렇게 하자는 것이 서독의 구상이었는데, 동독의 선택은 달랐다. 그렇게 볼 때 독일 통일은 동독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며, 서독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바르는 강조했다.
프레시안 : 한반도 현실에 시사점이 많은 얘기 같다.
임동원 : 바르 전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남북연합을 통해 단계적으로 통일하자는데 남북이 합의한 것은 대단히 현명한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이 통일을 하려면 북한의 주권자인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평화적 통일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류·협력을 통해 변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햇볕정책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또 하나 기억나는 말은, 햇볕정책 실현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나를 '빨갱이'라고 매도하거나 사상 논쟁이 벌어지는 등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니까, 서독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동방정책도 처음에는 야당과 언론의 맹공격을 받았고 인기도 없었다면서, 브란트 총리나 자기 역시 '친(親) 공산주의적'이라는 비난을 엄청나게 받았다고 말했다.
브란트 총리 시절 야당이었던 기민당은 처음부터 동방정책을 반대했다. 기민당은 동독과 수교한 국가와는 국교를 단절한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하면서 미국 등 서방 우방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서방정책'을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후 동방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커지는 걸 본 기민당은 집권 후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 2001년 9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이 서울에 온 에곤 바르 전 장관을 만나는 장면. 에곤 바르는 2005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베를린에 방문했을 때도 노 대통령과 만났다. ⓒ연합뉴스 |
프레시안 : 기민당이 동방정책을 계승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지 궁금하다.
임동원 : 나 역시도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러자 바르는 동방정책은 동독에 대한 정책일 뿐 아니라 대(對) 소련, 대 동구권 정책이었다는 답을 내놨다. 즉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과 차례로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유럽 지역의 평화적 질서 창출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1975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발족한 후 전 유럽이 데탕트 프로세스를 추진하는 분위기 속에서, 동·서독 관계 개선과 함께 유럽 평화·안보 협력의 틀을 만들어 나가는 접근법을 사용한 동방정책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CSCE 데탕트 프로세스 추진으로 동방정책의 실효성이 확연해지자 애초에 이를 반대했던 기민당도 집권 후 지지하고 계승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을 바르 장관이 소개했다. "서독의 동방정책 없이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고르바초프 없이는 독일 통일도 없었을 것이다." 동방정책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또 나와 바르 전 장관이 만났던 바로 전날은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2차 대전 희생자 추모탑을 방문해 무릎을 꿇고 역사의 책임을 받아들이며 사죄한지 40년이 되는 날이었다. 독일은 그처럼 진정한 사죄와 성의 있는 배상을 통해 유럽의 품에 다시 안기게 됐다.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난 것은 전체 독일 사람이었다'는 표현이 있다. 그 역시도 독일 통일의 아주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바르는 동북아 평화공동체 형성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남북한이 힘을 합쳐 선도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한이 우선 화해·협력하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강자요 가진자인 남한의 아량과 적극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6자회담을 통해 동북아 평화협력공동체로 나가자는 접근 방법 속에서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도 말했다. 그렇게 하면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하는 나라들도 브레이크를 걸 가능성이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옳은 지적이었다.
프레시안 : 독일에서는 이른바 '통일 후유증'도 상당했다는 평가가 있다.
임동원 : 내가 통일 후유증에 대해 질문하니까 바르 전 장관은 "통일 후유증은 불가피하다. 다른 체제를 유지해온 두 주체가 통일하는데 쉽게 되겠나"라면서도 "후유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가 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서독인들 역시 동독인의 정신적·심리적 상태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부족했다"면서 그전까지는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지만, 통일 후 공산 독재와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 아래서 살아온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경쟁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나는 또 통일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느냐는 질문도 했다. 그러니까 바르는 "통일 비용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런 표현을 왜 쓰나"라고 되물으며,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한 독일의 경우 동독인에게도 동일한 사회보장을 해주기 위한 비용이 통일 비용의 1/2 이상을 차지했지만 그걸 통일 비용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통일 비용은 국방비를 포함한 분단유지 비용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고 바르는 강조했다. 통일 이전 동·서독에는 모두 합쳐 70만 병력이 있었는데, 통일조약에 따라 37만 명으로 감축했고, 지금은 25만 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절약되는 비용은 매우 크다. 그는 "통일로 인해 얻는 국가적 편익은 수치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통일 비용을 걱정하지 말라. 통일 비용 걱정은 반통일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바르는 김대중 대통령이 현명한 분이라면서, 개성공단 같은 경제 공동체를 만들고 북한 인프라에 투자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통일 비용을 훨씬 줄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 점에서 개성공단을 높이 평가한다며 "우리는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다"고 덧붙였다.
작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세 얘기를 꺼낸 후 미래기획위원회가 통일 비용 추정치를 발표했다. 정상적인 남북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일이 되면 북한이 갑자기 붕괴될 때보다 비용이 1/7밖에 안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남북협력을 통해 통일한다면 30년 동안 3220억 달러, 연평균 100억 달러 정도가 들고, 반면 북한이 급격히 붕괴한다면 같은 기간 동안 2조1400억 달러, 연평균 720억 달러가 든다고 추정했다. 아주 잘 판단한 것 같다.
정상적으로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통일한다면 1년에 100억 달러가 든다는데 작년 우리 국방비가 280~290억 달러였다. 국방비의 1/3만 들여도 된다는 얘기다. 이런 것을 볼 때 바르가 "통일 비용 걱정 말라. 분단 비용보다 싸다"고 했던 얘기가 실감이 갔다.
▲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
임동원 : 독일에서는 정권 교체 후에도 동방정책이 유지되어 통일까지 갈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지속성이 없다면서 햇볕정책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르는 일관성이 없는 것이 문제라면서, 현 (이명박) 정부가 북한을 두려워서 그러는지 무시해서 그러는지 몰라도 햇볕정책을 중단한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한을 포용하지 않고 압박과 제재로 굴복을 강요하는 정책이 장기화된다면 통일은 불가능해지고 남북한은 다른 국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서독은 동독을 궁지에 몰아넣어 양보나 승복을 받아 내거나 반사이익을 노리는 대신 오히려 궁지에서 벗어나게 돕고 타협과 아량을 베풀어 동독이 호응할 수 있도록 명분을 주고 체면을 살려주도록 노력했다. 이것이 서독의 기본 자세였다. 한반도에서는 전쟁의 경험이 있어서 그게 어렵다는 시각도 이해는 되지만, 평화적인 통일을 하려면 이 길밖에 없지 않은가.
프레시안 : 동독 지역도 방문한 걸로 알고 있다. 동독 출신 사람들은 통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임동원 : 독일을 방문하면서 초청 측에 한 가지 요청을 했다. 동독 지역에 가서 그곳 지성인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라이프치히에 가고 싶다고 했다. 동독 지역에서 동베를린 외에 가장 큰 도시였던 라이프치히는 동독 시민혁명의 발상지였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니콜라이 교회의 성도들이 1989년 9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촛불시위를 시작함으로써 시민혁명을 발화시켰다. 특히 비폭력 평화시위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시위를 시작으로 민주화 시위가 동독 전역으로 퍼졌다. 그 현장인 라이프치히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는데, 이번에 소원 성취했다.
그리고 라이프치히에서 동독 출신의 50대 정치학 교수와 얘기를 나눴다. 그 교수는 동독인들이 시민혁명을 통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자유와 평등, 보다 좋은 삶을 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통일 후 동독인들은 마치 2등 시민으로 전락한 느낌을 갖게 됐다며, 통합의 과정이 슬기롭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통일 당시 서독에 기민당이 아니라 사민당 정권이 있었다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통일 후 일정 기간이라도 동독 기업들을 국가가 관리했어야 하는데 기민당 정부는 신자유주의적으로 시장에 방치했다. 동독의 기업과 공장은 서독 자본가들에게 싼값에 불하됐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들은 인수 후 일부 공장을 가동하지 않고 방치했다. 이로 인해 동독에서는 실업자가 양산됐다.
특히 토지와 공장의 즉각적인 사유화 정책도 잘못됐다고 말했다. 일정 기간 국가가 개입해 공개념으로 관리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반환할 것이 아니라, 경제 개발에 활용하면서 원소유주에게는 채권을 발급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보상하는 정책을 취했다면 경제 발전을 위해서나 동독인들 및 원소유자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조기 통일이 아니라 국가연합을 거쳐 신중하게 통일을 추진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통일이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 통일 후 통합의 과정에서 동독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배려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남북연합을 통해 점진적·단계적으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한 '6.15 남북공동선언'은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좋은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프레시안 : 그러나 작년 연평도 사건 이후 진보·개혁 세력 일각에서도 '남쪽에서 그렇게 도와줬는데 북한은 변한 게 없다'면서 햇볕정책에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있었다. 또 동북아 전체의 구도를 조망하는 시야가 부족하다는 등 햇볕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임동원 : 연평도 사태를 보니 햇볕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햇볕정책을 포기한지 3년이 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연평도 포격 도발이다. 그런데 왜 핑계를 햇볕정책에 대나? 말이 안 된다.
다만 햇볕정책을 포함해 모든 정책은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발전해야 한다. 햇볕정책은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에서 남북이 화해‧협력하자고 했던 약속을 (김영삼 정부에서 못 지키다가) 복원하는 접근법이었다.
이를 통해 북한이 변화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해 '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사실상의(de facto) 통일' 상황이란, 실제 통일은 아직 멀었지만 남북이 서로 오가고 돕고 나누면서 통일된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분단된 겨레의 고통을 덜 수 있는 상생과 공영의 관계를 말한다.
세부 정책 중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겠지만 기본 방향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에서는 '퍼주기'라고 하는데,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 국민 한 명이 1년에 4000원 정도 북한을 도와줬는데 엄청나게 퍼준 것처럼 확대 해석되고 있다. 정책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지 정책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동북아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가 부족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겠다. 한·중, 한·러 관계가 정상회됐던 것처럼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것은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북·미, 북·일도 관계를 정상화하는 게 우선이고, 그 다음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만드는 것이고, 그 다음이 동북아 평화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페리 프로세스는 부시 행정부가 출범해 파기하기 전까지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 평화공동체와 관련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많이 진전시켰다. 한국이 동북아의 균형자‧안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까지 진도가 나갔다. 그런데 그건 북·미, 북·일 관계가 개선되기 전에는 실현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협상 입구에서 조건 제시하면 협상 않겠다는 뜻"
프레시안 : 최근 한반도 정세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다. 중동 사태가 한반도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시각이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보다 중동 안정화가 훨씬 큰 관심사이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가 미국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둘째, 북한이 리비아를 보면서 '핵을 포기하면 리비아처럼 당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비핵화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이런 우려를 어떻게 보나?
임동원 : 북한 문제가 미국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것이라는 점은 어떻게 보고 말 것도 없이 사실이다. 두 번째 우려에 대해서는, 이번에 리비아 사태 훨씬 전에 있었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북한의 핵개발 의지를 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북한은 재스민 혁명 물결을 보고서도 선군정치를 고수해야 한다는 의지를 굳힐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대화와 협상을 아예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어떻게든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국교를 정상화해서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하게 만들고 체제의 안보와 평화를 얻으려고 할 것이다.
북한의 생각은 지난 2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국가 안보와 체제 보장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 없이는 불가능하다. 미국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약소국가로서 할 수 있는 게 뭐냐? 핵을 개발해 그걸 카드로 협상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국이 변하면 핵을 포기한다.' 이게 변함없는 입장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미국과의 대화·협상 기조는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인데, 북한이 미국·한국과 잘 해보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중국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는 쪽으로 변했다는 관측이 많다. 임 전 장관께서도 작년 한 인터뷰에서 "북한이 기존의 서방정책에서 성과를 못 거두자 북방정책으로 전환했다"고 말한 바 있다.
임동원 : 그건 이런 맥락이다. 북한 대외정책의 최고 목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고, 그걸 위해 남북 정상회담에도 응하면서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해도 진척이 안 되니까 이제 스스로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한편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은 2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미국과 함께 'G2'가 됐다. 동북아는 미국과 중국이 공동 관리하는 시대로 변해가고 있다. 북한이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경제협력과 안전을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서 어느 정도 얻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서방에 너무 미련을 갖지 말고 중국과 긴밀히 협조하는 것이 더 나으며, 이것이 오히려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도 도움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또 중국도 그걸 원하고 있다. 실제로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과 가까워지니까 미국도 북한과 대화를 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 정부도 이러다가는 북한을 중국에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우리가 북한을 중국에 떠미는 격이다. 북한을 잃게 되면 통일은 바라볼 수도 없고, 남북관계는 더 어려워진다. 이 정부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행동으로 옮기는 건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임동원 : 북한 외무성의 리근 미국국장이 지난달 말 독일을 방문해 미국 인사들과 비공식 토론회를 가졌다. 미국 대표들의 면면이 놀라웠다. 레이건 대통령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 리처드 알렌이 있었고, 토머스 피커링 전 국무차관과 에반스 리비어 전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도 있었다.
모두 전직이지만 현재 미국 정부에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미국은 현직이 나서기 어려울 때는 이렇게 전직들이 길을 낸다. 1박 2일간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했다는데, 북미관계 정상화, 비핵화, 재래식 무기 감축, 평화체제, 경협 등의 주제를 논의했을 것이다.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움직임이다. 이런 움직임이 있어야 다음 단계로 간다.
오바마 정부는 사실 작년 중순부터 대화도 하고 6자회담도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명박 정부만 믿고 가다가는 안 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다가 연평도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주춤했는데, 3월 1일 미 상원 청문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발동이 걸린 것 같다.
청문회 때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그런 말을 했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North Korea as it is) 상대하겠다." 윌리엄 페리 전 대북정책 조정관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상대해야지 붕괴할 것이다, 어쩔 것이다 하는 식으로 보면 안 된다는 뜻이다. 대북 식량지원을 위해 미국 정부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 실사단을 보낸다는 보도도 있었다.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도 예정되어 있다.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자꾸 브레이크를 건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건을 건다. 협상 입구에서 조건을 거는 건 들어가지 않겠다는 뜻이다. 일단 협상장에 들어가서 얘기하고 출구에서 조건을 해결하는 게 옳은데, 협상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입구에서 허들(장애물)을 높이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도 정상회담을 할 용의가 있다는 얘기가 나오긴 한다. 북한의 특수성 때문에 정상회담 같이 톱다운 방식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정상회담도 일을 성공시킬 의지가 있을 때 효용이 있는 것이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서는 설령 정상회담이 성사되어 봤자다. 의지만 있으면 정상회담 안 해도 남북관계를 진척시킬 수 있다. 의지가 없는 게 문제다.
프레시안 :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은?
임동원 :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4가지는 대북 시각, 대북정책, 통일정책, 북핵 전략인데, 그 중에서 대북 시각이 뿌리다. 거기에 따라 나머지 3가지가 달라진다.
즉,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붕괴임박론'을 받드느냐, 아니면 북한도 중국·베트남처럼 점차 변화할 것이라는 '점진적 변화론'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진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급변사태론은 1990년대 김일성 사후 북한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붕괴론의 재판(再版)이다.
북한이 곧 무너질 것으로 본다면 대북정책도 압박과 제재를 가해 빨리 무너뜨리려는 정책을 쓸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정책이 그렇다. 반대로 북한이 단계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본다면 화해와 협력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촉진시키자는 정책을 취하게 될 것이다.
통일정책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붕괴할 거라고 본다면 그때를 대비해 흡수통일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점진적 변화론의 입장에 선다면 남북이 힘을 합쳐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실현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점진적·평화통일을 이룩하려 할 것이다.
북핵 해법도 그렇다. 북한을 빨리 무너뜨려야 한다고 본다면 핵 문제 해결 전까지는 남북관계를 올스톱하려 한다. '비핵·개방·3000'처럼 '북핵-남북관계 연계 전략'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라면 북핵은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개선시키면서 시간을 가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병행 전략이 나온다.
지난 20년 동안 남측 정부는 이 4가지 포인트에서 일관성 없이 왔다 갔다 했다.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는 명백히 후자의 방법을 취했고, 김영삼 정부는 오락가락했으며, 이명박 정부는 붕괴론에 입각한 강경 정책을 취하고 있다. '북한 점진 변화론'의 입장에서 화해·협력, 평화통일 정책과 핵문제 해결을 꾸준히 추구했다면 상당한 성과 있었을 텐데, 너무나 아쉽다.
프레시안 : 긴 시간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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