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23일(현지시각) 경찰 2000명과 소방관, 거리 청소부, 방위군 등을 포함한 시위대가 수도 튀니스에서 과도정부의 해산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전했다. 지난 22일 발생한 이 시위는 과도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모하메드 간누치 총리의 집무실 앞과 부르기바 대로 등에서 열렸다.
<알자지라>는 경찰관들도 시위대와 유대를 표시하는 뜻에서 붉은 완장을 차고 시위에 참여했으며 "(우리도) 국민들과 함께하고 싶다"면서 "혁명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시위대의 죽음과 관련해 경찰을 비난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진압 경찰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리케이드를 넘어 총리 공관으로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23일에는 튀니지 내륙 시디 부지드의 주민 1000명이 튀니스로 상경해 구체제 인사들이 참여한 과도정부의 해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튀니스 시내를 행진하며 "과도정부를 무너뜨리러 왔다"는 구호를 외쳤다. 시디 부지드는 시위의 촉발점이 된 대졸 출신 과일 행상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이 일어났던 곳이다.
▲ 지난 22일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는 경찰, 방위군, 소방관, 거리청소부들도 '진압군'이 아닌 시위대로 참여했다. ⓒ뉴시스 |
과도정부 총리 "선거까지만 참아달라"…시위대 "즉각 물러나야"
간누치 총리는 선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시위를 진정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는 21일 텔레비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선거를 통해 구성될 정부로의) 권력 이전이 마무리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과도정부는 23일 벤 알리 전 대통령의 측근 보좌관 압델 아지즈 벤 디아와 압달라 칼렐 상원의장을 가택연금하고, 지난주에는 출국을 시도했던 벤 알리 전 대통령의 가족 33명을 체포했다. 또 벤 알리 정부 인사들의 해외 자산을 동결해 수사 이후 국고로 귀속될 것이라고 밝혔으며 시위 사망자의 유족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하는 등 '민심 달래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간누치 총리와 푸아드 메바자 임시 대통령을 포함한 임시 정부 인사들은 과거 집권당인 입헌민주연합(RCD)를 탈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조합 활동가 마수드 롬다니는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RCD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시위는 계속될 것"이라며 "이들이 물러날 때까지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셈"이라고 말했다.
과도정부의 통신‧기술 담당 장관 사미 자우이는 이에 대해 시민사회와 야권 인사들이 내각의 2/3를 차지하고 있다며 과도정부 해산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지역적인(local) 시위일 뿐"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튀니지 반정부 시위, 민주화 이룰까?
튀니지 혁명이 결과적으로 민주화를 완성하는 단계까지 나아갈지에 대한 전망은 엇갈리고 있다. 우선 긍정적인 요소는 민주화 시위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다. 23일까지 과거 독재정부 반대 시위는 계속되고 있으며, 튀니지 노동조합은 각급 학교가 다시 문을 여는 것과 관련해 교사와 교수들에게 파업을 계속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경찰 2000여 명이 시위에 가세한 것도 무시못할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튀니지 군은 이미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벤 알리 전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고 시민들 편에 선 전례가 있다. 야당 인사들도 입각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과도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실제로 야권의 일부 신임 장관들은 과거 정부 인사들이 요직에 유임된 과도정부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며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지난 17일 출범한 튀니지 과도정부 내각 23명 중 8명은 이전 정부 인사들이다. 특히 간누치 총리를 비롯해 국방, 내무, 재무, 외무 등 주요 부처의 장관들이 유임된 것이 국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야권과 학생들은 "새 정부는 벤 알리 독재정권의 모조품일 뿐이며, 이는 시민들의 피가 어린 혁명에 대한 모독"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국제사회도 튀니지 시민들에 대한 지지의 뜻을 밝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튀니지 국민들의 존엄함과 용기를 치하한다"며 "보편적 인권을 위한 용감하고 단호한 투쟁"이라고 평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과도정부는) 인권을 존중해야 하며, 가까운 미래에 튀니지 국민의 참된 뜻을 반영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튀니지 당국에 분출되는 민주화 요구가 억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인접국인 예멘과 알제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점도 분위기를 고무시키고 있다. 아랍권 블로거들은 튀니지 혁명을 두고 "아프리카 전역의 혁명이 시작됐으며 이는 전세계적 반자본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튀니지는 아랍 세계의 두 가지 신화를 깨트렸다"며, 두 가지 신화란 "첫째는 '국민의 뜻'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젊은 세대는 재정적인 지원만 받는다면 독재나 부패를 관용할 것이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요르단 외무장관을 역임한 마르완 무아샤르 카네기국제평화연구소 부소장은 "만약 튀니지 사태가 물가와 실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셈"이라며 "(튀니지의 시위는) 지배 엘리트들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도록 놔둘 수 없다는 정서와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안보가 튼튼하고 경제가 발전하면 나라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고 덧붙였다.
중동 전문가인 마크 레빈 미 캘리포니아주립대(UCI) 교수는 "이제 막 시작된 튀니지의 혁명은 식민 지배의 잔재와, 독립 이후에도 튀니지 국민이 아닌 미국과 유럽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폈던 과거를 청산할 때에만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지난 16일 <알자지라> 기고문에서 밝혔다.
레빈 교수는 이를 위해 미국이 적극 나서야 한다며, 미국은 민주적으로 구성된 정부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안보 및 경제 관련 교류도 중단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오바마 행정부에 주문했다.
▲ 23일 시디 부자드에서 튀니스로 상경투쟁을 벌인 시위대. 시디 부자드는 튀니지 민주화 시위의 촉발점이 된 대졸 출신 과일 행상 모하메드 아부지지의 분신이 일어난 곳이다. ⓒ뉴시스 |
전문가들 "상황 낙관 못한다"
그러나 상황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시각도 있다. 간누치 총리 등 과도정부는 거센 퇴진 요구에 직면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 레빈 교수는 "여전히 상황은 극도로 불안하다"며 튀니지의 야당 '타즈디드'(Tajdid, 쇄신‧부흥‧소생 등을 뜻하는 아랍어) 당직자가 영국 <가디언>에 "전체주의와 독재는 죽지 않았으며 이 나라는 여전히 그런 정치제도에 오염돼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레빈 교수의 '주문'과 달리 미국의 반응도 미지근하다. 그는 공교롭게도 튀니지 혁명이 발생한 바로 그 때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중동을 방문해 아랍권 정치 지도자들과 시민사회 인사들을 만나고 있었는데, 튀니지 사태에 대한 질문을 받자 "우리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We can't take sides)라고 말했다며 이를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또 그는 지난 부시 행정부 당시 미국은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튀니지와 이집트의 '반(反) 테러 법'을 지지했다며 미국 등 서방 국가는 튀니지의 민주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국익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고 꼬집었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의 중동 전문 기자 로버트 피스크도 칼럼을 통해 서방 국가들이 강조하는 '민주적이고 공정한 선거'란 허상이라며 "아랍에서 독재자들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관련 기사 보기)
튀니지 국민들과 국제 사회는 엇갈리는 전망 속에서 다가오는 선거를 기다리고 있다. 과도정부가 정확한 일자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선거는 6개월 내에 실시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전 정부에서 정치 활동이 금지돼 프랑스로 망명했던 야당 지도자 몬세프 마르주키와 언론인 타오픽 벤 브릭 등 2명이 대선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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