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지난 5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정전협정을 백지화하며 판문점 대표부 활동을 중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북한은 훈련이 시작된 11일, 적십자 채널인 판문점 직통전화를 받지 않았다. 또 북한은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을 통해 "최후 결전의 시간이 왔다. 참고 참아온 멸적의 불벼락을 가슴 후련히 안길 때가 왔다"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 B-52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뜬 지난 19일, 조선중앙통신은 "인민군 군인들이 침략의 아성을 날려보낼 결사의 각오를 안고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북한의 군사훈련을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남한 역시 북한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며 발언 수위를 높였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지난 8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핵 공격을 하면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지난 19일에는 미군의 전략 폭격기인 B-52가 한반도 상공에서 비행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북핵 위협에 대응한 억지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에 인식시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남북이 강경한 태도로 맞서고 있는 가운데서도 군사적 충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의 긴장 국면이 전환될 것이라 예단하기도 힘들다. 키리졸브와 더불어 실시하는 야외 기동훈련인 포이글이 내달 30일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다음 달 1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예정돼 있어, 이 회의에서 북한이 어떤 대미·대남 메시지를 보내느냐도 국면을 결정짓는 변수가 될 전망이다.
북한 메시지만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런데 북한의 메시지만 기다리고 있기에는 박근혜 정부가 처한 국내외적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 우선 국제적으로 살펴보면 현재 동아시아는 미국과 중국이 질서를 짜고 있는 초기 단계다. 여기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북한문제에 접근하지 않으면 미국과 중국, G2가 짜놓은 프레임에 남북한이 묶여버릴 가능성이 크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프레시안>과 통화에서 "미국과 중국이 남북한을 분리시켜서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현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이어 "지난 정부 임기 동안 이걸 막지 못했는데 향후 또 이와 같은 상황으로 가면 분단 영속화의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진단하며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박근혜 정부가 주도적으로 북한과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과의 긴장 국면을 원하지 않는 국민 여론도 현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에 부담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지난 1월 2일 KBS의 여론조사 결과 '새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부터 해야 한다'는 응답이 68.9%, '북한의 사과부터 받아야 한다'는 응답이 28%로 집계됐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도 후보 시절 이러한 국민 여론을 반영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공약으로 내걸며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진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현재 한반도는 박 대통령이 약속했던 신뢰 프로세스 작동은커녕 남북 간 제대로 된 대화도 하기 힘든 긴장 국면이다. 박근혜 정부가 이 국면을 돌파하려는 적극적인 조치 없이 북한의 메시지에 강하게만 맞대응하거나 강대국들의 대북정책만 따라가면 취임 초기부터 북한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고, 결국 임기 내 북한과 관계 개선 및 신뢰프로세스 작동이 어려워질 수 있다.
대화의 물꼬 트기위한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의 긴장 국면을 빨리 벗어나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의 남북 간 긴장관계와 북한 핵실험으로 조성된 안보 정국은 북한과 대화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다.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유도하기 위해 면밀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장용석 선임연구원은 단계적 해법을 제시했다. 당장 비핵화 문제부터 먼저 꺼낼 것이 아니라 핵실험의 원인이 됐던 장거리 로켓 발사 문제부터 다루자는 것이다. 장거리 로켓 발사는 북한이 '우주의 평화적 이용권리'라고 여러 차례 주장하고 있는 사안으로,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는 판단이다.
▲ 북한이 '평화적 우주 이용 권리'를 내세우며 지난해 12월 12일 발사한 광명성 3호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북한은 지난 2월 12일 3차 핵실험 이후 <조선중앙통신>보도를 통해 이번 핵실험은 "합법적인 평화적위성발사권리를 란폭하게 침해한 미국의 포악무도한 적대행위에 대처하여 나라의 안전과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실제적대응조치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평화적 위성 발사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핵실험에 대한 명분 쌓기일 수도 있으나, 북한이 '평화적 우주 이용 권리' 자체를 중시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장용석 선임연구원은 "북한이 협상에 나올 명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공위성과 평화적 우주 이용 권리를 협상 의제로 다루자는 것"이라며 "협상을 통해 북한의 평화적 우주 이용 권리를 인정하고 대신 지난번 2.29 합의 때 도출해 본 경험이 있는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모라토리엄(유예)을 확보해야 한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북한 비핵화를 위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물론 사안의 경중을 놓고 보면 핵문제가 장거리 로켓 발사보다 훨씬 엄중하다. 심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장거리 로켓 문제를 먼저 건드리자는 것"이라며 "장거리 로켓 발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비핵화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 선임연구원은 이와 더불어 인도적 지원을 병행하여 북한에 대한 우리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정치적 상황과 상관없이 인도적 지원은 유지하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와도 유사한 부분이다.
실제로 통일부는 지난 22일 유진벨재단이 준비한 결핵 환자를 위한 대북 물품 반출을 승인했다. 비록 외부단체에 의한 지원이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북한에 지원 물품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지원 결정을 시작으로 인도적 지원의 후속 조치가 나올지, 이에 따라 본격적으로 신뢰 프로세스가 가동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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