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흡착물에 관한 이승헌 교수나 캐나다 매니토바대 지질과학과의 양판석 박사 등의 잇따른 문제제기에 침묵하던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송 교수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문화방송(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도 9일과 10일 송태호 교수와 이승헌 교수를 연속 인터뷰했다.
그간 합조단의 결론에 대한 과학적 논쟁은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서만 실명으로 나왔지 합조단의 결론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언론 3단체가 구성한 '천안함 조사 결과 언론 보도 검증위원회'는 지난 5일 "논문 내용과 무관하게 그의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며 송 교수의 등장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송 교수의 논문은 여러 모로 논박을 당하고 있다. 송 교수 식의 이론적 계산은 상당 부분 이론의 전제 조건과 계산의 초기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데 그가 어뢰 폭발 과정을 '가역적 단열 팽창'으로 상정한 게 잘못이라고 이승헌 교수는 반박했다. 이 교수는 "송 교수의 조건대로 계산을 하면 사람이 어뢰 폭발 현장에 서 있으면 얼어 죽는다"고 따졌다. 이에 송 교수도 몇 번의 언론 인터뷰와 9일자 반박문을 통해 응수했기 때문에 논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1번 글씨는 증거로서의 효력을 잃은 지 오래다. ⓒ연합뉴스 |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폭발 과정이 가역적이니 비가역적이니 하는 과학적 논쟁과 별도로 '1번' 글씨는 이미 증거로서의 효력을 상실했다. 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1번' 글씨 논쟁이 마치 천안함 진실 규명의 전부인양 부각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논점이 흐려진다.
우선 '1번'이라는 한글 표기가 군이 확보한 북한 어뢰의 표기 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어뢰 추진체가 북한산이라는 합조단의 주장은 논리적 오류다. '1번' 표기는 북한산 어뢰뿐만이 아니라 남측의 무수한 다른 표기 방법과도 일치한다. 합조단의 논리대로라면 각종 표기에서 '1번'을 쓰는 남측 국방부에서 만든 어뢰라고 해도 문제될 게 없다.
합조단은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프레시안>의 기사에 대해 지난달 20일 반박문을 냈다. 국방부 천안함 사이트에 올린 반박문에서 합조단은 (1) 2003년 습득한 북한 어뢰의 표기 방법과 같고 (2) 탈북자 및 북한 사전 확인 결과 북한은 '호'와 '번' 모두를 쓰고 있으며 (3) 어뢰 추진체가 폭발 원점 지역에서 획득됐고 기존 어뢰 설계도와 일치하며 (4) 선체·어뢰 흡착물이 일치했고 (5) 한국 수중 무기에 대한 재물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상이 없는 점 등을 종합 분석해 북한산으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은 동어반복이고 (2)는 '번'이 아니라 '호'만을 쓴다는 것에 대한 반박일 뿐이며 (3)~(5)는 정황 증거에 불과하다. 이런 증거를 아무리 많이 갖다 대고 '종합 분석'한다고 해도 논점을 벗어나기는 매한가지다. 더군다나 합조단은 6월 29일 언론단체 설명회에서 '1번' 글씨에서 나온 잉크 색소 '솔벤트 블루 5'는 세계적인 범용 색소라고 밝힘으로써 북한산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자인했다. 특히 솔벤트 블루 5는 남측 업체 모나미가 특허를 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둘째, 설령 '1번' 글씨가 쓰인 어뢰가 정말 북한산이라고 해도 그것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는지는 또 다르게 검증되어야 할 문제다. 천안함과 어뢰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흡착 물질이다. 그러나 합조단은 흡착물과 관련한 데이터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승헌 교수와 양판석 박사의 문제 제기에 대해 그간 엉터리 답변만 내놨다.
알루미늄 권위자인 미국의 김광섭 박사도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흡착 물질 문제에 대해 합조단이 해온 일과 일부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을 볼 때 합조단은 매우 무능력하고 이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흥미로운 점은 합조단이 김광섭 박사의 주장을 다룬 한 블로거의 글을 천안함 웹사이트에 퍼다 놨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글은 합조단을 강하게 비판하는 김 박사의 전체 논지는 무시한 채 이승헌 교수에 대한 비판만을 부각한 글이었다. "합조단의 주장을 법정에 가져가면 패소할 것"이라는 김 박사의 주장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같은 이유들 때문에 '1번' 글씨는 천안함 과학 논쟁에서 오래전에 '지워졌어야' 했고, 수수께끼를 풀어줄 유일한 열쇠는 흡착 물질 논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합조단은 현재 흡착물 문제에 관해서는 아예 입을 닫고 있다. 그 와중에 '1번' 글씨 논쟁이 뜬금없이 불거져 나왔다. 논쟁을 걸어왔으니 어쨌든 응대를 하겠지만 그 때문에 정작 중요한 쟁점이 묻혀선 곤란하다.
더군다나 송 교수의 주장은 '1번' 글씨를 둘러싸고 제기된 무수한 문제들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 송 교수는 9일 카이스트 열전달 연구실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글씨가 써진 뒷면의 온도가 얼마나 변했었는가'라는 (내 논문) 주제에만 집중해 달라"고 당부했다. 8일 <중앙선데이> 인터뷰에서도 "내 논문에서 중요한 얘기는 (1번 씨가 써진) 디스크에서의 열전달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또 송 교수는 9일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1번 글씨가 타지 않을 정도로 온도가 낮았다면 탄두에서 더 멀리 떨어진 프로펠러에 어떻게 알루미늄 흡착물이 붙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알루미늄 흡착 조건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다"라며 "초기 폭발 때 생산된 알루미나 입자가 물이나 가스하고 뒤섞여 흐르는 이상현상이 아닌가 한다"라고만 추정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계산대로라면 물기둥이 2m 밖에 솟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에 대해 "제 주제하고 좀 거리가 있으니 국방과학연구원의 정교한 수치에서 사용한 결과를 좀 더 믿길 바란다"고 말했다. 디스크 열 전달 계산은 자신을 믿고 물기둥 높이는 다른 결과를 믿으라는 해괴한 답변이었다.
한 마디로 자신은 이론적인 계산만 했을 뿐 실제 나타난 현상과의 불일치는 알 바 아니라는 태도다. 오로지 디스크에서의 열 전달에만 관심이 있지 폭발 가스가 어뢰 추진체 전체를 뒤덮는 상황 같은 건 고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남들은 복잡한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 있는데 불쑥 찾아와 완전경쟁시장에서의 수요·공급 곡선에 대해 논쟁하자는 식이다.
그러면서 <중앙선데이> 인터뷰에서 이승헌 교수에 대해 "학문적 태도가 아니라 정치적 태도를 취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런 '1번' 글씨 논쟁, 계속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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