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계에서는 '민영 미디어렙 도입'이 신문·방송 겸영과 대기업의 방송 소유를 허용한 이번 언론 관련 법에 못지 않은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게다가 각 방송사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있는 문제라 언론 관련 법 논란보다 더욱 심각한 갈등을 불러올 가능성도 크다.
'공영성' 논의는 사라지고 '완전 경쟁' 도입만 무성
지난해 11월 헌법재판소는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의 지상파 방송 광고 판매 독점을 놓고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는 "방송의 공공성과 다양성을 보장할 다른 방법이 있음에도 코바코에 방송 광고를 독점하도록 한 것은 민간 광고대행업체의 직업 선택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문제는 헌법재판소는 판결에서 "여론 다양성을 위해 공익적 기능이 있는 중소 방송사들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며 방송의 공익성, 다양성 보장 방안을 요구했으나 이명박 정부나 한나라당의 논의는 '경쟁 체제' 도입에만 맞춰져 있다는 것.
지난 5월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은 △공영방송 광고를 대행하는 한국방송광고대행공사를 신설하고 △복수의 민영 미디어렙을 허용하며 △방송사가 미디어렙 지분의 최대 51%까지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다. 사실상 미디어렙에 완전 시장경쟁 체제를 도입하는 내용인 셈.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도 지난 26일 기자회견에서 "법안에 있는 대로 '1공영 다민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서 "'다민영' 체제로 자유롭게 하면 가장 바람직하나 과도기 체제가 필요할 것이다. (민영 미디어렙은) 1개나 2개 많으면 3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한 의원의 안은 "지상파 방송 사업자의 방송 광고 직접 영업을 금함으로써 방송의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주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법안이 방송사에게 미디어렙의 소유 지분을 51%까지 소유하게끔 한 것은 각각의 지상파 방송사가 자회사를 두고 직접 광고 영업을 할 수 있게 한 것에 다름 없기 때문.
이는 방송사가 직접 광고 영업을 하지 않고 별도의 미디어렙 체제에서 대행하는 취지와도 어긋난다. 정연우 세명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방송사가 광고주와 직거래를 하게 되면 편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별도의 독립적인 기구를 설립하는데 미디어렙의 근본 취지가 있다"며 "미디어렙도 방송사에 준하는 공공적 기구로서 허가제로 운영하고 미디어렙에 대한 방송사나 광고주의 지분 참여는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지난해 9월 지역·종교 방송 등 전국언론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에서 '미디어렙 반대'를 주장하는 집회를 열었다. ⓒ뉴시스 |
'자회사 미디어렙'? SBS·MBC '솔깃', KBS "경쟁 최대한 제한"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판결 취지와 관련 없이 각 지상파 방송사들은 직접 광고 영업에 뛰어들 수 있는 한선교 의원의 법안에 솔깃해한다. SBS의 경우 △1사 1렙 허용 △매체 대행 계약 자율화 △일정 조건을 전제로 하는 등록제 △방송사 지분 참여 최대 51% 허용 등 광고 판매 대행을 최대한 자율화하는 내용의 입장을 내놨다. 별도의 미디어렙을 만들어 공영 미디어렙과 경쟁한다면 코바코 체제에 속해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을리라는 기대다.
반면 '공영방송'으로서 '광고공사'에 묶여 있어야 하는 KBS는 최대한 제한적인 방향의 민영 미디어렙 도입을 원한다. 경쟁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것. KBS는 △1공영 1민영 제한 경쟁 체제 △허가에 따른 설립 △방송사, 대기업, 광고기획사 등 지분 일정 비율 제한 등의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딜레마'에 처해있는 것은 MBC다. 수신료를 받는 KBS나 EBS와 같이 '광고공사'에 묶여있기에는 SBS와의 경쟁에 대응하지 못하리라는 위기감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SBS처럼 별도의 미디어렙이 갖겠다고 선언하면 '정명을 찾으라'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등 이명박 정부의 압박대로 "MBC는 민영화를 선택했다"는 논리에 휘말리고 시민사회의 반발에 부닥칠 수 있다. 또 내심 별도의 '미디어렙'을 원하는 MBC 본사와 지역 MBC 간의 입장도 엇갈린다.
MBC 관계자는 "MBC에서 미디어렙 문제는 그야말로 '폭탄'과 같은 문제다. 경영진이나 노조나 최대한 입장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며 "그러나 별도의 수신료를 받는 KBS와 MBC가 상황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또 19개 지역MBC와 9개 지역민영방송 사장들의 모임인 지역방송협회의 관계자는 "미디어렙 설치 문제나 '생존'의 문제에서는 MBC 본사와 지방 MBC 간에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MBC 노조 문소현 홍보국장은 "언론노조 방송광고 특위에서 합의한 '취약 매체에 대한 광고 총량 보존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외에 세부 내용은 아직 논의 중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새로운 접근법을 내놓기도 한다. 김현수 언론노조 강릉MBC 지부장은 "방송사가 직접 자회사 렙을 갖는 방안에는 분명히 반대한다"면서 "그러나 MBC가 '광고공사' 외의 별도의 렙에서 광고 대행을 한다면 민영 방송이 된다는 이명박 정부의 프레임에 말려들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선교 의원 안대로 '1사 1렙 체제'가 되더라도 MBC가 공적 소유 구조를 가진 공영방송인만큼 그 미디어렙도 '공영 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지역·종교방송 광고 쓸어 조·중·동 방송 주겠다는 것"
한선교 의원 법안이나 각 지상파 방송사는 지역 방송에 대한 별도의 제안을 내놨지만 대부분 '면피성'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선교 의원은 코바코 자산을 방송발전기금으로 전환해 지역방송을 지원하는 것을 제안하고 있으나 '극히 미흡하다'는 반발을 받고 있다. CBS 노동조합은 "방송발전기금 지원은 일부 프로그램 제작비를 대주는 정도로 장기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을 뿐 더러 미디어렙 도입으로 줄어드는 예산을 채울 수도 없다"고 비판했다.
또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종교방송은 종교 재단에서 지원해야 한다"는 KBS의 주장이나 "방송발전기금을 통해 한시적으로 취약방송을 지원하고 광고주가 선택할 수 있는 패키지 형식의 연계판매를 하자"는 SBS의 제안도 각 지역방송이나 종교방송의 비판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이 언론 관련 법을 강행 처리하면서 민영 미디어렙 도입 방침은 더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언론노조의 이진성 정책국장은 "조·중·동이 방송 진출은 궁극적으로 방송 시장 파이를 독과점하는 것이 목표이나 KBS나 MBC가 가지고 있는 방송 시장의 기득권을 생각할 때 초기 진입 과정은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다"며 "때문에 이들은 초기에는 지역.종교방송이 해오던 광고를 중요한 몫으로 보고 달려들 것"이라고 봤다. 그는 "한마디로 지역과 종교 방송의 광고를 쓸어 조·중·동 재벌 방송에게 주겠다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취약 매체의 '광고 총량 보존 제도' 필요"
각 지역방송이나 종교 방송에서는 '생존 방안'을 법안에 마련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 치열하다. 지역방송협회 관계자는 "최소한 언론의 공공적 기능을 지키기 위한 재원이 법이나 시행령에 보장되어야 한다"면서 "지역 방송의 살길을 찾기 위한 별도의 입법안, 지역의 목소리를 담은 미디어렙 법안을 발의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국언론노조나 시민사회에서도 각각 입장이 다른 지상파, 지역, 종교방송의 합의점을 찾아가려는 논의가 진행 중다. 지역 방송 중에서도 지역MBC와 지역민방은 각각 MBC 본부와 SBS의 입장에 따라 달라 의견 조율이 쉽지 않다.
언론노조는 방송광고특위에서 "지역·종교방송 등 취약매체에 대한 광고 총량 보존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수준의 합의를 이뤘다. 기존의 '연계판매'를 법적으로 보장하든 '전체 광고의 일정 비율은 마이너리그의 몫으로 보장'하는 '쿼터제'를 도입해 지역 ·종교 방송사가 기존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헌법재판소도 판결에서 "중소 방송국에 일정량의 방송광고를 제공하는 경우에만 민영 광고판매 대행 사업자의 설립을 허가한다든지"라고 예를 들어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정연우 교수는 "가칭 '방송광고 요금 조정기구' 등을 만들어 한 방송사에 지나치게 재원이 몰리는 것을 견제하고 시장 경쟁력이 약한 매체는 재원을 확보해주는 방식이 필요하다"면서 "각 미디어렙의 판매 방식, 요금 제도, 시장에서의 취약매체 지원 방안 등을 논의하는 사회적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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