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멕시코 시티에 모습을 드러낸 마르꼬스 ⓒ박정훈 |
사빠띠스따의 기여
22년간의 비밀투쟁, 그리고 15년간의 공개투쟁. 도합 37년간의 사빠띠스따들의 투쟁은 무엇을 이루었을까요?
첫째, 사빠띠스따 투쟁은 제도혁명당의 당-국가 체제에 포섭된 원주민 농민을 독립시킴으로써 70년간 멕시코를 지배한 정치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는 멕시코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길을 열었으며, 때론 우파를 때론 좌파를 시늉하던 제도혁명당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멕시코 좌파세력이 제도권 내외부에서 성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 결과 2000년 70년이 넘게 또 다른 특권체제에 불과했던 멕시코 제도혁명당 정부는 야당에 의해 교체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멕시코의 제도 내 좌파가 0.56% 차이로 우파 후보에게 석패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둘째, 사빠띠스따들의 투쟁은 치아빠스의 원주민 문제를 멕시코를 넘어 세계적인 의제로 만드는 데 공헌했습니다. 2001년 3월 28일 멕시코 연방의회에서는 원주민 게릴라들이 스키마스크를 쓰고 연설을 하는 세계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치아빠스 원주민 대표들이 발언한 것도, 게릴라들이 발언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원주민 투쟁의 세계적 의제화는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적, 인종적, 성적 취향의 소수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습니다.
▲ 산 안드레스 협정이 체결된 마을 입구, 군사작전지역 표시가 선명하다. ⓒ박정훈 |
셋째, 사빠띠스따들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세계적인 투쟁의 활성화에 기여했습니다. 시장만능주의가 파생상품과 서브프라임모기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의 삶의 문제였다는 것을 오래전에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습니다.
시장만능주의가 치아빠스 주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삶과 희망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전 세계에서 삶의 파괴와 희망의 상실을 겪은 사람들, 요컨대 신자유주의가 버린 사람들 모두를 연대시키고 투쟁하게 만든 것입니다. 월스트리트 한복판에서 신자유주의가 굉음을 내며 붕괴되고 그 도그마가 의문시된 것은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이야기처럼 사자에게 덤빈 두더지들의 승리였습니다.
▲ "인류를 위한 저항과 반란의 까라꼴", 까라꼴은 사빠띠스따 자치 마을 가운데 외지인이 방문할 수 있는 곳을 뜻한다. ⓒ박정훈 |
이제까지 저는 사빠띠스따 운동의 가장 큰 역설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역설은 이 운동의 탄생 자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운동의 연대를 호소하고 멕시코 민주화를 달성하는 데 기여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대안세계화운동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이 운동의 주인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스키마스크를 쓴 게릴라들이 이것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군인은 어리석고 맹목적인 존재입니다. 타인을 납득시키기 위해 무력에 의존해야 하고, 늘 자신이 옳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운동의 미래가 군대라면 그 운동엔 미래가 없습니다. 지금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군대로 남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르꼬스의 이 시적담론의 실제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마르꼬스의 성명서와 그가 전하는 이야기들, 그의 발언, 그의 낭만적 스키마스크 뒤에 있는 치아빠스 원주민 마을의 현실을 살피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바로 치아빠스 원주민 마을, 그러니까 사빠띠스따 자치 지역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미션 임파서블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빠띠스따들 자신들의 비밀주의 때문입니다. 외국인들은 사빠띠스따들이 특별히 개방한 구역(지금은 까라꼴이라고 부르는 곳)을 제외하고는 원주민들의 일상을 관찰할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사빠띠스따들이 우리에게 접근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가령, 준군사조직과 연방군과 맞서 싸우는 교전지대라서 보안 문제가 중요하다는 주장에서부터 사빠띠스따 원주민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입장까지. 때론 설명도 없이 그곳에 갈 수 없다는 짤막한 언질과 묵묵부답의 긴 침묵.
그러나, 치아빠스에서 6개월 체류하면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게릴라 조직이란 기본적 진실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무기의 전투를 벌이던 언어의 전투를 벌이던 그 조직 형태가 게릴라라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권위주의적 규율과 집단주의를 특징으로 합니다.
가령, 제가 체류할 당시였던 2002년 치아빠스의 한 마을에서 사빠띠스따 주민이 살해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이웃 동네의 사빠띠스따들이 그 마을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이웃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농사를 짓다말고 소집하라는 명령을 받고 스키마스크를 쓰고 트럭에 올라타고 살해 장소로 달려왔습니다. 그 소집에 참여한 원주민들은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설명 듣지 못했고 무슨 일을 할 것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저의 기대는 낭만적인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2003년 사빠띠스따가 자치를 선언하고 나서 자치마을 오벤띡에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은 그 마을을 이끈다는 집단 지도부와 만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한 두 명의 대표가 발언을 주도하는 데다가 그마저도 한 명의 정치담당의 눈치를 보며 발언하는 원주민 마을 대표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모두에겐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 사빠띠스따 자치마을 표지판 ⓒ박정훈 |
10년간 멕시코와 중미를 취재한 덴마크 출신 자칭 사빠띠스따 에릭은 "사빠띠스따들이 지키겠다는 원주민의 고유한 문화가 설마 게릴라 조직의 팍팍한 위계질서는 아니겠지?"라고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더 치밀한 관찰자라면 그런 징후들은 곳곳에서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 뒤에 마르꼬스의 발언을 다시 읽게 되면 그의 발언이 시적 담론이 아니라 때론 나직한 자기고백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민주화 이후의 사빠띠스따
마침내 2001년 4월 산 안드레스 협정의 정신이 반영된 원주민 자치 법안이 마침내 연방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요구 사항은 삭제되었습니다. 원주민들에게 토지와 천연자원을 통제할 권리는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사법적 전통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원주민 자치의 핵심적인 정신이 파괴되었습니다. 15분 만에 치아빠스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당시 대통령 비센떼 폭스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치아빠스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 에밀리아노 사빠따의 초상이 그려진 사빠띠스따 집회 공간 ⓒ박정훈 |
사빠띠스따들은 의회와 정부의 결정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침묵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마르꼬스는 언어가 무기이니 언어의 부재도 일종의 무기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자 그 언어의 부재라는 무기는 효과를 낳았을까요? 2년여의 침묵 끝에 사빠띠스따들은 다시 입을 열어 의회와 정부의 결정과 무관하게 자신들은 원주민 마을에서 자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의미는 무기를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원주민 자치 마을이 사빠띠스따 운동을 주도하고 군대의 역할과 위상을 축소하겠다는 의미입니다. 2006년에는 사빠띠스따들은 '다른 캠페인'이란 이름의 독특한 대선 개입 전술을 구사합니다. 이것은 선거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선거에 멕시코 민중의 목소리가 반영되게 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부사령관 마르꼬스가 그 옛날의 체 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대륙의 문제를 파악한 것처럼 자신이 직접 오토바이를 몰고 멕시코 전역을 돌며 저항하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청취하겠다고 발표합니다. 당시는 제도권 좌파 야당 민주혁명당(PRD)의 오브라도르 후보의 집권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때 마르꼬스는 좌파 후보를 포함한 정치계급 전체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수행합니다.
▲ 사빠띠스따 자치마을의 '좋은 정부위원회' 소속 마을대표들 ⓒ박정훈 |
2001년 이후 사빠띠스따들은 자신들의 투쟁의 성과물이기도 한 민주화된 멕시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첫째, 연방정부의 결정을 비판하며 '언어의 부재'라는 무기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연방정부도 좌파 야당도 민주화된 멕시코가 드러내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두고 논쟁을 벌이느라고 분주해졌습니다.
둘째, 2003년 사빠띠스따가 2001년에 통과된 개정안이 아니라 원안에 의거하여 '불법적인' 자치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연방정부는 무기를 벗고 대화하자는 말로 답했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2006년의 대선 국면에서 좌우파를 막론하고 멕시코 정치계급 전체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수행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사빠띠스따들이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곳에 있던 좌파 야당의 지지자들이 사빠띠스따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됩니다.
즉 사빠띠스따의 투쟁은 민주화를 이루고 연방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를 주춤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빠띠스따의 투쟁은 치아빠스 문제로 축소되고 맙니다. 바로 그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2006년에 전국을 순회하는 운동을 펼쳤지만 외려 운동의 지지자를 줄어들게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요컨대, 전략 전환의 계기를 잃고 만 것입니다. 2001년과 2003년 사이의 침묵의 기간 동안 사빠띠스따들은 민주화가 자신들의 운동을 치아빠스의 문제로 축소시킬 것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치아빠스의 자치운동을 제대로 펼쳐 제대로 된 자치 사례를 만들기 위해서는 게릴라의 군사주의적 규율과 위계를 완전히 혁파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게릴라의 군사주의적 위계와 규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치운동을 벌이겠다는 모순적 결정을 낳았습니다.
▲ 사빠띠스따 자치학교의 소녀 학생들 ⓒ박정훈 |
2001년 멕시코시티 대광장에 20만 명의 시민들을 불러 모아 놓았던 사빠띠스따들은 2006년 6월 어느 날 같은 광장에 500명도 채 되지 않은 소수 지지자들과 함께 집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부사령관 마르꼬스가 뻐끔뻐끔 파이프 담배를 무대 위에서 피우고 있던 그 뜨거운 어느 여름날, 멕시코 사람들은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가 당선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2007년 경 무기를 버리겠다고 선언했다는 소식이 멕시코 언론을 통해 뒤늦게 들려왔습니다. 사빠띠스따들이 물리적 무기를 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37년 간 몸에 배인 게릴라로서의 정체성도 완전히 벗어 던질 수 있을까요? 또한, 제도권 좌파 야당과 구분되는 비제도권 좌파로서의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사빠띠스따는 민주화 이전만 해도 완전히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놀라운 능력을 그동안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1994년 1월 1일 봉기 시점과 다른 지금의 새로운 현실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멕시코가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로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조건 모두 사빠띠스따들의 지난한 투쟁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사빠띠스따들이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사빠띠스따들은 민주주의를 더욱 심화하고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을 만드는 투쟁에 나서면서 37년간 유지해온 게릴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자기와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까요?
일찍이 마르꼬스는 "차라리 전쟁이 더 쉬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상을 내걸고 저항하는 서사시적 삶이 현재 상태를 지속적으로 개선해가는 산문적 삶보다 훨씬 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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