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협상이 재개되면 북미 양자 구도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은데, 이렇게 되면 북한의 남한 배제 전략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6자 틀 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남북간 접촉을 용인해야 했지만, 협상구도에서 남한이 빠지게 되면 남한을 상대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남북관계는 지금보다 더욱 얼어붙을 가능성이 높다.
남북관계가 경색될 이유는 이것 말고도 또 있다. 최근 북한 내의 상황을 보면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구축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은데, 북한에 이렇게 권력재편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면 간부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보신주의로 일관할 가능성이 높다. 권력이 변동되는 미묘한 국면에 괜히 잘못 나섰다가는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관계를 풀어보자는 모험적인 정책을 제기해 의심을 자초하기 보다는, '반동적인 이명박 정부와는 절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경론을 주장하는 것이 북한의 간부들에게는 신변안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처세술에 능한 명민한 북한 간부라면, 적어도 이런 국면에서 대남 유화책을 주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최고인민회의 제12기 1차 회의 다음날인 지난 10일자 4면에 최고인민회의에서 선출된 국방위원회 구성원 전원의 얼굴 사진을 게재했다. 북한 신문이 최고인민회의에서 선출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뿐 아니라 위원 8명의 사진도 실어 내외에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권력 재편기에 이들이 보신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대남 유화책은 나오기 힘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여기에다 정부가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전면참여를 곧 발표한다 하니, 남북관계는 더욱더 얼어붙을 것으로 보인다. PSI 전면참여가 당장 북한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로 연결되지는 않겠지만, 북한이 '한국의 PSI 참여는 선전포고'라고 주장하고 있는 만큼 강력히 반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으로 꽃게잡이 철이 다가오면 서해에서의 긴장고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결국 이 시점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전망은 참으로 암울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북한에 대해 대화의 뜻을 표명하고는 있지만,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남한과 관계를 개선할 이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식량 문제도, 지난해 작황이 별로 나쁘지 않은데다가 북중 수교 60주년을 맞아 중국이 모른 체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남한에 목맬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냥 같은 민족이라서? 北이 무서워서? 경제 때문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남북관계는 반드시 개선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원치 않는데, 왜 우리가 아쉬운 것처럼 남북관계를 개선하자고 매달려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우리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인가? '뜨거운 가슴'을 넘어선 '냉철한 머리'로 생각해본다면, 단순히 우리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개선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북한이 군사적으로 우리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인가?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이 양적으로 우리보다 앞서 있고 핵실험을 통해 초보적인 수준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한미동맹을 통해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고 있는 한국이 북한의 군사력을 겁내야할 수준은 아니다.
북한이 과격하기는 해도 정권안보를 위해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면이 있는데, 북한 지도부가 자살하겠다는 생각이 아닌 한 군사적으로 남한에 대해 먼저 도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군사대치가 계속되더라도 남한이 안보에 있어 불안할 이유는 별로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이유 때문에 남북관계의 개선이 필요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되는 주요한 변수인 북한. 이 변수는 물론 경제상황에 일정정도 영향이 있다. 남북간에 대치가 심화되고 긴장이 고조되면 외국인 투자가들의 마음이 편안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도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분단 6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남북간에 군사적 긴장이 없었던 시기가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남한은 그런 군사적 긴장 속에서도 꿋꿋이 경제발전을 이뤄오지 않았던가? 남한 경제에서 북한 변수는 하나의 고려사항은 될 수 있어도 결정적인 변수는 아니다. 다시 말해, 경제를 위해 남북관계가 반드시 개선돼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운명 결정권'의 문제
그렇다면 남북관계 개선의 당위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미래에 대비하는 역사적 안목에서 찾아야 한다.
북한이 그럭저럭 버텨나가고 있고 김정일 위원장이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다고 하지만 북한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경제상황은 여전히 본질적인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도 나아질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김정일 위원장 이후의 후계구도가 준비되고 있는 듯 하지만, 권력이양이 안정적으로 진행될 지도 미지수이다. 앞으로의 상황을 예단할 수는 없지만, 머지않아 한반도에 중요한 변화의 시기가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머잖은 미래에 한반도에 중요한 변화의 물결이 밀어닥친다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는 무엇이 될까? 아마도 다음의 두 가지가 될 것이다.
첫째,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일본과 러시아를 보조로 하는 주변열강들의 움직임이다. 한반도 주변 4강은 한반도의 세력변화에 대해 제각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만큼, 한반도에 변화의 움직임이 생긴다면 자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개입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남북한 내부의 움직임이다. 주변 열강에 비해 힘은 약하지만,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가 남북한인 만큼 남북한이 어떤 의사를 보이느냐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두 요소 가운데 어떤 힘이 결정적 요소로 작용할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북이 분열돼 민족의 목소리를 제대로 모아내지 못할 때, 한반도 운명의 주도권은 또 다시 주변열강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해방 후 민족 내부의 역량이 분열되면서 외세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듯,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또다시 주변 열강이 한반도의 운명을 요리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한미공조를 통한 외교적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한미공조에만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은 강대국간의 협상에 한반도의 운명을 맡기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누가 주도할 것인가에 대해
엄연한 두 개의 실체로 존재하는 남북한 사이에서 누가 어떻게 민족의 역량을 모아낼 것인가? 남북의 국력 차이로 볼 때, 앞으로 다가올 통합의 시대를 준비해야 할 주도권은 남한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아우르며 민족 내부의 역량을 키워나가야 할 책임이 남한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의 남한 정부는 북한과 소모적인 대결구도에 집착할 여유가 없다. 보다 긴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역사적 책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2009년 4월 지금의 상황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전망은 극히 불투명하다. 하지만 현실이 어려울수록 방향성을 명확히 하고 갈 길을 다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의외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 북한학 박사인 안정식 기자는 SBS 소속으로 한반도 문제를 취재, 보도하고 있으며 북한포커스(www.e-nkfocus.co.kr)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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