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右翼)
영부인께서 왈 촛불을 입덧으로 비유했다. 잘하는 말 같지 않다. 자기 배 안에서 새 천지가 포태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면 말이다. 새 정부가 그만큼 혁신을 감행하기라도 한다는 뜻인가?
말조심해야 한다.
노 정권은 말로 망했다.
촛불은 입 근처의 잣다란 사건이 아니다.
모르면 잠자코 있으라!
촛불은 또 켜지고 또 켜지고 또 켜진다. 촌스럽게 굴지 말라는 뜻이다.
집권 부위에서 조동이 방정 떨면 반드시 해괴한 사건이 벌어진다. 옛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 덧(天傷)'이라고 했다.
국정원이 그 권한을 대폭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 감청 도청을 합법화하려 들고 있다.
우리집 전화는 오래 전부터, 그러나 요즘에 와서 현저하게 괴상하다. 나는 긴 세월을 하도 당해서 금방 안다. 그만큼 요즘의 통신기술, 전화기 따위 구닥다리 아날로그 시스템을 별 혁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집을 왜 도청하는가?
천하의 욕쟁이를 도청해서 어디에 쓰자는 것인가? 누구나 아는 얘기를 도청해서 뭘 바꿔먹자는 것인가? 한심하다. 북한이 미국과 짝자쿵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시대에 미국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집단이 빨갱이도 아닌 나에게 찾아와 인사해도 유불리를 확인하게 힘든 판에 도청까지 하려 드는 건 그 무슨 손오병법(孫吳兵法)일까?
20년 민주화 투쟁사를 자랑해쌌는 자칭 좌파 사람들이 오히려 대답할 사안이다.
정보기관을 국정 운영의 첨병으로 삼는 시대는 전 세계적으로 이미 모두 다 끝났다. 국정원 법이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시도에서 목매는 정부, 여당은 오늘 이 순간부터 '선진화' 타령을 뚝 그쳐라!
국정원을 대통령의 통치 기구화하고, 국내 정보 수집 기능을 강화하려는 짓이 선진화는 아닐 터이니 말이다. 그래도 선진화인가?
또 이쯤 되면 뉴라이트가 대답해야 한다. 이제부터 무엇을 선진화라고 할 작정인가?
촛불 초기부터 내가 이명박 정권 퇴진 요구를 만류했던 게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내부 격동으로 자멸하리라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살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제 스스로 애써 정신 차릴 터이니 말이다. 싫으면 망할거고!
한 역사학자는 요즘 정치의 열쇠 말이 '배후'라고 지적한다. 뭐든 마음에 안 들면 '배후'부터 거론한단다.
촛불의 배후를 찾아라.
불교의 배후를 찾아라.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을 '명바기즘'이라고 명명한다. 다름 아닌 메카시즘 얘기다.
'국정 질서 파괴범', '법치', '간첩', '정부 조직', '좌파청산', '빨갱이 사냥' 타령이 그 어느 시절보다 더 요란하다.
어느 신문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만회하고 보수 지지 세력의 결집을 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 통합보다는 분열을 초래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요컨대 '지리멸렬'이다.
그러나 개벽은 바로 이 같은 혼돈을 타고 온다. 혼돈에 빠져들면서 혼돈을 빠져나오는 혼돈 그 나름의 질서를 찾는 것이 후천개벽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들이 '역행보살(逆行菩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며칠 전 남쪽 어느 도시에 갔다가 거리에서 '외국 쇠고기'란 간판을 보았다.
토박이에게 '팔리나?' 했다니 대답이 '팔린다'였다. '어째서?' 했더니 대답이 '싸니까'였다. '괜찮을까?' 했는데 대답이 '죽더라도 먹고 죽자고'였다. 그쯤 되면 할 말 없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선천운수(先天運數)'라고 하는 것이다. 서양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즐기는 '종말(終末)'이란 말이다. 이러면 개벽은 필연이 된다.
그러나 이런 것도 정치에 속하는 것인가? 그 난리를 치르고서도 미친 쇠고기를 시중에 억지로 판매시키는 것도 정치에 속하는 것인가?
어느 시대나 똑같겠지만, 이때 도리어 한우 고기마저 안 팔리는 사태 안에 새 시대가 들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후천(後天)'이란 것이다. 식생활 패턴 자체를 바꾼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시민들이 말이다. 아무리 희한하긴 해도 먹고 죽자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대세다. 바로 이 점이 초점이다.
이래서 이 정부는 해괴한 집단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혁명의 대상이기보다는 개벽의 촉매 같은 것이겠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개벽을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정치도 아닌 해괴한 행동을 잘한다고 할 수는 없겠다.
촛불들이 그리도 반대하던 물, 가스, 의료 보험, 몽땅 장사꾼들에게 넘기기로 결정하고 나서 잘했다고 히히거리는 이 정부를 무엇이라 표현해야 옳은가?
제 정신으로 비판하는 사람마저 미친 놈 소리 들을 판이다. 풍자시밖엔 없다. 벌써 촛불들 사이에 풍자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 첫 조짐이 '좀비'다.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도로 살아나는 송장들 얘기 말이다. 풍자시를 써야 한다는 나의 내면적인 강박에서 해방될 수 있어 참 좋다. 젊은 풍자 시인이 머잖아 무더기로 쏟아질 것 같다.
상하수도 민간 위탁 경영을 뼈대로 한 수도 사업 개편안을 내놓고 있다. 물의 공공성을 놓고 환경부와 한나라당이 부딪힌다. 그러나 청와대는 히히거린다. 잘 돼간다는 뜻이겠다.
제 2촛불의 씨앗을 저들 자신이 뿌린 것이다. 가스, 의료, 수도 등 모조리 민영화하고 이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국민 앞에 나와 '의료, 전기, 가스, 수도는 절대 민영화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 엊그제다.
기독교 신자, 그것도 장로, 그것도 대통령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데도 이 세상이 제대로 굴러 간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것이 미친놈이다.
'절대'란 말을 썼다.
그러니 '절대'로 그렇다.
싸고 안전한 물.
유럽 보수당 정권들이 물 문제에 섬세한 신경을 쓴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정부의 선진화라는 건 모델이 없는 참으로 독창적인 것이던가? 놀랍고 놀랍고 또 다시 '놀랠 놀'자로다.
교육은?
도로아미타불이다.
많은 입들이 말한다.
'10대 청소년 자살자 증가가 나타날 것 같다.'
이미 대학생 자살자 증가는 기하급수다. 여기에 10대까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즉각 대답이 돌아온다.
'경쟁력' 때문이라고.
경쟁력!
결국은 구미 모델인데 사실은 완전 착각이거나 몰지각이거나 무식이다.
이미 문명사의 방향은 동풍이다.
'선진'을 운운하려면 당연히 제 것, 제 삶, 제 자신, 제 자유, 제 나름의 재능을 중심으로 외국 것을 참고해야 한다. 아직 그것도 눈치 채지 못한 주제에 '선진화'라니!
CEO 타령을 입만 벌리면 늘어놓는 자들이 생각이 에너지인 시대. 아이디어가 자본인 시대. 영혼이 경제력인 시대. 창조력이 국력인 시대. 콘텐츠가 문화력의 핵심인 시대. 바로 이런 시대에 남의 그것 훔치라는 것만 교육하는 짓이 잘하는 짓인가? 그러고는 선진이니 경쟁이니 성장이니 창조니 떠벌릴 자신 있는가?
문제는 10대 학생들이 그것을 눈치 채버렸다는 점이다. 세상에 못 봐줄 코미디는 아무도 안 알아주는 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폼 잡고 악 쓰는 것이다.
경제 자신 있다고 악을 악을 써서 당선된 사람들이다. 촛불이건 횃불이건 간에 그 때문에 경제 안 된다는 핑계는 이제 물 건너갔는데도 신문들은 '원칙 없이 오락가락'이라고 타이틀 뽑는다. 환율이 촛불인가?
정부는 지난 6개월 동안 엠비노믹스에 전혀 일관성이 없다는 점만 보여주었다. 어떤 자는 기민한 경제 정책은 본디 복잡한 상황에서는 일관성 없이 보인다고 괴담을 늘어놓기까지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부의 경제 정책 자체가 오히려 경제 혼란과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정책 환란 형 위기'란 말까지 나온다. 환율, 부동산, 물가 등이 몽땅 오락가락이다.
'오락가락'이 곧 '기민성'인가?
성장 악을 쓰다가 고환율로, 고환율에서 물가 급등으로 떨어지니까 '안정 우선'이라고 틀었다가 '녹색성장'을 난데없이 미친놈 악쓰듯이 떠들다가 전혀 그와는 반대되는 재건축, 재개발 활성화로 '건설 경기 부양'을 떠들면서 원자재 가격까지 폭등한다.
완전히 풍자시 감이다.
그럼에도 '강만수, 어청수'의 두 '수'를 제 목숨 '수(壽)'자로 알고 필사적으로 '사수(死守)'한다.
드디어 완전 '사기꾼 마각(馬脚)'을 여실히 드러내기에 이른다.
몇 번이고 안 하겠다고 약속한 대운하 개발을 또 하겠다고 밀고 나온다.
'녹색성장'에 '대운하'라!
이러니 10대 초등학생이 겁도 없이 '엠비 너 나하고 한 번 끝까지 붙어볼래!'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한 간부가 이 학생의 '싸가지 없음'은 어른들 잘못이라고. 그 어른은 학부모와 교사들이라고 싸잡아 욕한 일이 있다.
그런데 그 칼럼을 보고 내가 픽 웃었던 것을 '저는 어린아이인가?'
저는 어린이 아닌가, 이 말이다. 제 탓인 걸 모르는 것이다. 어른 중의 어른인 대통령, 그것도 기독교 장로가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서로 맞지도 않는 '녹색과 녹색 파괴'를 이중성이나 반대 일치나 아니다. 그렇다가 기본 문법이 되는 선각자, 철학자도 아닌 주제에 일체의 반성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정치한답시고 거의 동시에 떠들어대는 데 10대 소년이 그런 말 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조선일보 칼럼 쓸 정도면서 10대 교육에 책임이 없다는 건가? 누구 닮은 건가? 닮아가면서 무슨 언론인인가? 언론이 뭔가?
자!
또 시작이다. 못난 놈은 몰리면 제 그것 밖에 내놓을 게 없다더니 그 놈의 대운하가 무슨 놈의 요술 망치라고 대갈통 싸매고 덤비는 건가?
이래서 정치는 아무나 못하는 거다.
아무나 하는 건가?
이미 저탄소 녹색성장 발언 때부터 즉각적 비판이 있었다.
'녹색 분칠(Green wash)'이란 것이다. 전혀 제 분수에 안 맞거나 사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녹색 타령 직후에 태양열 개발 예산은 대폭 삭감하고 원자력 타령은 도리어 텔레비전에서 뒷받침할 정도였다.
이젠 모조리 사기에 불과한 것이 전주민적으로 입증된 그 미사여구를 한 번 추억 삼아 들어보자.
'녹색성장을 통해 다음 세대가 10년, 20년 먹고 살거리를 만들겠다', '그린 홈 100만 호 프로젝트를 마련하고 그린 카 중점 육성을 통한 세계 4대 강국 도약'을 약속했다. 그 후속 대책으로 전기 생산에서 원전 비중을 현재 26%에서 2030년에는 41%로 늘리는 계획을 발표했다.
녹색성장률이 하룻밤 새 건물 올리듯 '뚝딱' 아니냐고들 비쭉거린다.
제일 우스운 것은 이것이 대선 공약인 '747(7% 경제 성장, 국민 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과 아무 관련도 없다는 점이다.
그보다 더 우스운 것은 원자력 타령이다. 제임스 러블럭 핑계를 대겠지만 러블럭 자신이 이미 미국, 유럽은 물론 전 세계의 생태주의자들로부터, 심지어 경제학자들에게까지도 묵사발이 되고 있는 판이다.
왜 이러는가?
에코 파시즘인가?
드디어 마각이 드러나면서 이 생태학적 의혹은 도리어 시들어져 버린다.
대운하!
그러면 그렇지!
저 죽을 궁리 또 내놓은 것이다.
이렇게 오락가락한 정권도 제 목숨 제대로 다 살아낸 예가 역사에 있었던가?
있었다고?
좋다.
내가 듣고 싶던 소리다.
오히려 그래야 문명이 바뀌고 후천개벽이 온다. 꼴불견이건 말건!
역사는 네로를 분명 기억하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분명 네로를 기억한다. 기독교들 중에 누군가 네로를 도왔다는 기사를 슈팽글러든, 토인비든, 크리스토퍼 도우슨에서든 아직 나는 본 적이 없다.
있었던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에게 상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서 거꾸로 로마는 예수의 나라가 되었으니까.
맞는가?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조선일보가 드디어 아이러니컬한, 그러나 매우 근엄한 표정으로 제 27277호에 칼럼 하나를 대문짝만 하게 올린다. '대운하 대신 녹색 성장의 길로!'
칼럼을 쓴 사람은 글의 말미에서 '녹색 성장 비전이 마침내 21세기 중반에 도달했을 때 대한민국의 국가 경쟁력과 우리 국민의 삶의 질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는 초석을 쌓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놀라 날짜를 보니 바로 오늘 아침이다.
이명박 정부는 스님들이 주축이 된 대운하 반대 강 살리기 도보 팀의 그 날카로운 칼날이 칼집을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는 것이 눈에 환히 보인다. 그야말로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정말 힘들 것이다. 녹색 표방이 녹색 분칠이 아니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하고 원자력이 전 국민을 암환자로, 전 생명계와 흙과 물을 방사능으로 인한 죽임으로 몰아넣지 않으려면 스스로 목숨을 걸어야 될 것이다.
행여 까불 생각은 접어야 한다.
그때 문명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대운하 토목 공사에 미친 근원적 비 녹색들이 그것이 그리 쉬울까?
힘들 것이 뻔하다.
개벽은 그래서 멀지 않다.
대외 관계며 대북 관계는 뻔할 뻔자요 묻지 마의 영역이다.
종교 차별은 어찌할 것인가?
인터넷과의 전쟁은 이길 자신이 있는가? 어떤 웹 전문가가 백전백패라고 이미 훈수를 놓았다. 포기하라는 말이다.
문화부 장관이란 사람은 또 망둥이가 뛰니까 짱뚱이도 뛴다던가. 문화 예술 지원에 철저한 경쟁원리를 도입해야겠다고 나섰다.
나 또한 그 부분과 완전히 관계없는 사람이 아닌 만큼 한마디 한다.
'잘해보라. 잘하면 망할 것이다.'
21세기는 문화력이 경쟁력보다 더 중심적 국가 경쟁력이라고. 그래도 중요한 것은 정보화보다 콘텐츠 중심의 창조화라고. 그래서 비트가 단위가 아니라 '창조적 발생량'이 단위라고. 그리하여 컴퓨터가 아니라 컨셉터 즉, '창조적 발생지원 시스템'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 '창조전략'이라는 획기적인 21세기 문화 리포트를 내놓은 것은 바로 일본 산업 문명의 첨병이라는 '노무라(野村) 종합연구소'다. 물론 방향만 그렇게 내놓고 저희들 자신을 성과를 못 내놓고 있지만, 하긴 그들 일본 건축에서 그런 창조력을 기대하기는 무리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거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컨셉터!, '창조적 발상지원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은 바로 국가의 문화 예술에 대한 심혈을 다 바친 공적 지원과 보장 없이는 안 된다. 포스트 한류가 뜸해져 버리는 이유가 모두 이것이 부족해서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물을 장사꾼에게 넘기는 걸 보고 저도 뛴다고?
잘해보라. 잘하면 망할 것이다.
철학.
현 정부에 정치철학 없는 걸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뉴라이트의 '선진화' 타령은 '짝퉁'에다 '캣치 업'(유럽, 미국 따라잡기)인데 내 가까운 코쟁이 한 사람이 왈.
'동풍이 부는 이 시대에 동 로테르담 허브에 앉아서, 월가까지도 아메리카를 팔아서 아시아를 사라고 농담하는 판에 캣치 업이라니! 더욱이 짝퉁에 불과한 몰입영어교육이라니!'
환원주의. 삼진법, 변증법에 대해 문제의식이 전무(全無)한 인사들에게 철학을 요구해 봤자 말짱 허사다.
8.15를 건국절이라 생떼 쓰는 자들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마지막으로 정치 얘기 한마디 하자.
이제까지 해놓고 또 무슨 정치?
그 얘기가 아니다. 들어보자.
최근 신문에 정몽준과 김문수를 맞세운 기사가 있어 봤더니 해괴했다.
소위 좌파 운동권 과격파 출신이라는 김문수가 왈.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을 짓밟아 꺼버리지 못한 채 100일씩 방치하는 정도라면 정부 그만 두라. 경찰권을 경기도에 넘겨주면 확실히 법치를 세우겠다. 지난 10년 동안 사형수들을 왜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가? 빨리 집행하라!'
허허허.
가관이다.
거의 일급 코미디언이 출현했다.
정몽준 가라사대.
'한나라당이 극우 정당이 아니지 않는가! 한나라당은 중도 진보이기도 해야 한다. 진보 쪽보다 더 진보적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
정몽준은 자타가 다 아는 재벌가 출신의 부자인데도 그런다.
하하하.
역시 코미디이긴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모르게 싹수가 있다.
말뿐이라도 그렇다.
노 정권은 말로 망했다. 말조심해야 한다.
더욱이 촛불은 '기위친정'의 후천개벽의 첫 조짐이다. 여기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정치 백 번이면 백 번 다 망한다.
씁쓸하다.
우익에 대해서는 그나마도 덕담이 잘 안 나온다. 조선일보 오늘 아침 칼럼 밖에는.
그러나 역행보살로 살신성인(殺身成仁) 하리라는 확신은 있다. 전 인류 문명사의 근원적 대전환이 바로 이 작은 한반도에서 그 첫 촛불이 완벽하게 켜지게 하는 데에 심대한 공헌을 하리라는 나의 확신엔 변함이 없다. 그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를 기도할 뿐이다. 악담이 아니라 덕담이다. 사람도 집단도 제 태어난 대로, 제 생긴 대로 사는 것 아닌가!
그래.
내 창질은 이제 다 끝났다. '모심의 선(侍禪)'이라고 당파(鐺把)가 도무지 무엇일까?
절집에서도 잘 모르는 옛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때가 고려 최 씨 무신정권 때.
하도 험악한 때라 불교 역사조차 숨죽이느라 공식적인 기록이나 소문조차도 엉성할 때라 아무리 물어봐도 잘들 모른다.
당시 강화도에 피난 가있던 최 씨 정권을 구성한 정치 세력은 크게 보아 세 개의 힘이었다. 이들이 어느 날 저녁 풍치 좋은 누각에 함께 올라 풍악을 울리며 숨을 마시며 서로서로 화합을 도모하고 있었다.
당시 풍속도 그러했지만 바닷가이어서 둥글게 앉질 않고 해가 기우는 서쪽 바다를 향해 왼쪽엔 문신(文臣)들, 오른쪽엔 집권 무신(武臣)들, 그리고 가운데는 문무 사이에서 적당히 오락가락하는 유명짜한 문무겸전의 관료들이 앉았다.
때는 몽고 침입으로 국토를 잃고 섬에 도망가 있었으면서도 항쟁을 이유로 한 철통같은 독재에 일상화된 부패로 나라와 백성을 견디기 힘든 고난에 빠트리고 있었다. 그 독재의 최 씨 무신 권력에 문신과 중간파가 이렇게 저렇게 빌붙어 여러 행태로 관여하고 있었으니 비판을 하든 타협을 하든 총체적으로 그것이 매우 꼴불견이었음을 이미 누누이 역사가 증거하는 바다.
그들 가운데는 저 유명한 이규보(李奎報) 역시 중간파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혜정(惠正)이라는 이름의 한 스님이 동석했다가 한마디 권주가용 시(詩)를 청해 받았다 한다.
혜정이 그 청을 받아들여 꽤 기인 시를 읊었다고 하는데 그 시는 전해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시가 지독한 풍자시로서 그 풍자의 대상이 된 사람은 듣고 나서 평생을 자나 깨나 이를 갈며 기억할 수밖에 없을 만큼 뼈에 사무친 내용이었다고 한다.
혜정은 그 시에서 맨 먼저 이규보 따위 이름 높은 중간파를 후려치고 그 다음엔 빳빳한 것으로 밥값을 한다는 문신들, 그 다음 마지막으로는 집권자인 최 씨 쪽 무신들을 마구 들쑤셔서 온 자리가 쑥밭이 돼 버렸다 한다. 혜정은 시를 읊으며 춤을 추었다는데 그 춤사위 역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시 양식의 이름만이 남아 내게 전해졌으니 그것이 곧 당파(鐺把)다.
미덥지 않아 이희승 사전에서 삼지창(三枝槍)을 찾아 봤더니 거기 '鐺把槍'이란 세 글자가 뚜렷이 나와 있었다.
혜정은 중인지라 그날 '이변비중(離邊非中) 의 참선법으로, 그러나 그 공격력이 비상하게 집중적이었거나 그 모시는 마음의 간화력(看話力)이 마치 하늘을 뚫을 정도이어서 자연 '비중이변(非中離邊)으로 중간부터 집중적으로 쑤시는 '모심의 선(存神)' 형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세 패거리 사람들이 모두 다 술김에 예외 없이 분기탱천하여 한꺼번에 달려들어 혜정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뒤에 누각 아래로 내던져 버렸다. 누각 아래 킁킁거리며 먹이를 찾아 해메던 굶주린 들개들이 달려들어서 살 한 점 뼈 한 톨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다 뜯어 먹은 뒤 허공을 향해 기일게 기일게 짖어댔는데 때는 바로 늦은 노을이라 시뻘건 낙일(落日)이 근처 풍경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한다.
얼마 전 이 원고를 쓰기 시작한 직후 나는 강화도의 '마리 학교'에 가 어린이, 청소년, 여성들과 쓸쓸한 중년 남자들 앞에서 촛불 이야기를 하고 돌아온 일이 있다.
돌아오는 길은 노을이 아니라 별이 빛나는 밤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기억하는 이 없는 저 슬픈 혜정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내가 이 글 발표 이후 자칭 중도파, 좌파, 집권 우파에게 한꺼번에 붙들려 삼파 합동으로 갈기갈기 찢겨 자취도 없이 사라질는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에 잠시 몸을 떨었다.
아직 개벽의 때는 무르익기 아득한 이전인데 혜정은 어찌하여 그 위험한 옛 당파창, 그 날카로운 참선의 칼, 그 무서운 '모심의 신법(侍禪)'을 그 위험한 자리에서 두려움도 없이 마구 섰던 것일까?
'모심(侍)'이 '극에 달해서(至於)'였을까?
그러나 '개벽(至化)'은 오지 않았다. 슬프다.
왜?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
이 때 내 귀에 한 어린이 목소리가 당당하게 울려 왔다.
촛불이 켜진 시청 앞에서 어느 날 밤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한 숨은 목소리가 음산하게 외친다.
'아무개를 찢어 죽이자!'
곁에서 한 여성이 외친다.
'너나 죽여라!'
바로 내 곁에 서있던 초등학생 어린이가 바로 속삭이듯 외친다. 낮은 목소리로 외친다.
'종이냐, 찢게?'
하하하하하.
나는 순간 웃음에 휩싸이며 나도 모르게 '잘한다!'
추임새를 뱉고야 말았다.
이렇게 된 것이다.
내 가슴과 얼굴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하.
차 뒤쪽에 앉아 있던 마리학교 여성들이 깜짝 놀라 까닭을 물어온다.
'사람은 종이가 아닙니다.'
'네에?'
하하하하하하하하하-
2008년 9월 6일
3시 25분
일산에서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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