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과 질서', '혼돈적 질서'에 관한 공부, 또한 대화를 자주 나눠야 한다.
'한(恨)과 신명(神明)'의 문제 또한 그렇다.
'풀이와 삭임' 또는 '시김새' 전체에 대한 공부 반드시 필요하다.
'그늘(또는 시김새)'과 '흰 그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흰 그늘'은 오직 나만의 창조물이 아니다. 참고로 나의 중앙아시아 기행 '예감'을 돌려 읽어 보라.)
전라도 판소리에서 동편제 송흥록(宋興錄)과 이동백(李東伯) 연구에서 귀신 울음소리(鬼哭聲)와 귀신 웃음소리(鬼笑聲)는 다가오는 생명과 영성 미학의 한 높은 경지, '숭고'와 '심오'의 모범이 된다.
이것이 마당굿 안에 연속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더욱이 '귀곡성'보다 더 어렵고 높은 경지인 '귀소성'은 마당굿과의 관계에서 아주 특별한 귀중한 미학적 효과를 산출할 것이다. '해학이나 풍자와 귀신 세계'를 결합함으로써 한과 신명이 결합하는 '흰 그늘 미학'의 시대의 드높은 규범이 된다. 이제까지는 비장에서 숭고 · 심오로 가는 길은 열려 있었으나 (동·서양 모두 다 그렇다. 귀곡성은 인정될 수 있었다) 해학과 풍자에서 숭고 · 심오의 저승으로 가는 길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논의와 후속적 조치들이 있기를 바란다. 물론 임방울 등의 서편제와의 연속성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모든 탈춤(판소리 역시) 공부가 다시 시작되어야 하지만 그 중에도 늘 소홀히 취급되어 온 양주산대(楊洲山臺)놀이 공부는 중요하다.
유럽의 경우, 이탈리아 15세기 르네상스기의 그 모든 흐름 가운데 '라오콘(Laokoon)'의 미학적 가치, 바로크, 로코코의 눈부시고 줄기 굳은 흐름에도 불구하고 그 변두리에 처져 있는 18세기 네덜란드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가 갖는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
통상의 정물화와 같은 밝은 안정감 따위와는 거리가 먼 썩고 무너지고 죽어가는 시체의 세계, 어둡고 절망에 가득 찬, 그러나 신생(新生)에의 갈망과 생명의 해맑고 힘찬 아름다움의 꿈을 갖추어 간직한 이 정물화 흐름과 함께 신에 대한 끝없는 원망과 동시에 신에 대한 한없는 구원의 호소 사이의 동시 모순이 작렬하는(no-yes, yes-no) 라오콘의 '흰 그늘'의 이미지는 어둠 속에서 배어나는 빛의 예술가 렘브란트와 함께 이후 유럽의 '어두운 중력과 눈부신 초월' 사이의 숨은 저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선비적 통합의 새 차원을 그리는 예술가들 조르쥬·루오, 그레함 그린, 스톡하우젠 등의 산 멘토가 된다.
오늘날 한국 신세대 문학(우선은 문학, 특히 시현상이지만 이것은 서구에 전 예술 방면으로 확산가능성이 있다)에 나타난 '미래파' 신드롬을 어떻게 불 것인가?
추악함, 질병, 죽음, 불륜, 패륜, 정신병, 환각, 동성애, 가학, 피학, 근친상간, 강간과 살인, 잔혹성, 혼돈, 괴기, 몽상, 혼음, 시체 선호증, 리듬 붕괴, 자살, 마약, 매춘, 아동학대와 성도착…….
이루 말할 수 없는 지옥의 풍경이다. 한없이 지속되는 시작도 끝도 중간도 대시도 콤마도 피리어드도 행같이도 없는 산문조차도 아닌 '줄글'의 대홍수에, 이미지범벅, 환유·제유의 범람, 상징의 난발로 꽉차 있다.
이미 유럽예술사에서 생명을 다한 지 오래인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즉물주의, 다다, 네오 다다, 악마파, 마술취향, 연금술, 삼류신비주의에 속류물활론! 참으로 가관이다.
어떤 이는 단 한마디로 '쓰레기'라고 매도한다. 결과를 보면 그럴 만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문명의 대전환기에 어째서 이런 괴이한 미학현상이 나타나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전환기는 감수성과 미의식의 대변동을 수반한다. 대표적인 것이 르네상스기다. 우선 세계와 삶에 대한 부정(no)과 긍정(yes)이 공존 교차하고 하대(下代)에서 상대(上代)로, 상대에서 하대로 쌍방향지향이 동시진행하며 또한 입고출신(入古出新), 과거로 들어가 새 것으로 변하여 나타난다는 등 고대 복귀 흐름과 미래 문화를 향한 혁신 등이 함께 일어나는 법이다.
바로 지금의 우리 사회가 대표적으로 그렇고 세계도 그와 비슷한 움직임 속에 있다. 과거의 문화· 문명은 아직 완전히 쇠퇴하지 않았고 새로운 문화·문명은 오긴 오지만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
바로 이런 시절에 바로 '미래파 신드롬'과 같은 '추(醜)의 미학', '질병의 미학', '죽음의 미학', '혼돈의 질서' 등의 과도기 현상이 나타나고 '아니다, 그렇다'와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사이의 표리 관계', '닫힘과 열림', '역동성과 균형성', 포괄성과 직접성, 우발성, 돌발성 등이 그 특징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이 시기의 미학은 '괴기(Grotesque)'가 그 특징이며 생명과 평화에의 갈망이 짓밟힌 형태인 '죽임과 싸움'의 감수성이 그 기둥이 된다.
괴기의 시대의 숨은 차원은 생명이다. 따라서 그가 동경하고 희망하는 것은 숭고와 심오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하다. 괴(怪) 없이는 숭고와 심오에로 가는 길은 실제로 열 수가 없다. 예술에 있어서 이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괴(怪) 없이 어찌 지예(至藝)에 도달할 수 있으리오?'했다.
지예는 곧 지극한 예술이니 추사의 표현으로는 '산은 높고 물은 깊다(山崇海深)' 즉 '숭고'와 '심오'의 차원인 것이다.
유럽미학사에서 중대한 근대 전환기에 '추의 미학', '질병의 미학' 등이 튀어나온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 점에 눈을 크게 뜨자. '미래파' 현상은 숭고와 심오의 차원이 열리는 과정의 한 필연적 과정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삶과 감수성 변동에 대한 탈춤 나름의 대응의 전통이 있었는가를 잘 검토해봐야 한다.
이것은 탈춤의 현대화 과정에서 마당극이 단순한 민중민족개혁 테마나 교조(敎條)에 따라 엉성한 정치적 선동 선전 프로그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게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관련이 있다.
민족문화 운동 전반, 마당극 운동 전체에서 현대인의 복잡한 삶, 그 내면의 깊은 그늘과 고통과 실존적 돌파력에 관한 묘사나 표현이 전무(全無)하며 이른바 생태계라고 부르는 자연생명, 물건들, 생각들, 우주의 변동과 공기, 계절, 햇빛이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다.
현대화, 초현대화하고는 거리가 멀다. 대중의 구체적 생활 감각과도 거리가 멀다. 정치적 격변을 지난 뒤 젊은이들이 마당극에 발길을 끊은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다.
어째서 하필 '양주산대'인가? 바로 이 때문이다. 탈춤 공부 조금이라도 한 사람들은 일치해서 양주산대를 '괴기스럽다'고 말한다. 그 '괴기'를 이제 새 마당 굿 운동에서 정면으로 다루어야 할 때가 되었다.
첫째, '도끼'와 '도끼누이' 사이의 그 칙칙하고 흉흉한 근친상간의 그늘과 이상한 피 냄새, 그리고 불안과 불길함이 밝혀지고 새 마당굿에 대담하게 확대·연결되어야 한다.
양주산대 마당 뒤편에 나타난 개복청(改服廳, 옷 갈아입는 자리)의 존재를 해명해야 한다. 서구 연극사에서 희랍원형극장 뒤편에 나타났던 그 '스케네(개복청)'과 똑같은 미래의 무대장치의 시작인가?
그렇다면 부르죠아 리얼리즘, 정확하게는 실증적 자연주의 미학의 출현인가?
하긴 자본주의 맹아론의 경제 사회사적 인식에서는 그것은 합당한 판단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탈춤의 마당 굿화 과정에서 근대· 현대성 문제와의 어떤 연관을 시사하는 것인가?
다음, 양주산대 마당구조는 다른 지역 탈춤과는 현격히 다를 뿐 아니라, 이제껏 한 계열로 파악돼 왔던 사리원·해주·강령·안악과 송추 등 황해도 계열 탈춤과도 크게 다르다.
다른 굿판마당이 객석과의 관계에서 수평적인 데 비해 양주는 우선 새끼줄을 걸어 산대를 설치하고 마당이 객석보다 비스듬히 더 높다. 객석에서 마당의 광대들을 <올려다 보도록> 돼 있는 것이다.
산대와 비스듬히 높은 마당.
이것은 분명 제의(祭儀), 그것도 일종의 '컬트(cult)'적인 제의에 연속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복청과는 반대로 고대 지향적인, 그것도 유사종교적 고대 지향으로서 개복청의 자연주의 미학 지향과는 쌍방향성인가?
18세기 영·정조 이후 문예부흥 움직임과 문화혁명 움직임 사이의 쌍방향성의 반영인가?
현대적 민중의 삶의 표현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아가 탈의 미학은 어떠한가? 같은 계열로 모두들 인정하고 있는 해서(海西) 탈춤의 탈들이 모두다 그야말로 장바닥의 색동 비단으로 만든 일종의 돈귀신(사람 얼굴이 아니라 저급한 물신·物神의 상징이다) 형상을 하고 있는데 비해, 유독 양주형만은, 물론 세부는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하회별신(河回別神) 굿 경우처럼 대단히 사실적이다. 이 경우에도 물론 단순한 자연 모사적 사실주의는 아니지만 다른 해서탈춤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탈은 고대의 신의 얼굴이다. 근대로 오면서 그것이 사회적 에토스를 집약하는 집단적·계급적 전형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고는 있으나 양주산대의 탈에는 근대적 전형성과 고대적 신성이 함께, 그러나 저 나름대로 얽혀있다(단순 '통합'이 아니라 '개체적으로 융합(identity-fusion, 各知不移)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마지막으로는 양주산대의 연행 주체들의 신분 문제다.
농민도 상인도 유민도 아니다.
아마 이 문제는 현대적인 새 마당굿 창조 과정에서 매우 치열한 논쟁을 유발할 듯하다.
그들은 옛 왕조시대에는 대체로 아전, 중인층이고, 일제시대에는 지방의 친일파 형사, 앞잡이들이었고, 건국과 전쟁 이후에는 동사무소 직원, 지방 토호 주변의 집사나 노름꾼, 정부 끄나풀들, 백수건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어떤 한계는 분명 있겠으나, 민중관점, 계급관점에서부터 판단해서 그 예술적 창의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기존의 방향이 과연 오늘에도 옳은 것인가?
질 들뢰즈처럼 카오스 시대의 민중 개념을 카오스 민중, 대중적 민중, 잡계급 연합적 민중 복합이라 볼 때에, 또는 그 모든 해체적· 탈중심적 구성요소를 반동이니 운동이니 하며 낡아빠진 구분법에 의해 배제·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이것은 예술창조주체의 문제다. 그리고 아무리 민중이라도 현대적 삶의 복잡성, 중층성, 혼돈성과 거의 지옥에 가까운 괴기성, 영적인 부패와 정신 이상 등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예술가로서의 존재는 다시 인식해야 될 것이다.
프랑스 작가 '장 쥬네'는 비록 비역쟁이요 형사 끄나풀이요 반진보적인 제멋대로 인간이지만 그의 '도둑일기'는 18세기 바니타스 정물화와 '조르쥬·루오'와 다름없는 혼돈의 예술로서 그 나름의 빛나는 정상을 기록했다고 나는 본다.
새 마당굿에서는 이 문제를 앞으로 어찌 할 것인가?
미래파 신드롬과 기타 모든 예술 문화방면에 확산되고 있는 혼돈성에 대한 날카로운 미학적 인식의 문제요 현실적 삶의 어두운 실상에 대한 현실주의자의 판단 문제인 것이다.
옛 탈춤꾼, 남사당패, 소릿꾼, 환쟁이들이 거의가 도덕적으로 하자가 있었고 비역쟁이들이 다수 있으며 이른바 룸펜 프롤레타리아요 밑바닥 천민(賤民)이었다. 자칭 혁명가들은 이들을 멸시하고 증오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위대한 여성 사상가였던 시몬느 뵈이유는 '천민만이 가장 성자(聖者)답다'고 했다. 칙칙한 밑바닥의 중력으로부터만 참으로 눈부신 초월의 빛이 떠오르는 것이 참된 예술이다. 기인 고통과 타락, 굶주림과 방황, 헤어짐, 외로움을 끝끝내 참아내는 시김새, 즉 '그늘'로부터만 '흰 그늘'은 시작한다. 그러나 빛, 즉 신명은 이미 먼저 있는 법이다. 영고, 무천, 동맹 축제, 그들 이은 팔관의 원음이 '' 즉 '빛나는 어둠'인 까닭이다.
어둠이 없는 예술은 빛을 찾지 못한다. 시김새, 그늘과 한이 없는 신기와 신명과 풀이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한국의 민중 예술이다.
현대 미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흰 그늘'인 것이다.
촛불은 밤에 켜는 것이다.
깨끗한 사람, 중심적인 계급, 조직된 힘만이 켜는 것 아니다.
지나간 광장에 어린이, 청소년, 여성들의 아름다운 춤과 노래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여기저기 드문드문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끼어 앉아 있던 쓸쓸한 외톨이 시민들이 있었다. 새 마당굿은 그들과 무관한가?
그들은 크게 봐야 광범위한 소외 대중 '비정규직'과 연관된다고 볼 수 없는가?
촛불과 아고라의 지난 두달여 경험에서 그들이 보수꼴통들처럼 과거지향도, 목적론적 역사주의자들처럼 선(線)적인 미래 지향도 아닌 '지금 여기'에서 출발해서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사람들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지금 여기'의 나아가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퓨전과 크로스오버, 글로컬라이제이션은 생리적으로 몸에 익히고 있는 사람들임도 알았다.
그리고 또 알았다.
그들 세대의 주류 문화가 탈춤의 미학적 특성들과 그대로 일치하며 현대의 자유의 진화론이나 화엄불교, 참선, 동학의 모심과 개벽사상, 나아가 첨단적 생태학과도 그대로 연속된다는 것을 화안히 알았다.
우선
혼돈, 개체성, 자유
우연성, 창발성, 돌발성, 자연스런 개체 중심의 소규모 융합, 자연생명과의 일종의 '내부공생(內部共生)' 즉 자연생명의 아픔과 아름다움을 자기 자신의 내면체험의 형태로 느낀다는 점.
쿨함, 즐거움, 감동
재미없고 멋대가리 없고 감동 없고 즐길 수 없는 것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함축성, 직접성, 속도
키워드, 키포인트, 촌철살인적인 포괄성, 자기 현실과 연결되는 직접성, 내 행동에 대한 반응이 쉽게, 빨리 들어와야 하는 속도의 중요성.
개체적 융합
현대 자유의 진화론의 특징적 원리, 개체가 먼저이고 개체가 중심이 되어 개체-개체들이 자발적으로 다양하게 우발적, 돌발적, 창발적으로 소규모·소규모 단위로 융합한다. 개체가 전제 되지 않은 공동체와 행동의 강제는 단연코 거부된다.
바스크의 몬드라곤 공동체, 이스라엘의 기브츠 공동체는 이미 쇠퇴해 버렸고 그 대신 '계(契·한국 민중의 전통적 경제 모임.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을 몰아서 만들어 주는 여러 사람의 저축)' 또는 '품앗이(옛 우리나라 농촌에서 한 농가의 농사를 온 동네가 다 들어서 돌아가면서 한꺼번에 모두 마쳐주는 일 방식)'와 또는 개체성을 토대로 한 저축조합, 민중은행, 사회적 기업의 등장의 원리가 모두 '개체-융합'이다. 촛불은 '개체-융합적인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과정이었다. 2002년 붉은 악마 때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밀실의 네트워크'니 '방콕의 연대'니 하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동학에서 모심의 뜻을 전체적인 '우주적 융합을 각자각자 자기 나름대로 깨닫고 실현한다(各知不移)'라고 하거나 불교 화엄경에서 '먼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있다(一微塵中含十方)'거나 '하나의 큰 달이 천 개의 강물 위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月印千江)' 같은 말이 이와 똑같은 말이다.
내부공생(內部共生)
현대 생물학 개념으로서 우주적 생명 공생체 사이의 내면적 융합관계를 각기 자기 개체 개체 나름으로 자기 생활의 내면에서 실현하는 것. 남조선 사상사(동학, 정역, 증산, 소태산 등등)의 개벽 실현 과정의 내용이다.
종합정보학적 집단 지성
디지털, 인터넷 세대에게서 가장 핵심 개념은 '집단 지성'인 것 같다.
지구 우주 시대에 새로운 다양한 학문 모두를 하나로 종합하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획일화와는 거리가 멀다. '스페이스 비글'이 그 실례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될 때 쏘시알-다위니즘에 연속되는 에드먼드 윌슨 류의 '통섭론'이나 누군가의 '온생명론'처럼 앞으로 다가오는 생태·생명 대혼돈의 위기 앞에 에코-파시즘으로 오도되거나 악용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집합성, 집단성의 우주적 그물과 그물의 역동을 전제하면서도 집체주의나 '통섭', 중추신경계의 통제에 의한 '온생명' 따위 망상적 우주 전체론이 아니라 그 그물코마다 수천 수만의 깨달은 보살들이 각기 다 자기 나름으로 우주 그물에 관한 영적 깨달음을 법문하는 조금의 시끄러운 직접민주주의적인 대화엄(大華嚴)에 대한 <모심>의 신(神)적 결단을 통해 실현하는 개벽 운동으로 연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쌍방향성
문예 부흥과 문화 혁명의 유기적 연관 위에서 동시 추진 가능성.
불연기연(不然其然)
'숨음·드러남(implicate order·explicate order)'과 '아니다-그렇다(no-yes)'의 교차 생성 논리로 삼진법적인 변증법의 극복 가능성.
즉흥성의 대폭 확대와 그것을 프로슈머 미학 또는 UCC 미학에 연속시키는 문제
이 모든 특징은 후반에 지적하겠거니와 탈춤의 미학적 특징들과 기이하게도 일치한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류 문화사의 거대한 대전환의 때가 왔다고밖에 더 표현하겠는가!
또한 쇠고기, 물, 의료, 교육 등 생활 가치, 생명가치, 생태 가치, 육아와 교육과 성장과 같은 생명론이 전면에 나서고 있는 점에서 바로 민중의 구체적 삶을 표현하는 탈춤, 마당굿, 판소리, 민요 등의 민중예술의 생명 미학과 일치한다.
'미래파'의 검은 혼돈은 불교적 정신주의 시와 예술들, 그리고 생태시, 생명시와 생명 예술들의 '공(空), 무(無), 허(虛)의 텍스트 개입'과 '모순 어법(no-yes, yes-no, on-off, off-on)'에 의한 혼돈적 질서의 압축 표현으로 새로운 질서 즉 '혼돈적 질서(Chaosmos, 渾元之一氣, 呂律, 八呂四律)' 즉 '흰 그늘'의 숭고와 심오의 지극한 예술의 차원으로 현현, 개시(開始)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한(미래파의 혼돈), 추와 질병의 미학, '모심의 참선'을 통한 신명의 드러남으로 대응하는 굿이 요청된다.
소년성, 청년성, 여성성, 영성의 강화가 필요하다.
촛불의 주체는 소년, 청년, 여성, 그리고 쓸쓸한 대중(비정규직 암시)이다. 해월 동학은 개벽의 주체를 소년, 청년, 여성에 둔다. 특히 여성은 후천개벽시대의 도인(道人)이라고까지 부르며 살림의 원리인 내측(內側), 아이를 배고 태교(胎敎)하고 출산해서 육아(育兒)하는 전 과정의 가르침인 내수도문(內修道門)을 사실상 최고의 생활적 경전으로 드높였다.
동·서양 고전 경전들, 성경 등은 지난 역사 시대에 내란이나 전쟁이 날 때에 맨 먼저 보호해야할 대상을 어린이와 여성으로 공통되게 강조해왔다.
바로 그 어린이, 청소년, 여성이 먹을거리, 물, 교육, 환경 등 생활 가치를 들고 직접 민주주의 전선에 나섰다. 그것도 평화 행동으로!
시대는 바뀐 것이다.
죽임과 전쟁 시대는 이미 갔으며 생명과 평화 시대가 왔다는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탈춤을 계급 갈등과 투쟁의 텍스트로서 순 정치적으로만 파악하려 했던 과거의 그 어두운 시절 내내 우리 채희완 교수가 끈질기게 주장해 왔던 여성성, 생활성, 생명성을 탈춤의 중심 가치로, 마당굿의 이월 가치로 분명히 재정립하며 '미얄 할미의 죽음'의 마당이 가린 그 슬픔과 아름다움, 그 삶과 죽음의 '아니다-그렇다'의 혼돈적 질서의 아름다움, 그 낡은 가족제도나 가부장 남성 중심주의와 여성의 고통, 의술이나 무속의 옛 생명학과의 관계 등을 새 마당굿은 다시금 새롭게 앞세워야 할 것이다.
더욱이 한 불쌍한 여성의 죽음 뒤에 그 마당 마지막에 울리는 도사 '남강노인'의 한마디,
'동창이 밝아온다.
아이들아 일어서라!'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예언인가?
내가 7월 4일 밤 스님들의 법회 뒤 시청 앞에 서서 청년 남녀들의 끝없는 촛불 행렬과 '아침이슬' 노래를 들으며 나는 바로 이 '동창과 아이들' 구절을 입으로 달싹거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촛불은 참 탈춤의 연장이었으며 또한 이제부터의 새 마당굿은 참 촛불의 연장인 것이다.
최수운, 최해월, 김일부, 강증산, 소태산 박중빈의 여성과 어린이, 청소년 주체에 의한 쓸쓸한 대중과 상처받은 생명체 전체의 개벽사상은 의당 18세기, 19세기 태생의 탈춤의 기본 내용이거니와 이 모든 남조선 사상사와 굿의 시작은 1만 4천 년 전 파미르 고원 마고성의 여신 마고의 우주 법칙, '팔려사율(八呂四律)'에 있었으니 '여덟이 여성성, 소년성, 청년성과 혼돈성이요 '쓸쓸함'이라면 옛것이 남성성, 장년성, 노년성과 질서요 이성이요 꽉 참이었다.
마당굿은 이 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현대의 요청이요 네오-르네상스의 요건이기 때문이다.
바로 촛불 아닌가!
한국 현대 예술은 '비트(심장 중심의 박동)'과 '장단(들숨 날숨의 우주적 호흡)'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간보(井間譜)를 철저히 재검토해야 한다. 고대 천부경(天符經)의 핵심인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人中天地一)'는 원리에 토대를 두고 중국 고대 이래 주역(周易)적 음악론인 '율려(律呂)'와 그 전복적 음악론인 '여율(呂律)' 사이에서 바로 이같은 '팔려사율(八呂四律)'의 '혼돈적 질서'로 그 남성적 질서와 여성적 혼돈 사이의 '기우뚱한 균형'을 결단해나가야 할 것이다. 비트와 장단 문제는 음악만이 아니고 일체의 퓨전, 크로스 오버, 글로칼리제이션의 문제이며 마당굿의 템포 문제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더욱 그렇다.
여성성, 모성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무서운 어머니와 자애로운 어머니다. 문제는 '여성 중심의 남녀 평등' 즉 '팔려사율'이 현실화하려면 '자비로운 어머니를 향한 여성운동'과 '평화로운 젠더 전환을 위한 남성들의 협력'의 결합이 요청된다.
미얄과 영감뿐 아니라 취바리와 아이와 소무(小巫), 오입장이와 숱한 소무들, 들머리집 등 유랑하는 쓸쓸한 밑바닥 여성들, 이러한 캐릭터들이 현대적 인물로 다시 태어남에 있어 그 '기우뚱한 균형'의 원리로서 연행 실제에서 반영되어야 할 터이다.
탈춤 전체에 일관하는 '아니다-그렇다', '숨음과 드러남', '닫힘과 열림', 이외에도 3축으로서의 천지인(天地人)의 원리와 2축으로서의 음양(陰陽)의 원리, 그리고 그 통합과 상호 견제의 갈등 및 화해 등을 통해 성취되는 '우주적이면서 개체적인 <한>의 원리'가 자각적으로 명백하게 표현되어야 할 터이다.
들뢰즈의 '3축-2축론(철학적 사유, 과학적 검증, 예술적 관조의 결합과 철학에 대한 비철학, 과학에 대한 비과학, 예술에 대한 비예술의 상호 부정적 생성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의해 성취되는 '카오스 문화(사실은 '한'이라는 이름의 혼돈적 질서, 또는 팔려사율의 여율에 의한 카오스모스 문화)' 역시 이 과정에 비교 활동 되어야 할 터이다.
뿐아니라 극구성과정에서도 동학의 '포접(抱接)' 원리의 해석이 반영되었으면 한다. 포는 최치원의 풍류(생명의 사상 문화) 해설에서 포함삼교(包合三敎)'이니 유교, 불교, 선교의 '도덕과 화엄적 우주와 생활적 생명법'을 서로 조직함이 없이 하나로 담는 '소쿠리(包)'로, 접(接)은 '접화군생(接化群生)'이니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막론하고 모두 우주의 공동 주체로서 모시고 사랑해서 감화, 진화, 조화시키는 것'이니 생활하는 민중이 그 때 그 때 부딛쳐 그 생명 가치를 살려내는 '품앗이(接·이미 설명했음)'일 것이다.
옛 농민들이 '소쿠리 메고 품앗이 간다'라고 말했듯이 새 마당굿과 모든 예술들이 바로 포접 원리를 창작 미학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인지?
여기에 부연하여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의 응원 문화 가운데서 나타난 초점도 이야기해야겠다.
'대~한민국' '짝짝 짝 짝짝' 이 연호는 분명 '불림과 장단의 배합'인데 앞의 3분박('대'에서 '한'까지 길게 끌어 3분박이 되고 뒤의 2분박 '민국'은 그대로 붙여 2분박)으로 전체가 '5분박', 즉 '엇박'이 되어서 전통적 구조로 볼 때에는 역동성, 이동성, 남성성과 균형, 정착, 여성성의 결합으로 '혼돈적 질서'가 성취되었고 뒤의 장단인 '짝짝짝 짝짝'도 그 원리대로다.
문학의 음보를 포함해서 우리 민족 예술의 기본 박자는 그 기본이 '3+2'의 '엇' 아니 곧 '혼돈의 질서로서의 한'이다.
이것은 탈춤에서도 관통된다.
최근 미래파 신드롬은 이 엇박의 전통을 해체하고 박자도 음보도 음악도 없는 완전 '줄글'을 만들었다. 줄글의 무정부 상태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도 개칠해 버리고 있다.
이것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어떻게?
고대 '천부경(天符經)'에는 '셋과 넷이 고리를 이루어 다섯과 일곱이 한을 이룬다(三四成環五七一) 말이 있다. 3음보 4음보를 없애 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고리, 또는 반지를 심화, 확장하여 마치 김소월(金素月)처럼 5.7 또는 7.5조의 '서글픈 흥(興)'으로, 거기서 다시 고리, 반지 즉 '혼돈적 질서'(동학의 至氣運元之一氣 · 弓弓太極)의 이른바 '한'의 세계로 확대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물론 시학적 원리를 '활동하는 무(無)'에 두어야 한다. 나의 '못난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3+2 박자의 이 '엇'의 기초가 이같이 여러 가지 양식으로, 천원으로, 흐름으로 '복잡화(complification· '氣化')'하면서 카오스모스(혼돈적 질서) 문화를 형성하면서 '율려와 여율' 사이의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텍스트나 극 구조에 대한 공(空)의 개입, 끊임없는 복잡한 모순이 법으로 주어진 현실적 혼돈으로부터 그 혼돈을 빠져나가는 혼돈 그 나름의 독특한 질서를 찾아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다름 아닌 '마당과 판으로 이루어지는 굿' 즉 '마당굿'인 것이다.
이것은 문명의 비전까지도 압축한다. 현대 세계는 도시적 유목 이동 문명과 농촌적 농업 정착 문명 사이의 이중 복합 문명의 성립을 갈망하고 있다.
2002년 붉은 악마는 도깨비로고의 치우(蚩尤)신화를 앞에 내세움으로써 4500년 전 고조선 이전 아시아 부족연맹체 배달국의 제14대 천왕 치우가 유목을 청산하고 농경만으로 유일 체제화하려는 중국 화하족(華夏族)의 황제(黃帝)와 74회의 피투성이 문명전쟁을 통해 유목과 농경의 복합문명을 세우고자 한 옛 역사를 통해 현대 세계의 새로운 이동-정착의 이중적 문명복합에 대한 집단 예언을 행하였다.
황제(黃帝)가 창제한 것이 '율려'다. 여기에 대한 1만 4천 년 전 마고성 나름의 우주율이 '팔려사율(혼돈적 질서)'의 '여율'인 것이다. 이것이 1879~1885년 한반도 남쪽에서 정역(正易)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것은 새 마당굿과 한국 여러 예술이 앞으로 위기의 문명 복합 시대에 있어 반드시 유의해야 할 중요한 예술, 우주 생명 예술의 최고 미학적 원리로 될 것이다.
서양에서 현대 우주음악으로 유명한 스톡하우젠은 서양 전통의 엄정한 율격으로 이름난 바하와 현대 카오스 민중 문화의 대표 주자인 비틀스를 결합하였다.
놀라 입만 벌리고 있을 일은 아니다.
얼마 전 중국에 있는 서태지는 '미스테리 프로젝트'로 우주 환상적인 미스터리 마켓팅을 전개한 뒤에 곧 귀국하여 콘서트를 연다고 한다. 그가 무슨 음악을 내놓을 것인지 젊은 세대와 예술계는 잔뜩 흥분하고 있다.
특히나 촛불이 타고 있고 포스트 한류가 새 방향을 찾고 있는 지금이다.
서태지는 자기의 홈페이지 메시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태고의 소리 위에 나의 소리를 살짝 얹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태고의 소리'란 그가 중국에서 배웠을 것이 틀림없는 중국 전통 우주 음악의 율려일 것이다.
그 율려 위에 제 소리를 살짝 얹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겸손한 표현이긴 하나 그의 음악적 과거는 비틀즈와 그리 다르지 않은 카오스 문화다. 그가 율려라는 동양의 엄격한 우주 음악 위에 살짝 얹겠다는 그 자신의 음악, 그의 과거에 연속되는 혼돈 음악, 그의 동시대인 촛불의 이미지 자체인 어린이, 청소년, 여성, 비폭력 정치 행동인 생명의 평화, 혼돈의 질서로서의 음악일 것이 분명하니 다름 아닌 '여율'일 수밖에 없겠다.
고종석은 김소월을 한국 현대시의 아직도 강력한 정부로서 드높이 평가하는 '모국어의 속살'에서 소월의 7.5조가 전통 정형시의 3.4음보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제 나름대로 '살짝 구부린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바로 이것이 '여율'의 첫 시작이다.
즉 '율려 위에 그 전복적 반영인 여율을 얹겠다'는 말이다.
주역은 이 같은 경우를 두고 다음과 같은 괘사(卦辭)를 보여준다.
'황상원길 문제내야(黃裳元吉 文在內也)'
'누른 치마를 입으면 으뜸으로 길하니 그 깊은 무늬가 안에 들어 있다.'란 뜻이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율려의 중심음인 황종률(黃鐘律)은 건괘(乾卦)이니 하늘이다.
그러나 여율에 해당하는 이월춘분(二月春分)은 곤괘(坤卦)이니 땅이다.
'황상원길 문재내야'는 곤괘의 괘사다.
무슨 뜻인가?
'땅인 재상(협종)이 하늘인 임금(황종)의 누런 곤룡포를 입고 천자 자리에 앉아 천하를 통치하면 으뜸으로 길하다. 그 때 우주와 생명의 비밀인 무늬가 안에서 움직인다'는 뜻이다.
여율 또는 협종이 율려 또는 황종의 위치에 '살짝 타고 앉으면 더없이 길조다'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그 때 우주와 생명의 비밀이 그 과정 안에서 약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인 것이다.
촛불과 함께 바로 이때에 한국 고유의 '혼돈적 질서(동학의 지극한 기운· 至氣)'가 약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새 마당굿은 이때 이 원리, 이 시작의 시점에서 어떤 구체적 작업을 해야할 것인가?
탈춤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춤사위가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서로 엇섞이기도 하며 공존하고 있다.
양반, 노장스님 등 지배적 위치에 있는 인물들의 '중공춤' '상체와 머리 중심의 너울너울 춤', '학춤', 나래 춤', '솔개 춤'이 그것이다. 말뚝이, 취발이, 소무, 미얄 따위 아랫것들, 즉 초라한 민중이 추는 춤은 두 다리와 사타구니와 회음과 하단전, 아랫배 중심의 '당실당실 춤', '비정비팔(非丁非八)춤', '오무린 것도 벌린 것도 아닌 끊임없이 약동하는 춤'이다.
노동과 생식과 배설과 끝없는 다리 움직임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춤이고 학춤, 나래춤은 반대로 우주의 춤이다.
상체 춤의 미학 원리는 '사(事)'요 하체춤의 미학 원리는 '동사(同事)'다.
중국 고전인 '예기(禮記)'에 의하면 '사'는 '민중의 바람 비(民衆風雨)'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땅 위의 인간이 하늘 위의 우주의 온갖 변화를 모방한다는 뜻이다. '사(事)'는 숭배요 모방이니 표현이 아닌 묘사다. 자연주의에 가깝다. 춤 출 때 양반, 노장의 손과 팔이 어깨 높이 밑으로 내려오지 않고 거룩하게 너울너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면 '동사(同事)'는 무엇일까?
수운 동학의 가장 중요한 사상 내용이 결집돼 있는 본주문(本呪文) 해설 속에서 맨 먼저 '한울님을 모심(侍天主)'을 수운선생 자신이 설명하되 '모심이란 것은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운화함이 있으며 한 세상 사람이 근원적인 우주 융합의 전체성을 개체개체가 각각 자기 나름대로 알아서 나름대로 실천한다(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主人 各知不移者也)'고 하고 나서 막상 가장 중요한 '한울(天)'은 한마디로 설명하지 않은 채 공(空), 무(無), 허(虛), 즉 '빈터'로 놔두고 그냥 '님(主)'으로 넘어 가는데 바로 그 '님'이 설명에서 '님이라는 것은 높이 호칭하여 부르되 부모님과 더불어 친구처럼 함께 일하는 것(主者 稱其尊而 如父母同事者也)'이라고 했다.
'부모님과 더불어'는 '부모님처럼 높이 섬기면서도 친하듯이'이고 '함께 일한다'는 '거리를 두고 섬기면서도 동시에 친구처럼 가까이서 함께 일한다'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첫째, '거리를 두어 섬기면서(事) 동시에 가까이 사귀어 함께 일하는(同事) 친구'라는 점이다.
'사'는 부모나 스승을 거리를 두고 섬기는 것이고 '동사'는 존경하면서도 함게 하나되기로 같은 일을 하는 친구처럼 사귐이다.
동사(同事) 안에 '사'와 '동사'가 함께 함축되어 있다.
'동사'는 창조, 노동, 생식, 생산, 생활의 파트너십을 전제한 인간과 한울의 관계이니 육체를 통한 한울님과의 생명 연관의 표현의 활동이고 '사'는 허공 우주의 풍우를 보고 섬기고 모방하는 '묘사'의 예절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 간의 생명 약동의 동사이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영적 숭배의 예절로서 '사'이니 인간의 생활적 공공성 안에 우주적 공공성이 압축되어 있다 하겠다.
탈춤은 바로 춤 안에 우주 사회적 공공성, 영적 생명, 생태적 생활 운동을 담고 있으니 새 마당굿은 바로 이 같은 두 가지의 춤의 미학 연관을 통해서 현대인에게 가장 요청되는 '우주사회적 공공성' 또는 천하공심(天下公心)을 제안에 포함한 '천지공심(天地公心)'을 드러내고 강조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탈춤의 두 가지 춤의 연관적
계승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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