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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길인들 왜 못 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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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길인들 왜 못 가랴

강제윤의 '섬을 걷다' <24ㆍ끝> 생일도

(필자 주 : 프레시안 연재 1회 때 처음 갔던 섬이 완도군 덕우도 였습니다. 2회부터는 다른 섬들로 건너뛰었지만 실상 덕우도를 떠나 나그네가 도착한 섬은 생일도라는 섬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마저 할 때가 온 듯합니다).

각시여, 서방여, 그 슬픈 여들

덕우도를 출항한 배가 30분 만에 생일도 용출리 부두에 기항한다. 내리는 사람은 나그네 혼자 뿐, 부두는 한적하다. 여객선은 다시 완도항으로 떠나고 나그네는 또 낯선 섬에 홀로 남겨졌다. 용출 마을 앞바다에는 전설이 깃든 두개의 무인도가 있다. 대용랑도와 소용랑도. 저 섬들 사이로 용이 승천 하던 날이 오늘 같았을까. 한번 승천한 용은 돌아오지 않고 용의 자취는 마을 이름으로만 남았다. 오후 늦게 폭풍주의보가 내릴 것이라 했다. 바람이 갈수록 거세진다. 햇빛은 바람 센 날일수록 눈부시다. 용이 떠난 바닷가. 암초에 부딪치는 포말들이 용트림한다.

오래 전 섬이란 대개 피난민의 땅이었다. 전란을 피하거나 뭍에서 도망쳐 나와 숨어 살던 은자들의 처소. 소용랑도 옆의 저 여는 무슨 여일까. 여는 물의 들고 남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암초다. 장어 모양처럼 기다란 장어여, 미역이 많이 나는 미역여 등이야 그저 묵묵할 뿐이지만, 이런 날이면 유독 서럽게 우는 여들이 따로 있다. 각시여와 서방여, 부부여, 슬픈여들.
▲ 생일도 잣밤나무 군락ⓒ강제윤

사람 사는 섬 마을 바다에는 의례 그런 이름의 여가 한 둘은 있기 마련이다. 마을 앞에 작은 바위섬이 있었다. 부부가 배를 타고 나가 각시를 섬에 내려주면 각시는 전복, 해삼, 소라, 미역 등을 채취했다. 서방은 잠시 노를 저어 근처 다른 섬에 일을 보러 떠났다. 여러 시각이 지나서 서방이 돌아오니 섬도 각시도 흔적조차 없다. 서방은 통곡을 하지만 삶은 이미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뭍에 살다 섬에 온 이들에게 바다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겠지. 여가 물때에 따라 물 위로 오르기도 하고 물속으로 잠기기도 하는 암초라는 사실을 몰랐겠지. 그렇게 바다가 각시를 삼키고 서방을 삼켰다. 때때로 부부를 함께 삼키기도 했다.

서럽게 죽은 각시는 신이 되고

바다는 깊은 바다보다 얕은 바다가 무섭다. 뱃사람들에게도 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각시가 죽은 뒤 자꾸 그 여 근처만 지나면 배들이 난파당했다. 뱃사람들 꿈에 원통하게 죽은 각시가 나타나 하소연 했다. 뱃사람들은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 각시의 영혼을 아주 당집으로 모시기도 했다. 그러면 각시는 바다의 수호신이 되어 섬과 바닷길의 수호신이 됐다.
▲ 용출리 선창가ⓒ강제윤

햇살 쏟아지는 바다가 황금빛으로 눈부시다. 언제나 바다는 사람의 생사 따위에는 무심하다. 오늘 생일도 앞 바다는 전복 가두리 양식장과 해초 양식장 부표들로 빈틈이 없다. 황금 알을 낳는 전복들. 소득이 높아지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섬에서도 부의 편중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노동력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은 점점 부유해지고 노동력을 잃은 노인들은 극한 빈곤에 시달린다.

길은 나그네도 굶기는 법이 없다

생일면 소재지인 서성리까지는 시오리 길을 가야 한다. 해안 도로를 따라 걷는다. 생일도의 산에는 상록수 원시림이 많이 남아 있다. 길을 따라 잣밤나무 군락이 한동안 이어진다. 뱃속이 출출하다. 도로에 떨어진 잣밤 열매를 주어 먹으며 허기를 채운다. 잣밤 열매는 도토리 알갱이보다 작지만 맛은 잣과 밤을 섞어 놓은 것처럼 고소하다. 길은 나그네도 굶기는 법이 없다. 도로변 산기슭에 기와집 한 채가 서있다. 제각일까. 여기도 경모재(敬慕齋)라는 현판이 걸렸다. 덕우도에서의 궁금증이 이렇게 풀린다. 경모재는 조상신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 용의 승천 전설이 깃든 용출리 앞바다 무인도ⓒ강제윤

경모재 앞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 우리가 생의 어느 순간인들 다시 돌아 갈 수 있겠는가. 배를 타고, 걷고, 숨 쉬는 지금이 늘 생애의 마지막 순간임을 잊지 않는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대면하는 존재들, 어느 하나 소중 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 사람들, 개와 고양이와 산새들, 햇빛과 바람과 구름과 나무와 풀들, 모두가 고맙다. 지금 여기의 존재가 눈물겨우니 두고 온 이들이 또한 그립다. 가던 길 멈추고 오늘은 바다 건너 그리운 이들의 안부를 묻는다. 햇살의 길을 따라 편지를 보낸다.

광섬유 신경올을 통과하는 말들이라면
햇살의 길인들 왜 못 가랴
나는, 화창한 봄날 뜰 한 모퉁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네게 텔레파시의 신호음 보낸다
세 번만 벨이 울리거든
마음의 기미를 듣고서 내게 응답해다오
햇님의 통화로 땅 깨어나듯
시듦 없는 사랑은 먼 숨결로도
애송지마다의 새싹 촉촉이 적셔놓는다
발 없는 마음에도 말씀의 날개 달아맨다
나무는 나무끼리, 꽃들은 꽃들끼리
어느 것도 서로의 기미에 응답 않는 기적이란 없다
잠시 전 바람결로도 이미
수많은 파장 건너갔으므로
일손 놓고 바라보면 앞산 수풀조차
빗살무늬로 파랑이지 않느냐
< 김명인 '통화'>




▲ 전복, 다시마, 미역 등의 양식장으로 바다 밭이 빼곡하다ⓒ강제윤

(* 지난 6개월 동안 프레시안에 섬 기행을 연재 했습니다. 이번 주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프레시안 지면을 떠나지만 나그네는 여전히 섬을 걸을 것입니다. 그동안 귀한 공간을 내주신 프레시안과 모자란 글을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섬 소식은 나그네의 블로그(http://blog.naver.com/bogilnara)에 오시면 계속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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