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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에서 중세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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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에서 중세의 문제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13>

중세 시대 구분 오류가 가지고 온 비극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세 시대로 나누어 생각하는 데 매우 익숙해 있다. 내 스스로도 별 깊은 생각 없이 그렇게 하고 있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곤 하는데,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일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시대를 구분하는 데 정치만 가지고 할 수도 없고, 경제만 가지고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사회만 가지고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정치, 경제에서부터 문화, 예술까지 어떻게 일괄적으로 모든 부면이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 갈 수 있을까? 뿐만 아니다. 힘 있고 돈 있는 자와 힘 없고 돈 없는 자가 엄연히 따로 있을 텐데, 그들이 한꺼번에 같이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간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닐까? 더군다나 인도 같이 그 큰 땅 덩어리가 일괄적으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갔다고 보는 것은 더군다나 비논리적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했을까? 역사를 생각하기 쉽고, 가르치기 쉬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습성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목요연한 역사, 체계적인 역사, 균질적인 역사에 오랫동안 물들어 있었던 터라 그런 타인의 시선에서 빠져나오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내 경우에는 역사를 가르칠 때 가장 큰 중점을 두는 것이 있다면, 사회 변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은 사회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보기도 하고 보다 큰 사회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보기도 한다. 작고 큰 여러 가지 변화에는 1987년 체제의 등장, IMF 외환위기와 같은 한국 사회에 관한 것도 있겠고 보다 지구적인 현상인 소련의 몰락, WTO 체제의 등장, 인터넷의 등장과 같은 것도 있다.

역사의 시대를 셋으로 나누는 구분이 갖는 문제는 단연 '중세'에 있다. '중세'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아시아는 왜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을까, 왜 유럽이 아시아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과 맞물려 있다. 그 물음에 대해 유럽은 중세라는 단계를 거쳐 근대를 이룰 수 있었고, 아시아는 중세라는 것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가 정체되어 결국 주체적으로 근대를 이룰 수가 없게 되었으며 그러했기 때문에 유럽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대답이 나온다.

그런데 이 이론의 근간은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시대 구분론이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아시아의 역사가 그렇게 정체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군주의 힘이 너무 막강하다는 데에 있었고, 그래서 그 안에서 인민들이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인해서였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사실로 인하여 아시아는 필연적으로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귀결되어 버렸고 결국에는 역설적이게도 제국주의의 대척점에 선 마르크스주의가 제국주의를 역사적으로 추인해 준 셈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마르크스주의자 안에서 패가 둘로 나뉘어 버렸다. 한 패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이론을 신봉하는 쪽으로 중세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과 또 한 쪽은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을 가지고 분석을 해보면 유럽의 중세 봉건 사회와는 다르지만 큰 맥락에서 보면 동일한 의미를 갖는 나름의 중세 봉건 사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사도 그렇고, 중국사도 그렇고, 인도사도 그렇다. 모두 이 두 쪽의 의견이 대립되어 있는데, 둘 다 마르크스 진영에 속해 있다. 여기에 인도사의 경우 또 하나의 문제가 겹쳐 있다. 시대 구분이 종교와 밀접하게 연계되고 그러다 보니 시대 구분에 관한 역사학이 현실 정치의 이데올로기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인도사는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 진정한 의미의 역사 연구가 유럽 역사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모든 경우에서 그렇듯이 처음 연구를 한 사람의 후세에 대한 영향은 실로 막강한데, 처음으로 인도사를 연구한 제임스 밀(James Mill)이 인도사를 힌두 문명, 무슬림 문명, 영국 문명의 세 시대로 구분하여 버렸다. 통치자들의 종교를 기준으로 인도의 역사를 세 개의 시대로 구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자세히 보면 꼭 일관되게 종교를 기준으로 한 것도 아니다. 고대와 중세는 종교를 기준으로 했고, 막상 근대는 종교가 아닌 즉 기독교 문명이 아닌 영국 문명이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 해석에 실패한 것이 아니고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역사 왜곡을 시도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제임스 밀은 영국이 들어오기 이전의 인도의 문화 즉 인도인의 종교, 정부 형태, 법률 제도, 사회 제도 등 모든 것을 야만적이라 했다. 그는 인도 사회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된 사회의 영속성은 전제 군주 아래에서 계속된 사회의 폐쇄성 때문이라고 했다. 제임스 밀의 이러한 시대 구분에 의해 인도는 정체 사회가 되었고, 결국 그 위에서 제국주의 통치가 정당화되었다.

제임스 밀이 한 통치자 종교를 기준으로 한 시대 구분의 영향은 매우 심각하였다. 그의 이러한 삼단 구분은 인도사의 고대, 중세, 근대의 구분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정이 없이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대부분의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와 교사들은 고대사를 무슬림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로 구분하고, 중세사를 영국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그런데 그 이론이 한심한 것은 - 백 번 천 번 다 양보해서 즉 통치자의 종교를 기준으로 시대 구분을 한다 하더라도 - 인도 전역의 역사는 그 통치자의 종교에 따라 일괄적으로 시대 구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소위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 통치자가 된 왕조가 인도아대륙의 통치를 시작한 연대는 각 지역에 따라 아주 다르다는 사실이다.

아랍계 무슬림이 신드 지역을 점령하여 그들의 통치를 시작하였던 시기는 8세기였지만 그 정치체가 끼친 영향의 지리적 범역은 인도 전역의 5%도 못 되는 수준이었다. 즉, 8세기에는 인도아대륙의 대부분 사람들은 무슬림이 이 땅에 들어왔는지 여부조차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이후 11세기가 되면서 투르크계 무슬림이 뻔잡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무슬림 군주가 북부 인도 전역에 느슨하게나마 통치권을 확립하게 된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데칸 지역에 무슬림 세력이 확립된 것은 14세기였고, 인도아대륙의 최남단 지역에 그들의 지배가 이루어진 것은 16세기 이후에서였다. 뿐만 아니다. 라자스탄과 같은 서부의 몇몇 지역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인도 지역은 지금까지 한 번도 무슬림의 통치를 받아본 적이 없다. 인도의 역사적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 인도의 무슬림 통치가 8세기부터 시작되었고, 그래서 인도의 중세가 8세기부터 이루어진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역사의 이해는 논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시대 구분에 익숙해 있는 교육 환경에서 특별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이론이 잘못 되었으니 이 이론을 페기 처분하라고 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교육의 현장에서는 시대 구분에 이미 익숙해 있기 때문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그 이론이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역사의 시대 구분에서 대안을 제시하기는 무척 어렵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보더라도 지역마다 사회 변화의 정도가 달라 시대 변화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기 문명 도래 이후 역사의 발전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 갠지스 강 중류 유역과 최남단 혹은 동부 오지가 같은 범주로 일괄 처리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중고등 학교 학생들에게 각 지역마다 다른 중세의 변화를 다 가르칠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의 교육은 여전히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중세 = 무슬림 통치'의 공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무슬림 시대' 혹은 '무슬림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무슬림이 통치자로 있을 때도 그들은 백성들을 무슬림으로 개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카스트가 사회 질서의 유지에 꼭 필요한 것이라 판단하여 브라만을 적극 지원할 정도였다. 다만, 이슬람의 원리에 따라 - 그들은 같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은 지역, 국적, 인종에 관계없이 다 형제로 여긴다 -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주민세를 면제해 주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왜곡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역사적 사실을 제임스 밀 이후 많은 유럽의 역사학자들이 공공연하게 왜곡을 했다. 많은 유럽의 인도사가들은 무슬림 통치자들이 힌두 문명을 파괴하고, 힌두교를 탄압하면서 강제로 개종을 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코란을'이라는 정체불명의 언사가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버젓이 횡행했다. 그래서 그들의 탄압에 못 이겨 힌두들이 카스트를 더욱 굳게 폐쇄하고, 그러다 보니 카스트의 위계가 더욱 엄격해졌고, 같은 맥락에서 조혼이나 사띠(즉, 남편이 죽어 화장을 할 때 아내도 함께 화장을 하는 풍습)같은 힌두 문화의 나쁜 관습이 더욱 굳건해졌다는 것이다. 모두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악마 만들기라는 역사 왜곡은 유럽인의 침략 전쟁인 '십자군' 전쟁 이후 본격화 되었다.

이러한 힌두 악습의 원인을 무슬림에게로 전가시키는 일은 암소 숭배와 채식주의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힌두에게 암소가 어머니로 존재한다는 것과 암소가 오랫동안 그들의 음식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는 엄연한 별개의 역사적 진실이다. 그럼에도 보통의 인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것은 무슬림이 이 땅에 들어와 힌두를 핍박하였다고 하는 왜곡된 역사에 보통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암소 숭배와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무슨 힌두교 제1의 정체성인 것 마냥 생각하고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도전은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왔다. 델리대학교 사학과의 역사학자 자(D.N.Jha)가 힌두교 제1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베다가 편찬되던 때 쇠고기는 브라만들에게도 좋은 음식이었고 그 쇠고기를 먹는 관습은 18세기까지도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방대한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분명하고 단호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몇몇 우익 정치인들과 힌두교와 자이나교 광신도 집단들은 그 책을 신성 모독으로 매도하고 법원으로부터 판매 금지 처분을 확보하였다. 나아가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저자에게 사형 선고를 언도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영국에서 출판될 수밖에 없었다.
▲ 인도에서 쇠고기는 실로 오랫동안 음식으로 먹어 왔다는 사실은 엄연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사적으로 밝힌 학자는 테러의 대상이 된다.

자, 그러면 보다 본질적인 문제인 인도사에서 중세는 있는지, 있다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중세를 봉건 사회가 형성된 시기라고 한다면, 문제는 인도사에서 봉건 사회가 형성되었느냐의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봉건 사회를 폐쇄적인 농업 경제 체제, 군주와 영주와의 쌍무 관계, 영주가 광범위한 경찰권, 사법권, 징세권을 갖는 봉토의 존재, 여러 가지의 제약을 당하는 농노의 존재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사회는 필히 각 지역에 시장이 형성되고 나아가 중세 도시가 성립하여 결국 근대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아시아에서는 근대가 형성되지 못했고 그 이유는 봉건 사회가 없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를 역으로 하지 말고 앞에서부터 차근차근히 생각해 보면 시야가 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인도 고대는 (앞 장에서 이야기 했듯이,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5세기 즉 굽따 말기부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서 토지 하사와 폐쇄 경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사법권과 징세권을 갖는 브라만 혹은 사원이 광범위하게 등장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군주와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쌍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권력 분점과 폐쇄 경제는 존재하지만, 그 토지를 봉토라 하거나, 그 브라만이나 사원을 영주 혹은 봉신이라 하거나 나아가 그 사회를 유럽에서와 동일한 봉건 사회라 한다거나 하는 문제는 해석하는 역사학자의 시각에 따라 달리질 수 있다.

문제는 -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 할 부분은 - 인도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변화해 왔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통치자의 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를 봉건 사회라고 해서 중세가 있다고 하든, 봉건 사회가 아니라고 해서 중세가 없다고 하든 관계없이 인도 사회는 근대 이전까지 꾸준한 사회 변화를 해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변화의 속도나 탄력성이 유럽의 경우와 같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갈 만큼인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런데도 인도는 변하지 않은 영원한 본질을 가진 땅, 시간이 멈춘 곳 등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철저하게 자기 주관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몰역사적 사고의 결과다.

인도를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러한 착각에 깊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일수록 힌두 문화에 대한 사랑은 과도할 정도로 과장되거나 착각하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혐오는 소름 끼칠 정도로 끔찍하다. 그들에게 무슬림은 인류의 정신적 보고를 파괴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암흑기이고, 그로 인해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인도가 갖는 비극의 모든 화근은 이슬람 통치로 돌아가고, 급기야는 나라가 둘로 분단되고 그 과정에서 셀 수 없는 학살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도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테러와 보복 학살이 수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인도사의 중세가 이슬람 문명기라고 규정한 제임스 밀의 역사적 판단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될 줄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역사에 대한 몰이해 내지는 왜곡을 통한 '악마 만들기'는 반공주의에서 잘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반공주의의 가장 피해자이자 그 상징이랄 수 있는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 이후로 10년이 흘렀으니 이제 그것은 크게 쇠퇴하였거나 효력이 그리 심각하게 작동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일리가 잇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공주의는 이제 정치의 영역에서 우리 주변의 일상으로 확산되어 있다. 반공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사회 구성원들의 뇌리에 주입되어 오다 보니 이미 한 개인의 정서의 일부분으로 체화되어 있다. 어린 십대들이 들기 시작하여 국민의 80% 이상이 찬동하고 있는 촛불까지도 '빨갱이'나 국가 안보론과 연결시키는 보수 집단의 행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런 시도가 상당수의 시민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안에 반공주의가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이제 획일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는 권력의 기제가 되어 우뚝 서 있다.
▲ "친북 좌파가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그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정치 행태를 했는지, 그로 인해 우리가 안고 있는 손실이 얼마나 큰지는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불을 보듯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몇몇 펜대 굴리는 사람들에 의해 조작되면 그 영향력은 상상 외로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인식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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