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기자는 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던 김영삼 정부 때부터 북한의 핵실험과 2.13 합의가 있던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북핵문제에 있어 한국은 '중재자'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세 번째 글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이야기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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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에게 대선 승리 직후부터 주어진 최대의 과제는 북핵문제였다. 제2차 북핵 위기가 표면화된 이후 부시 정부는 북한에 대한 강경자세를 더욱더 강화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 정부의 당국자들은 북한에 대한 정치, 경제적 압박을 강화해 북한이 경제 붕괴 상황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맞춤형 봉쇄'를 추진하겠다며 북한을 압박하는가 하면, 미국은 이라크와 북한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며 북한에 대한 군사대응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또, 미 태평양사령부는 한반도 주변의 군사력 증강을 국방부에 요청해 괌에 24대의 폭격기가 추가로 배치되고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한반도 근해에 배치되는 등 군사적 긴장도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작심한 듯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제동을 거는 발언들을 계속해 나갔다. 노 대통령은 미국에서 '맞춤형 봉쇄' 정책이 언급되자 '맞춤형 봉쇄' 정책이 효과가 있는 수단인지 회의적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는가 하면,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 가능성은 검토 자체를 반대하며 유엔을 통한 대북제재에도 반대한다는 등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2003년 3월 2일 북한 전투기 4대가 미군 정찰기에 근접한 사건이 발생하자, 노 대통령은 '사전에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며 '미국 측에 너무 앞서 나가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다고 말해 참모진의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이런 대미 강경 발언은 3월 중순을 고비로 자취를 감추는데, 이는 한미 정상 간의 통화에서 부시 미 대통령이 '미국의 정책기조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라는 발언을 하는 등 미국내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시기 노무현 대통령의 강력한 대미 견제는 미국의 대북 강경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의 신임 대통령이 강력히 반대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군사적 옵션을 포함한 대북 강경책을 밀어붙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이 북핵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미국의 대북강경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나타내는 것이다.
미국의 강경론이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북핵문제가 협상국면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고, 노무현 정부는 고심 끝에 한국이 참여하지 않는 북미중 3자 회담을 받아들였다. 북미 양자 회담을 주장하는 북한과 다자회담을 주장하는 미국의 안을 절충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3자회담은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했다. 둘째 날 만찬 때 북한의 이근 외무성 부국장이 켈리 미 차관보에게,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며 '물리적 입증을 하거나 이전할 지는 미국에 달려있다'는 폭탄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회담은 북미중에 한일러까지 참가하는 6자회담으로 이어졌지만, 북핵문제는 쉽사리 협상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2003년 8월 27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6자회담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선에서 한 치의 진전도 이뤄내지 못했고 차기 회담날짜도 잡지 못한 채 폐막됐다. 북한은 회담이 끝난 뒤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이런 백해무익한 회담에 더는 그 어떤 흥미나 기대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 어렵사리 성사된 회담들이 이렇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나자,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향하는 한국 정부의 입장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북핵문제와 이라크 파병의 연계 시도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2003년 9월초 미국이 한국 측에 3000~5000명 규모의 이라크 추가 파병을 요청하자, 노무현 정부는 이 문제를 북핵문제와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9월 24일 부산 등 지역 언론사와의 합동회견에서 '북핵문제로 위기감이 감돌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군대를 국외로 무조건 파병한다는 것이 국민들 보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밝혔다. 북핵문제를 이라크 추가파병과 사실상 연계시킬 뜻임을 시사한 것이다.
9월 26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과 파월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는 한국 정부의 이러한 방침이 미국에 전달됐다. 윤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 문제에 유연한 자세로 임한다면 노무현 대통령도 이라크에 파병하기가 수월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월의 얼굴은 굳어졌고 '동맹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 윤 장관에게 건네지면서 분위기는 매우 어색해졌다. 이날의 만남 이후 미국 측은 한국의 연계 전략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는데, 이를 놓고 청와대와 외교부 측에서는 책임 소재에 대한 논쟁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북핵문제와 이라크 추가파병은 연계됐다. 2003년 10월 18일 정부는 이라크 추가파병 방침을 발표했는데, 이틀 뒤 방콕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부시 미 대통령이 다자틀 내에서의 대북 안전보장 제공의사를 밝혔다. 부시 대통령이 대북 안전보장 제공을 확인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한미 간의 협상과정에서 마찰이 생기기는 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추가파병이라는 카드를 이용해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대북강경 노선을 한 단계 톤다운 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후 2차 6자회담과 3차 6자회담이 열렸지만 북핵문제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고, 2004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다시 경색 국면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먼저 남북관계는 2004년 7월초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 등이 김일성 주석 사망 10주기에 맞춰 방북하려던 조문 계획을 정부가 불허한 데 이어, 같은 달 말 베트남에 머물던 탈북자 468명을 정부가 두 차례에 걸쳐 집단 입국시킴으로써 북한의 거센 반발을 샀다. 북한은 탈북자들이 대규모로 입국한 것에 대해 '백주의 테러범죄'라고 비난하고, 8월초와 말에 열릴 예정이던 남북장관급 회담과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를 모두 무산시켰다.
북미관계 또한 경색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북한인권법안을 2004년 10월 발효시킨데 이어, 같은 달 말에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일본 도쿄만 앞바다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나포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훈련을 실시했다. 또, 다음해인 2005년 초에는 라이스 미 국무장관 지명자가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 of Tyranny)'로 지칭해 북한을 반발을 불러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핵무기 보유와 6자회담 무기중단을 전격 선언했다.
이렇게 남북미 사이의 교착 국면이 심화되자, 한국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먼저, 한국은 2004년 중반에 중단된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004년 12월 북한의 임동옥 통전부 제1부부장에게 남북대화를 재개하자는 편지를 보낸 데 이어, 2005년 초에도 연하장 형식의 서한을 북한에 보내 남북대화를 촉구했고, 비슷한 시기 조선적십자회가 요청한 비료 50만톤 지원 문제를 남북 차관급 회담으로 연결시켰다. 2005년 5월 당국 간 대화로서는 10개월 만에 재개된 남북 차관급 회담에서, 양측은 20만톤의 대북 비료 지원과 함께 6.15 공동선언 5돌을 맞아 평양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남측에서 장관급 대표단이 참가한다는 데 합의했다.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과 함께 정부가 힘을 기울인 것은 미국을 설득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게 하는 일이었다. 정부는 '북한에 대한 무력행사나 봉쇄정책에 반대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2004년 11월 로스앤젤러스 연설이나 미국의 특사를 북한에 보내는 방안 등을 통해 미국을 북한과의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고, 결국 부시 행정부가 2기 집권체제를 갖춘 2005년 상반기에 이르러서야 미국의 분위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은 2005년 5월 31일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과거 '폭군' 등으로 지칭하던 것과는 달리 '미스터'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또, 6월 10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 위원장을 '미스터 김정일'로 부르며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해, 며칠 뒤 6.15 공동선언 행사를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남측 대표단이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6월 14일 평양을 방문해 17일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했다. 정동영 장관은 이 면담에서 북한에 200만 KW 규모의 전력을 직접 송전하는 이른바 '중대제안'에 대해 설명하고,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강력히 촉구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 장관과의 면담 끝에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인정한다면 7월중이라도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고 언급해 6자회담 재개에 청신호를 가져왔다.
정동영 장관은 6.17 면담 이후에는 미국을 방문해 체니 부통령, 라이스 국무장관 등과 만났다. 정 장관은 미국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평화공존 의지를 전달하고 북한과의 대화를 설득했는데, 대북 강경파인 체니 부통령은 '라이스 장관과 얘기하라'며 국무부에 권한을 위임할 것임을 약속했고, 라이스 장관은 정동영 장관의 말에 '충분한 고려(full consideration)'를 하겠다고 답함으로써 대화 분위기에 일조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한은 미국이 '폭정' 등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며 대화재개 의사를 밝혔고, 6월 30일에서 7월 1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전미외교정책협의회에서는 북한의 이근 외무성 미국국장과 미국의 디트라니 대북협상대사가 비공식 만남을 갖고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 등을 둘러싼 양국의 이견을 조율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7월 9일에는 베이징에서 미국의 힐 차관보와 북한의 김계관 부상이 만찬 회동을 가졌고, 7월의 마지막 주에 4차 6자회담을 갖기로 전격 합의가 이루어졌다.
2004년 하반기의 남북미 경색국면에서 4차 6자회담을 이뤄가는 과정은 한국의 중재자적 역할이 돋보이는 과정이었다. 한국은 6자회담에서 한국이 해야 할 역할은 북한과 미국을 회담 테이블에 마주 앉게 하는 일이라는 판단 아래, 북한과 미국을 상대로 적극적인 설득 활동을 벌였고 결국은 두 나라를 회담의 틀로 복귀시키는 데 있어 적극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의 적극적 역할은 4차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을 이뤄가는 데 있어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2005년 7월말부터 9월 중순까지 두 차례에 걸쳐 나눠 열린 4차 6자회담 1, 2단계 회의는 6자회담에서의 한국의 적극적 역할이 두드러지게 부각된 회담이었다. 한국은 6자회담이 열리고 있는 베이징 뿐 아니라,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리고 있는 평양과 유엔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는 뉴욕에서 북한과 미국을 설득하며 9.19 공동성명을 도출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한국은 베이징에서 경수로 문제로 협상이 난항을 겪자 '북한이 경수로를 가질 기회의 창이 열려 있다'는 입장을 미국과 상의 없이 발표하면서 협상의 물꼬를 트는 등, 때로는 북한을 때로는 미국을 압박하면서 북미간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북한 대표단과 미국 대표단의 만남은 의장국인 중국이 아니라 한국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중국은 의장국으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 데 대해 불쾌감을 표시할 정도였다.
9.19 공동성명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한국의 적극적인 역할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이 미국 뿐 아니라 북한과도 일정 정도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6.17 면담을 통해 남북관계를 복원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북한을 실질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이러한 바탕위에 북미간의 중재자 역할을 적절히 수행함으로써 9.19 공동성명이라는 6자회담에서의 중요한 성과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6자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는 9.19 공동성명이 채택된 뒤 기자들을 만나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를 우리를 위한 역사로 만드는 길을 열고 있다'며 한국의 역할에 대해 자평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성사된 9.19 공동성명의 이행은 BDA라는 돌출변수를 만나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미국은 마카오의 중국계 은행인 '방코델타아시아'(BDA)가 북한의 위조달러 유통 및 불법자금 세탁 등에 관여해왔다며 BDA를 '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했는데, 이 조치로 인해 예금자들의 예금 인출 사태가 일어나는 등 위기에 직면한 BDA가 북한 자금 2500만 달러를 동결시켰기 때문이다.
북핵 대화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BDA 문제에 있어서도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북한은 2006년 7월 5일 대포동 2호 등 미사일 7기를 발사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고, 10월 9일에는 전격적으로 핵실험을 실시했다. 한국은 이 과정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막기 위해 쌀 지원 중단을 경고하고 북한의 핵실험을 막기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등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의 과격한 행동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게임을 벌이는 상황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 이후 유엔 차원의 대북제재 국면이 시작되자 한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국제적 차원의 대북제재 움직임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한국만이 예외일 수 없었고, 한국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수세적 위치로 내몰렸다. 북미간의 대치가 첨예해지고 그것이 세계적 차원의 이슈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외교적 활동공간은 극히 협소해졌던 것이다. 이후 북핵문제는 북미중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10월 31일 6자회담 재개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극적으로 대화국면으로 반전됐다.
2007년 1월 베를린 회동에서 BDA에 대한 해결 기반을 마련한 북한과 미국은 2월초 6자회담에서 2.13 합의라고 하는 북핵 문제에 관한 또 하나의 진전을 이뤄냈다. 2.13 합의는 영변 핵시설 폐쇄를 60일 안에 실시하고 핵시설 불능화가 이뤄질 때까지 중유 100만톤 상당의 에너지를 제공하기로 하는 등 북핵 폐기의 초기 로드맵을 규정한 합의로, 이러한 합의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한국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회담의 돌파구를 여는 데 기여했다.
특히, 북한이 핵시설 불능화를 빨리 달성하면 할수록 100만톤 상당의 에너지를 빨리 받을 수 있도록 한 이른바 '성과급제'나 '에너지 동등분담 원칙'은 한국의 주도로 마련된 것이었는데, 한국이 이러한 아이디어로 회담에서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북미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회담을 주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측 회담 관계자는 '북한 측 대표가 우리 측의 조언은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북한 측에 허심탄회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북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북한을 설득하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합의 도출이 가능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회담 관계자는 2.13 합의가 마련된 뒤 기자들과 만나 '한국이 무슨 역할을 했느냐는 것에 대해 질문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한국의 역할에 대해 자신감을 표현했다.
2.13 합의는 이후 이행 과정에서 일부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으나, 1단계 조치인 영변 핵시설 폐쇄에 이어 2단계 조치인 핵시설 불능화와 핵신고 단계까지 나아갔고, 이제 3단계 조치인 핵폐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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