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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의 어둠, 밤이 깊어가는가 새벽이 밝아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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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의 어둠, 밤이 깊어가는가 새벽이 밝아오는가

강제윤의 '섬을 걷다' <21> 어청도, 연도 <하>

왕조의 파수대, 어청도 봉수대

어청도(於靑島) 등대를 돌아보고 서방산 능선을 오른다. 어청도의 주봉인 서방산(198m) 정상에 봉수대가 있다. 원추형의 2층 석축. 봉수대는 고려 의종 3년(1148년)에 처음 축조돼 왜구들의 침략을 감시했다. 봉화는 인근의 외연도, 녹도, 원산도 봉수대를 경유해 보령까지 전해졌다. 조선 숙종 3년(1677년), 외연도, 녹도 봉수대와 함께 폐지 됐다. 봉수대를 운영하던 당시에는 나무가 자라지 못하도록 베어냈을 테지만 오늘 봉수대 앞은 되살아난 원시림으로 울창하다.

왜구들은 한반도 유사 이래 가장 잔혹한 해적 집단이었다. 끊임없는 살육과 노략질로 이 땅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백성에게 가혹한 왕조는 왜구에게는 무능했다. 비록 저 봉수대가 봉화를 올려 왜구들의 침략을 알렸을지라도 어청도 사람들은 결코 왜구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청도 봉수대는 어청도를 지키는 봉수대가 아니었다. 왜구가 섬을 점령해도 군대를 보내 막아줄 능력이 없던 왕조. 그들에게 섬은 그저 왕국을 지키기 위한 보루였을 뿐 목숨 걸고 지켜야할 왕조의 땅은 아니었다.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숨어든 섬. 왜구의 침탈을 피할 방도가 없음을 잘 알면서도 섬을 떠날 수 없는 것은 섬사람들의 숙명이었다. 막바지 생들의 막바지 피난처. 그러므로 섬은 섬 사람들 스스로 죽음으로 지켜야할 땅이었고 끝끝내 지켜낸 생의 영토였다.
▲ 어청도 서방산 정상의 봉수대ⓒ강제윤

치동묘, 신이 된 해적

어청도는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의 노략질 대상이기도 했지만 더 오랜 옛날에는 섬 자체가 해적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치동묘(淄東廟). 어청도에도 이웃 섬 외연도처럼 치동묘라는 전횡의 사당이 있다. 전횡은 이 섬에서 해적질로 연명했으나 사후에는 신이 되었다.
▲ 보수공사 중인 치동묘ⓒ강제윤

전횡은 진시황 사후 제나라를 세워 왕이 됐으나 한고조 유방에게 패망한 뒤 500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황해의 섬으로 도망 쳤다고 전한다. 외연도의 전설은 전횡이 숨어든 섬을 외연도라 하고 어청도에서는 그 섬이 어청도라 한다. 중국 청도 근해에도 전횡도가 있다.

이처럼 황해 바다에 전횡의 전설이 널리 유포되어 있는 것은 그의 영향력이 컸다는 반증이다. 외연도에서 전횡은 어부들의 수호신이었다. 어청도에서도 그는 여전히 신이지만 어청도의 전설은 외연도에 비해 더 직설적이다. 망명이란 정치적 용어로 포장하지 않고 해적 두목이 된 전횡의 행적을 날 것으로 드러낸다.

대륙에서 쫓겨나 섬으로 들어온 전횡 일행은 어청도를 근거지 삼아 해적 노릇을 한다. 전횡은 서방산 정상에 올라 쇠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지나가는 배들을 어청도로 유인한 다음 선박을 탈취해 살아간다. 그들이 쇠 부채로 바람을 불러왔다는 것은 해적질이 대체로 바람 부는 날 성공적으로 행해졌다는 뜻이다. 돌풍을 피해 대피한 배들은 독안에 든 쥐가 아니었겠는가.

전횡은 한동안 황해 일부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점차 세력을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재기의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한나라 군대의 포로가 된 전횡은 호송 도중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고 부하들 500명도 모두 따라 자결했다. 전횡은 비극적으로 최후를 마쳤지만 그가 점령했던 황해의 일부 섬에서는 오랜 세월 신으로 군림했다. 해적을 바다의 수호신으로 만든 섬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육지의 권력에 저항했던 전횡. 섬 주민들의 육지 권력에 대한 저항과 반감이 전횡에게 의탁 되었던 것은 아닐까.

옛날에는 어청도에 피항 온 중국 배들까지도 치동묘에 제사 지내고 갔다. 또 고래잡이가 한창일 때는 한국 포경 협회에서도 치동묘에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한다. 포경업이 쇠퇴하면서 사당도 몰락했다. 오늘 치동묘는 전면 개보수 공사 중이다. 하지만 사당이 새 단장을 해도 전횡이 다시 신으로 부활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서남해의 섬들은 이미 서양에서 온 외래 신들에게 점령 당한지 오래인 까닭이다.

연도, 정박을 모르는 닻들의 안식처

닻의 한자어는 정(碇)이다. 오랜 옛날에는 밧줄에 무거운 돌(石)을 매달아 물속에 던져 배가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정(碇)이란 글자는 거기서 유래했다. 그래서 배가 머무는 것이 정박(碇泊)이다. 연도 해안 곳곳에는 버려진 닻들이 갯벌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정박(碇泊)의 때마다 제 깊은 속살 닻에게 내어주던 갯벌. 연도 갯벌은 이제 닻들의 무덤이 되었다. 바다 한가운데서도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던 닻. 이곳에 오기 전까지 닻은 끊임없이 떠돌아야 했다. 정박이 그의 일이었으나 살아서는 결코 정박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닻. 녹슬어 쓸모없어진 닻은 생명을 거두고 영원한 정박을 얻었다. 끝내 정박에 이르렀으므로 더 이상 닻이 아니게 된 닻. 나그네여! 그대 마침내 안식을 얻었으니 평안하신가.
▲ 연도 해변에 버려진 닻들ⓒ강제윤

충남하숙

충남 하숙. 선착장 입구에 몇 개의 하숙집들이 있다. 나무판자나 시멘트 외벽에 페인트로 찍어 쓴 간판. 섬에 웬 하숙집일까. 외지에서 들어온 선원들만을 대상으로 하숙을 치르는 것일까. 주저주저 하다 발길을 돌린다. 민박 간판을 단 집을 찾아 섬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나란히 붙어선 민박집, 한 집은 문이 잠겼고 또 한 집은 보수 공사 중이다. 공사 중인 민박집 주인이 하숙집을 찾아가라고 알려준다. 몇 집을 기웃거렸으나 모두 문이 잠겼다. 충남 하숙, 노인이 하룻밤 하숙생을 반긴다. 노숙을 면하게 된 나그네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 충남 하숙ⓒ강제윤

'하숙'이란 간판은 폐교되기 전 연도 분교의 어떤 선생님이 달아준 것이다. 그 선생님은 민박 보다는 하숙집이 더 정감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여든 한 살의 '하숙집' 할머니가 따순 밥과 아귀 찌개, 멸치젓을 듬뿍 넣은 김치로 밥상을 차려 내신다. 평생 동안 단물이 다 빠져 나가고서도 아직 진액이 남았던 것일까. 할머니의 손맛이 달다. 여든넷 할아버지는 풍을 맞아 말도 어눌하고 걷기도 불편한 몸으로 손님상에 올릴 생선들을 손질한다. 줄무늬 핀 각시 박대, 아귀, 장대 등의 비늘을 쳐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다. 손질한 생선을 물에 깨끗이 씻어 빨래 줄에 건다. 연도에서는 생선이 빨래처럼 말라간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느린 손질이 못마땅하다.

"동작 좀 삭삭삭 좀 하지. 갑갑하구만."

할머니의 지청구는 어여쁜 투정이다. 늙은 몸이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고 의지가 되는 것은 지복이다. 고마워라 생이여!
▲ 84세 할아버지가 손님 상에 올릴 생선을 손질한다ⓒ강제윤

물고기가 떠나니 사람도 떠나다

어청도 항로 길목의 섬. 군산항에서 북서쪽으로 23㎞ 떨어진 연도는 군산보다 충남의 장항, 서천이 더 가깝다. 지난겨울 연도는 태안의 섬들만큼이나 기름 유출 피해가 컸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다녀갔다. 마을 앞 해변의 기름은 대부분 제거 됐으나 섬의 뒷산 절벽에 붙었던 기름들은 그대로 남았다. 날이 풀리면서 기름이 녹아내리고 있지만 달리 손써볼 도리가 없다. 바다 곳곳에 기름띠가 빨간 상추 물처럼 둥둥 떠다닌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갯벌이 죽은 뒤 물고기들도 떠났다. 어청도처럼 연도 또한 방조제와 멀리 떨어진 섬이라 해서 보상이 없었다. 거기에 기름 유출 피해까지 입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 기름 방제 작업이 끝난 뒤에도 성게, 톳, 바지락, 홍합, 해삼, 고동 따위 해산물의 판로는 쉽게 열리지 않는다.
▲ 연도 들판에 피어난 엉겅퀴꽃ⓒ강제윤

섬이 쇠락 한 것은 벌써 여러 해 전이다. 물속만 들여다보고 살던 섬사람들도 바다가 죽으면서 섬을 떠나갔다. 이제 섬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봄이면 젊은 사람들이 어장 배를 타고 찾아오지만 그들은 군산 등지에 나가 살며 어장 철에만 섬으로 들어온다. "정월 보름 밥 먹고 들어와서 봄, 여름 벌이만 하고 나간다." 겨울이면 섬은 다시 텅 빈다. 50여 가구 중 떠날 곳 없는 노인들 7~8호만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간다.

섬은 한때 멸치잡이로 주가를 높이던 시절도 있었다. 90년대 초반. 멸치 한포대가 15만원 까지 했으니 부촌 소리를 들을 만 했다. 그 때 가격이야 대통령의 아버지 멸치 선단 덕에 비정상으로 높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시세가 없어도 아주 없다. 중국 멸치가 수입 되면서 많은 멸치 어장이 문을 닫았다. 멸치 막은 허물어지고 건조대는 우거진 풀숲에 파묻혀 녹슬어 간다. 그나마 잡히는 멸치는 모두 젓갈을 담아버린다. 품이 덜 들기 때문이다.
▲ 연도 포구, 멸치 젓이 고무 통에서 발효돼 가고 있다 ⓒ강제윤

밤, 12시 섬은 잠에서 깨어난다

밤 12시, 적막하던 섬이 잠에서 깨어난다. 포구가 갑자기 분주해 진다. 귀선의 시간. 새우 조망 어선들이 연달아 들어와 밝히는 불빛으로 포구는 대낮처럼 환하다. 새우 조망 배는 자루모양의 그물 입구를 벌린 채 바다의 바닥을 끌고 다니며 새우를 포획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어류까지 남획되는 폐단을 피할 수 없다.

어선은 저물녘 출항하여 대여섯 시간을 그물질 한 뒤 자정 무렵 돌아온다. 정박한 어선의 갑판에는 새우들이 쌓였지만 예년에 비해 절반도 못되는 양이다. 어선들의 귀항에 맞춰 작업복을 입은 중 노년의 여인들이 마을의 골목길을 빠져 나와 어선의 갑판에 오른다. 선원들은 벌써 작업을 시작했다.
▲ 밤 12시, 새우 조망 배들이 연도 포구로 귀항하고 있다ⓒ강제윤

새우와 다른 잡어들을 분류하고, 새우도 먹새우와 꽃새우을 가른다. 먹새우는 판로가 없어서 그냥 바다에 버린다. 붉은 색 꽃새우만 추려내니 새우의 양은 3분의 1로 줄어든다. 꽃새우는 1kg에 2천 원 선. 많이 잡히지도 않는데다 가격은 낮고 기름 값은 비싸 출어에 기쁨이 없다. 중국산 수입 새우와 가격 경쟁에서 밀린다. 배 마다 10여명이 달라붙어 일해도 손길만 분주할 뿐 갑판은 조용하다. 신명이 없는 노동은 고역이다.

대부분의 새우는 야행성이라 밤에만 그물에 든다. 새우 철에는 연도의 낮 밤이 뒤바뀐다. 5월부터 9월까지 새우 철이 끝나면 초겨울까지는 멸치잡이가 계속된다. 겨울이면 섬은 다시 적막강산이 될 것이다. "새만금 방조제로 갯벌이 사라지면서 서해 바다 섬들마다 물고기 씨가 말랐다."고 황해 바다 섬 주민들은 어딜 가나 이구동성이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갯벌만 죽인 것이 아니다. 갯벌에 코 박고 살던 어민들을 죽였고 이제 많은 섬들도 죽이고 있다. 연도 포구, 새우조망 어선들이 발전기를 돌려 갑판은 대낮보다 환하지만 어민들의 마음은 칠흑처럼 어둡다. 저 막막한 생의 바다. 밤이 깊어 가는가, 새벽이 밝아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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