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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라, 설득하라, 병행해서 해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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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만나라, 설득하라, 병행해서 해결하라'

[화제의 책] 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

임동원. 그는 '평화를 만든 사람', 피스메이커(peace-maker)이다. 한반도에서 평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내적으로 냉전세력들의 방해를 딛고, 유리한 국제환경을 만들어 가면서 북한과 협상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평화를 만든 사람'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지혜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지난 20년 동안 임동원의 삶은 그 자체로 한반도 평화만들기의 과정이었다. 회고록 <피스메이커 :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중앙북스 펴냄)은 그에 관한 기록이다. 거기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강직한 군인에서 외교관으로 남북회담 대표에서 외교안보 수장으로 그가 겪었던 희망과 영광, 그리고 좌절과 아쉬움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 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가 발간됐다. ⓒ중앙북스

나아가 <피스메이커>는 한반도의 역사를 담고 있다. 냉전시대에서 화해협력 시대로 한반도의 역사적 전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남북관계를 다룬 고전적 저작들은 대부분 미국의 전문가나 관료들이 쓴 것이 많았다. 한국은 당사자이면서도 자신의 시각이 담긴 기록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피스메이커>의 출간으로 이제는 달라졌다. 이 책은 저자의 꼼꼼함만큼이나 세밀한 내용들을 담고 있고, 냉전구조 해체라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과제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우리도 남북관계의 역사를 다룬 고전적 저작을 이제 갖게 되었음을 알린다.

김정일을 가장 오래 만난 한국인의 기록

<피스메이커>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기별로는 1990년대 남북기본합의서의 채택 과정, 2000년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미국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의 남북관계로 구분할 수 있다.

2000년 남북정상 회담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한반도의 역사를 바꾼 김대중-임동원의 만남, 그리고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비전을 가진 지도자와 지혜를 가진 협상가의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를 그리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정상회담의 성사와 협상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의 물밑 접촉, 국정원의 '비공개 공식' 협상, 특사 방북의 실상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정상회담 이전과 정상회담 과정에서, 그리고 정상회담 이후에 저자가 만났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생각을 어떤 책보다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가장 많이, 가장 오래 만나본 사람일 것이다.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금수산 기념궁전에 참배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했던 일, 6.15 공동선언 5개항의 내용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통일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상하게 해석하고 있지만, 그런 이들은 이 책에 나타난 정상회담의 협상 과정을 한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일 과정의 중요성을 설득해 합의로 이끈 지혜로운 협상이란 무엇인지 보게 될 것이다.

답방보다 러시아에서 2차 정상회담을 원했던 김정일

1990년대 초 남북기본합의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다루고 있는 부분도 흥미로운 사실들로 가득 차 있다. 기본합의서는 남북한 화해, 협력, 불가침을 다룬 역사적 합의다. 임동원은 당시 회담 대표로서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채택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본문을 교환하던 당시 회담 대표였던 임동원(왼쪽)의 모습 ⓒ연합뉴스

남북한의 입장에 차이가 있을 때 돌파구를 열었던 협상의 지혜도 주목할 만하지만, 이른바 '훈령조작 사건'으로 불리는 정부 내 강경파들의 방해에 대한 아쉬움도 안타깝다.

당시 안기부의 일부 인사들은 차기 대권을 위해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 사항까지 왜곡하고 조작했다.

이 사건의 실체는 나중에 감사원 감사 등을 통해 드러났다. 국가의 이익보다 정파의 이익을 앞세우고, 이산가족 상봉처럼 중요한 협상을 무산시켰으며, '보수'라는 이념을 내세워 자신들의 무능력을 정당화했던 이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행세하고 있어 '훈령조작 사건'은 여전히 현재적인 의미가 있다.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의 한반도를 다룬 부분도 주목해 읽어야 한다.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2001년 이후 북미관계는 얼어붙었고, 남북관계도 이러한 국제환경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만드는 노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특히 2002년 4월 임동원 특사 방북 당시를 다룬 내용들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서울 답방이 아닌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입장을 밝혔고, 우리는 대안으로 판문점을 제시했다고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악화된 환경에서도 금강산 육로관광, 경의선 연결공사, 개성공단이라는 '평화회랑'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비롯한 강경파들은 유엔사의 권한을 이용해 지뢰 제거, 비무장지대 통과 절차 등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방해했다. 미국 강경파들과 소극적인 북한을 설득해 내는 과정은 '피스메이커'의 의지와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이 책은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던 고농축 우라늄(HEU) 정보를 둘러싼 한미 양국의 해석 차이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북한은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기를 제작할 만한 기술이 없었지만, 미국 네오콘들이 첩보를 과장·왜곡했다. 그 결과 1994년 제네바 합의가 붕괴됐다. 그 후 6년이 흐른 지금 HEU를 둘러싼 진실은 네오콘들의 과장보다는 당시 임동원 특보를 비롯한 한국의 정보판단이 더 정확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페리의 '유쾌한 표절'과 한국의 역할

이 책에는 지난 20년간 임동원이 해 왔던 평화만들기의 이론, 현실, 그리고 경험이 결합되어 녹아 있어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첫째는 남·북·미 삼각관계에서 한국의 역할이다. 임동원은 그 삼각관계의 두 가지 전형적인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는 페리 프로세스다. 1998년 클린턴 행정부에서 월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되자, 임동원은 1998년 12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포괄적 접근'이란 보고서를 작성한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국방장관으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준비했던 페리에게 대북협상의 구체적인 로드맵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서울과 워싱턴에서 반복적인 협의를 통해 탄생한 이른바 '페리보고서'는 한국의 입장을 반영해 작성되었다. 페리는 나중에 '유쾌한 표절'이라는 표현으로 페리 프로세스 탄생 과정에서 보여줬던 임동원의 역할에 감사를 표했다.

또 다른 사례는 부시 행정부 등장이후 북미관계가 악화되었을 때이다. 북한은 이른바 '선미후남'(先美後南) 정책을 고집하며, 남북관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임동원 팀은 미국을 설득하며, 동시에 북한에 대해서도 선남후미(先南後美)의 실효성을 설득했다. 2002년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북 '평화회랑'의 소중한 성과를 거둔데는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남북관계의 지속적인 화해·협력 노력을 통해 미국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조금씩 변화시켜 온 것이다.
▲ 고(故) 김용순 노동당 비서가 2000년 9월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그를 안내하고 있는 임동원 특보 ⓒ연합뉴스

이처럼 남·북·미 삼각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적극적인 역할이다. 한국이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고 미국의 입장만 따라가겠다고 한다면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멀어지고,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입지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 책을 통해 본 지난 20년의 세월이 주는 분명한 교훈이다.

둘째, 북핵문제와 남북관계는 병행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지난 20년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변수는 북핵 문제였고 거기에는 두 가지 입장이 존재했다. 하나는 핵을 먼저 해결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문제를 병행해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채택에도 불구하고 이산가족 상봉처럼 중요한 남북관계 현안에서 진척이 없었던 것은 일부 강경파들의 선(先)핵 해결론 때문이었다. 이 책의 서술 대상에는 빠져 있지만 김영삼 정부가 취했던 정책은 선핵 해결론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한국은 북핵 협상에서 구경꾼으로 전락했고, 돈만 냈으며, 결국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지 못했다.

반면 임동원의 접근은 병행 해결론이었다. 그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은 결국 북핵 해결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을 이끌어 냈다. 그런 점에서 선핵 해결론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접근법에 불과하다.

셋째, 남북관계에서는 무엇보다 접촉을 해야 우리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다. 이산가족의 상봉, 국군포로·납북자 문제의 해결 등은 접촉을 하고 대화를 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중단되면 요구만 할 수 있을 뿐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2002년 서해교전이 일어났을 때, 북한의 유감 표명을 이끌어 냈던 것도 마찬가지다. 강경파들은 이상적인 주장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조금씩 조끔씩 우리가 바라는 의제들을 관철시키고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1999년 연평해전이 발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은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 IMF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때때로 인내심이 필요하다.
▲ 2003년 1월 방북을 위해 특별공항에서 오르는 임동원 당시 대통령 특사 ⓒ연합뉴스

한반도 평화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피스메이커로서 겪어야 했던 고난의 과정도 담겨 있다. 임동원은 2001년 8.15 행사를 계기로 통일부 장관에서 물러나야 했고,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는 대북송금 특검과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으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임동원은 언제나 우리 내부의 갈등이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았음을 안타깝게 회고한다. 평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내부의 합의는 매우 중요하다. 여전히 색깔론에 사로 잡혀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성찰은 그래서 중요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수 없다면 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피스메이커>는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가 보았던 길을 소개하고 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길은 그렇게 열렸지만, 여전히 앞으로 걸어 가야할 길이 멀다.

가지 말아야 할 길도 경고하고 있다. 무책임한 대북강경론, 선핵 해결론 등은 실패한 길이다. 한반도 평화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실패한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도 이 책을 읽고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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