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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결집론? 착각도 정도껏 해야지"

[이근 칼럼] 시민들은 왜 거리로 나왔나?

현 정부와 보수세력들은 아직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가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최소한 정세를 분석하는 기관에서는 이 글을 체크할 것이므로 졸고를 통해서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참고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세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들'을 의미한다. 필자의 앞선 글에 대해 보수의 개념이 혼란스럽다는 항의가 있었지만 개념을 정의하자면 논문이 하나 필요할 것 같아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해 두자.

지지율 10% 대의 의미와 보수결집론의 착각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이 모든 조사기관을 막론하고 10%대로 추락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정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지지율이다.

그에 대한 분석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분석은 '보수결집론'이다. 즉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 약 20% 이상에 10% 대의 박근혜 지지율과 이회창 총재 지지율을 다 합치면 50%에 근접하니 보수를 결집시키면 지지율이 금방 살아난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은 친박세력의 복당과 자유선진당과의 화합, 그를 통한 구시대적인 피아(彼我) 구분에서 현 위기의 극복 방안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친박세력과 자유선진당도 이명박 정부를 선호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지지율 10%대는 보수가 분열된 결과가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의해 혜택을 받는 국민의 비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개발주의식 신자유주의'에서 그나마 혜택을 보는 국민의 비율이 10%대에 머문다는 의미다.

국민들은 과거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광우병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와 보수언론의 실체를 알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정책이 상위 10%대의 국민만을 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따라서 친박세력을 합치고 자유선진당을 합치고, 심지어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또 다른 보수집단인 통합민주당의 상당수 의원을 합친다 하더라도 정부의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10%대 이상의 지지를 받기 어렵게 됐다. 정부와 보수세력은 제발 정치공학적으로 지지율 계산을 하지 말기 바란다.
▲ 경찰 차량에 불법주차 딱지를 붙여 항의하는 시민들 ⓒ프레시안

시민들은 왜 광장으로 나왔을까?

정부와 보수세력들은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시위의 뒤편에 좌파와 배후가 있다는 음모설은 깨졌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걸 이해하려면 우선 민주주의와 관련된 정치학적 지식을 알 필요가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그들'이 말하는 소위 '잃어버린 10년' 동안 놀랄 만큼 민주주의적으로 성장을 했다. 민주주의적인 성장이라 함은 사회가 다원화·탈권위화·투명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다양한 이익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 이익의 조정이 과거와 같은 하향식 권위주의로 가능하지 않게 됐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협치'(協治), '공치'(共治)란 의미의 '거버넌스(governance)' 같은 어려운 개념들도 나왔다. 이렇게 어려운 개념이 현실이해나 문제해결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는 잘 모르지만, 여기서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역할은 간단하다. 다양한 이익을 탈권위적인 방법으로 조정해 내는 것이다.

재벌의 이익, 중소기업의 이익, 소비자의 이익, 농민의 이익, 대형교회의 이익, 재향군인회의 이익, 강남 부동산 부자들의 이익, 사학(私學)의 이익, 노동자의 이익, 서민의 이익, 학생의 이익, 학부모의 이익 등 수많은 이익을 비교적 많은 국민들이 수긍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정해 내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인의 역할이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조정하는가'이다. 서구 유럽에서는 조합주의라 하여 이익단체의 최고대표들이 만나 협의를 통해 조정하는 방식을 택한 나라가 많고(노사정 합의), 미국과 같은 국가에서는 싱크탱크(think tank)의 의제설정을 기초로 해 제도권 및 마을 단위 정치라는 다양한 채널에서 여론 수렴과정을 거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에서는 과거 이익을 조정하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특정 이익만 중시하고 다른 이익은 깔아뭉개는 방식을 취했다. (현 보수세력이 선호하는 방식이지만) 그러나 민주주의가 되면서 그런 방법을 쓰는 게 쉽지 않아졌고, 많은 어르신들의 표현대로 나라가 '시끄러워졌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절 나라가 시끄럽다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이 무척 많았는데, 그분이 이러한 민주주의적 이해조정 과정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는 한국에서는 지금 누가, 어떻게 이익을 조정하느냐인데, 제도권에 있는 여야 정치인들은 이런 역할을 전혀 수행해 내지 못한다. 그저 모두 먼 산만 쳐다보고 있다. 시장기능을 믿겠다는 순진한 생각 말고는 이익 조정의 철학도 부재하다. 현 정부도 그런 역할을 할 의사가 전혀 없는 듯 그냥 권위주의적으로 밀어 붙인다. 학계와 상당수 지식인도 손을 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류 언론의 역할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언론의 역할이 중요했고, 실제로 언론이 오랜 기간 이익조정자 역할을 해왔다. 특정 방향으로 여론을 만들어 그 방향으로 이익을 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광우병 쇠고기 사태를 겪으며 많은 시민들은 깨닫게 됐다. 현 정부와 보수세력, 그리고 보수적인 주류 언론은 이익을 공정히 조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 상위층 약 10%의 이익만을 위해 여론을 호도하고, 때로는 왜곡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국민을 교육시키고 밀어붙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이익집단과 시민들이 광장에 나와 최고 의사결정 기관인 청와대로 행진하려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자신들이 직접 그 이익조정자가 되려 하는 것이다.

'물대포는 온수로 쏘라'는 발랄함의 힘

다음으로는 시민들의 시위가 왜 이토록 평화를 지향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그들은 왜 비폭력을 외치고, 예전의 '좌빨' 및 '배후'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일까.

최근 새로운 시위의 트렌드에 대해서는 필자의 지난 글(☞ "MB 정부, 국민이 도박판의 '판돈'인가?")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요점만 말하자면, 최근의 시위 문화는 '놀이'(play)와 항의(protest)가 합쳐진 'playtest'로 이해해야 한다.
▲ '창조적 실용주의'를 외치는 MB 정부는 국민들의 창조성과 실용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프레시안

필자는 과거 '작업'(plabor: play+labor)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다. 후기 산업사회의 사무직 노동자들의 노동자들이 노동이 진화된 '작업'(plabor)을 한다는 것인데, 컴퓨터와 같이 일의 공간과 놀이의 공간, 일의 수단과 놀이의 수단이 합쳐짐으로써 나온 개념이었다.(☞ 모니터사회의 등장과 'plabor', 또는 '작업')

현대 사회에서 놀이는 왜 중요한가?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대량생산 능력을 갖추어 대량소비가 중요해졌고, 대량소비는 즐거움이 있어야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놀이가 중요한 개념이 된 것이다. 즐거운 대중문화가 중요해지고, 연예인이 새롭게 각광받는 직종이 되는 것도 그 이유다. 젊은이들에게 딱딱한 성실함과 인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안 먹히는 이유는 어르신들이 그러한 자본주의 구조를 이미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개념으로 '즐거움'이 들어와 모든 일상생활에 결합되어 움직이게 된다. 또한 이러한 즐거움에서는 많은 '창조성'(creativity)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번 촛불시위는 시위에서도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위를 장난으로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요구사항을 창조적으로 지겹지 않게 전달하는 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처럼 비장한 각오로 깃발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방식은 이미 '유치'해 졌고 새로운 세대의 리듬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시위에는 폭력이 동원되기 어렵고, '물대포, 온수로 쏴라' '세탁비 내놔라' '경찰청장은 개인기를 보여줘라' '경찰청장 노래해' 등의 매우 창조적이고 재미있는 구호들이 등장하게 된다. 새로운 방식의 항의는 공통의 불만을 즐겁게 표현할 수 있고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어서 더 응집력이 있고 오래가는 것이다. 그래서 배후가 있기 보다는 네트워크를 통해 일순간에 확 모일 수 있는 것이며,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전투경찰과 경찰특공대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비폭력의 시위를 지속할 것이다.

창조적 실용주의를 외치는 현 정부가 국민의 창조성과 실용성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시민 CSI'가 캐낸 노다지

현 정부가 최소한 30%대의 지지율을 회복하는 것은 보수가 그 정체성과 정책을 확 바꾸지 않는 한 매우 힘들 것이다. 현 정부와 보수세력, 특히 그들의 뒤에서 추동하던 보수언론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단순히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국민 건강의 문제만으로 본다면 현 정부는 또 다른 오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리하고 창조적인 시민들은 광우병 쇠고기 사태를 알기 위해서 미드(미국 드라마)인 'CSI'(과학수사대) 수준으로 이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시작하고, 다양한 정보의 공간에 그 진실을 뿌렸다.

시민 CSI가 찾아낸 것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문제점만이 아니라 보수언론의 사실 및 여론 왜곡, 오만함과 사적 이익만의 추구이다. 또한 10%만을 위한 정부의 정책과 그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의 실체도 알아냈다. 광우병 사태를 캐다가 보수세력(민주당이라는 야당도 포함한)의 실체가 줄줄이 따라 나와 버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조중동 절독 운동으로 이어졌고, 여당뿐만이 아니라 야당에 대한 불신, 그리고 정론지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보수세력의 신뢰는 이미 땅으로 떨어졌고, 어떠한 말을 하거나 어떠한 일을 해도 '꼼수' 이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보수의 근본적인 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창조적인 시민들은 보수들과의 대결에서도 정말 창조적인 방법을 개발해 내고 있다.

새 시대의 동력

앞으로 정국은 계속 혼미할 것 같다. 정부와 보수가 기존의 방향을 쉽게 바꿀 것 같지도 않고, 바꾼다고 해도 국민이 잘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시원한 답이 찾아지지 않는다. 기댈 만한 정치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민이 바뀌는 것을 주목해야 할 때다. 국민이 올바르게 사고하고, 제대로 정권을 감시하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젊은 세대의 창조성과 민주성, 그리고 정열에 기대보고 싶다. 국민이 국민주권 시대를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려면 빼앗긴 주권을 찾아올 수 있도록 능력을 갖추고,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보여주어야 한다.

정론지와 바른 언론, 그리고 지식인들은 이를 위해 왜곡되지 않은 양심적인 판단, 정보, 분석을 끊임없이 제공할 의무가 있다. 모처럼 상식이 통하는 시대로 나아가는, 그리고 창조적이고 민주적으로 저항하고 감시하는 시대로 가는 동력이 생겼는데 이를 놓치면 안 된다.

이제는 왕권신수설의 국가가 아니라 국민주권의 국가 시대이다. 보수세력은 국가이익을 말하기 전에 국민이익이 무엇인지를 먼저 따져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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