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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계급투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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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계급투쟁인가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43>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④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동질성

프랑스혁명을 귀족계급을 타도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것은 맑스주의자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일이다. 그것을 통해 프랑스가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혁명은 프랑스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사건이 된다.

고전적 해석에서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으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앞에서 말했듯이 코반이다.

그는 1789년 국민의회 의원들의 출신을 분석했는데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의 범주에 놓을 수 있는 사람을 모두 합쳐봐야 85명이었다. 전체 의원 648명 가운데 13%에 불과했다. 반면 변호사나 공증인 같은 법률가는 166명으로 약 1/4 정도, 또 지방관리, 판사, 검찰관 등 행정, 사법관리 출신이 278명으로 약 43%를 차지했다.

1792년의 국민공회에 가면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 출신의 비율은 더 떨어져 891명 가운데 83명으로 약 9%이다. 법률가들은 비슷하며, 관리출신들은 25%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면 전문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나 교사, 의사, 군대의 장교, 작가, 배우 등이 5%에서 17%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을 보면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공업 부르주아라기보다는 대체로 법률가, 관리 출신, 전문직업인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혁명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봉건적 구체제를 분쇄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주장은 의문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는 부르주아와 귀족이 어떤 집단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구체제 하에서 귀족과 부르주아가 하나의 상층계급을 구성했었다는 주장은 50년대부터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무시를 당했을 뿐이다.

테일러의 1967년 연구에 의하면 혁명전 프랑스의 모든 사회집단의 부는 압도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주로 토지재산에 근거한 소유자적(proprietary) 부였다. 귀족이 그럴 것은 당연하나 제3신분의 경우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부유한 제3신분의 경우에도 소유자적 부가 상업이나 산업적 부를 훨씬 능가했다. 구체제 하에서 자본주의가 제3신분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귀족과 부르주아는 그 투자 행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르주아들도 돈이 생기면 토지를 사서 사회적 위신을 높이려했다. 이것은 그들이 비슷한 사회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루카스의 1973년 연구는 구체제 말에 부르주아와 귀족이 하나의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에 속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과거 귀족이 독점했던 특권들을 이때에 와서 두 집단이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면세특권을 부여받거나, 영주로서 행동하고, 또 이름에 귀족 칭호를 붙이는 많은 부르주아 평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귀족과 맞먹는 사회적 권위를 누리거나 귀족의 생활양식을 모방하는 부르주아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이제 부르주아를 더 이상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귀족과 뚜렷이 분리시키는 태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 제3신분이 사슬을 끊고 무장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제1신분과 제2신분 (당시의 프린트화)

혁명은 왜 일어났는가

그 후의 많은 연구들을 통해 오늘날에는 귀족과 부르주아의 동질성과 차이에 대해 더 상세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부르주아의 재산은 귀족의 것과 같이 압도적으로 소유자적인 것이다.

또 부르주아들은 끊임없이 귀족화했다. 그것은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귀족 칭호가 붙은 매매관직이나 영지를 사들임으로써 가능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725-1789년 사이에 3만5천 명에서 4만5천 명 정도의 부르주아가 귀족이 되었다. 그리하여 1789년 현재로 모든 귀족 가문의 최소 사분의 일이 18세기에 들어와 귀족화된 가문으로 추산된다.

부르주아만이 아니라 귀족도 상업이나 산업에 투자했다. 실제로 공격적이고 혁신적인 자본주의를 추구한 사람들은 귀족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얼마 전까지 주로 부르주아들이 했다고 믿어진 징세청부업은 18세기에 대체로 귀족들의 일거리였다. 이렇게 귀족과 부르주아는 18세기에 들어와 사회경제적으로 거의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정치의식에서도 현격한 차이는 없다. 삼부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귀족들의 까이에(청원서)들을 보면 귀족들은 시민적 평등과 공평한 조세부담, 재능과 덕에 따른 관직취임에 대체로 찬성했다.

또 귀족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과거에는 부르주아의 독점물로 생각한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18세기에 귀족이 점점 더 반동적이 됨으로써 제3신분의 계급의식을 강화시키고 그 결과 혁명을 발발시켰다는 주장은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 삼부회의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논쟁이 왜 갑자기 혁명으로 비화했을까. 루카스는 그 원인을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파리고등법원이, 삼부회가 1614년 형태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1788년 9월에 선언한 데서 찾고 있다.

그는 고등법원의 선언은 귀족이 부르주아와 권력을 나누기를 싫어했다는 것이 아니라 수세대 동안 구분이 희미해진 귀족과 부르주아의 구분을 자의적으로 되살렸다는 점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과거에 르페브르도 지적했던 일이다. 그도 이 사건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과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어 삼부회를 장악하려는 부르주아의 운동에 불을 붙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늘날 많은 수정주의자들이 이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은 깊은 사회경제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적 성격의 혁명으로 바뀌고 있다. 혁명에 우연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고 혁명에서 나타나는 급진적 요소들은 정치적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라는 것이다.

즉 1789년의 원리는 어느 특수한 사회집단의 바람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그 원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1789년 봄에는 전연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귀족계급은 왜 그렇게 쉽사리 붕괴했을까. 수정주의자들은 그 원인을 귀족 계급 내부의 분열에서 찾고 있다. 구체제 하에서 가난한 귀족과 부유한 귀족 사이에는 깊은 적대감이 있었고 지방거주 귀족과 베르사유에 거주하는 고위 귀족 사이에도 깊은 적대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반동적이었던 것은 이 소수의 고위 귀족들이며 이 분열이 많은 귀족들의 이반현상으로 나타남으로써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명이 아직 과거의 맑스주의적 설명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또 새로운 해석에도 불투명한 점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논리의 발전을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 테니스코트의 선서.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은 헌법을 제정하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790년 다비드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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