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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바다는 이 행성의 피다!

강제윤의 '섬을 걷다' <18> 추자도

"바다는 이 행성의 피다.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든지 간에 바다는 우리 모두의 기에 영향을 끼친다. 바닷물은 이 해안에서 저 해안으로 물리적 정보뿐만 아니라 천상의 정보까지 운반하기 때문이다."

(찰리 라이리 '물의 치유력')

물속으로 이어진 땅 끝, 제주의 섬들

어떤 문화권의 사람들은 바다가 사람의 생사에 직접 관여 한다고 믿는다. 조수(潮水)가 사람의 혼을 옮기고 썰물이 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한 통계는 이를 뒷받침 한다. "만조 때 태어나는 아이가 많고 간조 때 숨을 거두는 사람이 많다." 달의 인력이 바닷물을 끌어당기면 사람 몸속의 액체는 바다의 인력에 끌려간다. 달이 뜬 바다를 보면 사람의 심장도 뛰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구름이 제주의 하늘을 덮고 있다. 오늘 제주 바다는 깊고 푸르고 어둡다. 바다의 표면적은 지구 표면의 4분의 3에 달한다. 나그네는 여객선을 타고 큰 바다에 나와서야 비로소 바다의 크기를 가늠한다. 사람은 물의 행성에 떠 있는 한 점 티끌이다.
▲ 제주 바다, 바다는 이 행성의 피다!ⓒ강제윤

제주항에서 추자도를 경유해 뭍으로 가는 여객선은 두 척이다. 오늘 한 척의 배는 결항이다. 추자도, 목포 항로의 쾌속선은 정기 점검중이다. 대부분의 여객선은 여름철 성수기를 앞두고 전면 수리에 들어간다. 완도 항로의 느린 카페리호를 타고 추자도로 향한다. 추자군도(楸子群島)는 제주 본 섬의 북쪽에 있다. 상추자도, 하추자도, 추포도,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가 추자 군도를 이룬다.

추자군도의 횡간도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최북단 유인도다. 보길도와 소안도가 지척이다. 그 너머는 해남 땅끝 마을이다. 하지만 땅끝은 땅 끝이 아니다. 대지를 가로 질러와 해남 땅끝 마을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던 산줄기는 바다 속으로 이어진다. 산줄기는 흑일도, 백일도, 넙도, 노화도, 보길도, 소안도를 지나 횡간도, 추자도까지 뻗어 있다. 섬도 땅이다. 한반도와 한 몸으로 연결된 진정한 땅 끝은 추자군도의 섬들이다.

완도 항로의 카페리 '강남풍호'는 목포행 쾌속선보다 배나 느리다. 자동차까지 운반하는 여객선의 짐칸은 만 차다. 자동차는 사람과 화물을 빠르게 이동시켜주는 운송 수단이지만 땅을 벗어나는 순간 콘테이너 박스나 생선 상자 같은 화물에 지나지 않는다. 쾌속선의 수리 기간 동안 카페리호는 단축됐던 바다 길을 다시 과거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느리게 가는 뱃길이 불운은 아니다. 배의 밑 칸을 차지한 자동차와 택배 화물들의 무게로 강남풍호는 웬만한 파도에도 끄떡없다. 흔들림이 적어 멀미가 없는 뱃길은 편안하다.
▲ 안개 그물에 걸린 하추자 신양항ⓒ강제윤

하추자

두 시간의 항해 끝에 여객선은 하추자도 신양항에 입항한다. 쾌속선의 결항으로 강남풍호의 승객이 평소보다 많다. 부두 바닥에 직접 접안 할 수 없는 강남풍호는 접안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승객들이 다 내린 후에도 배는 한동안 정박한다. 지게차가 자동차와 택배 화물 콘테이너를 여객선에 옮겨 싣느라 분주하다.

신양에는 마을 회관과 경로당, 보건진료소, 하추자 우체국이 있다. 마을 곳곳에는 공동우물이 여러 곳 남아 있다. 다리로 연결된 상하추자 두 개의 섬은 저수지와 해수담수화 시설을 통해 물을 공급 받는다. 하지만 오랜 세월 섬의 생명수였던 우물도 폐쇄되지 않고 남아 있다. 물 부족의 고통을 겪어 본 추자섬 사람들이 상수도가 생긴 뒤에도 우물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바다가 이 행성의 피라면 우물은 이 마을의 피다. 우물에서 뻗어 나간 혈관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저 우물의 심장에서 배분된 피가 수도 파이프를 타고 마을의 집들로 배달된다. 비 피할 양동이 하나씩을 뒤집어 쓴 펌프는 심장의 피를 옮겨주는 엔진이다.
▲ 물부족에 시달려 본 추자섬 사람들은 우물의 소중함을 안다ⓒ강제윤

남으로부터 안개가 밀려온다. 안개의 냄새만으로도 우기가 다가 왔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초여름 안개는 우기의 선발대다. 기습전의 명수, 안개는 소리 없이 섬을 점령해 들어온다. 안개의 남쪽은 제주도, 안개의 북쪽은 보길도다. 나그네가 보길도에 살던 때 해변에서 자주 바라보던 추자도는 가깝고도 먼 섬이었다. 빤히 보이는 두 섬 사이에는 연락선이 없다. 건널 수 없는 섬들 사이의 거리란 대체 어떻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 추자도에서 보길도는 흔적도 없다. 안개가 모든 섬들을 지워버렸다. 건널 수 없었던 추자도처럼 나그네가 살았던 보길도 또한 환영(幻影)인 것일까.

"가물어도 홍수가 나도 치수 대책은 오직 댐 건설!"

하추자 산길을 넘는다. 신양리에서 묵리로 가는 길. 추자 섬의 산은 높지 않고 길은 멀지 않다. 묵리 하산 길의 저수지가 추자도 제 3 수원지다. 저수지는 단 한 방울의 물도 흘려버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이다. 저수지의 모든 바닥을 비닐 천으로 방수했다. 물 부족으로 고심했던 섬의 흔적이 눈물겹다. 수원지 밑에는 해수담수화 시설이 들어 서 있다. 빗물을 받아쓰는 저수지의 물이 부족하면 해수를 담수 처리한 뒤 함께 섞어서 공급한다. 추자도에는 모두 4개의 수원지가 있는데 저수량은 총 1720톤, 해수담수화 센터는 1일 1천 톤의 담수화 능력을 갖추고 있다.
▲ 물샐틈 없는 추자도 제 3 수원지ⓒ강제윤

물 문제는 인류만의 일이 아니다. 지구 행성에 기대 사는 생명체들의 생존의 문제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4분의 3이 물로 덮여 있지만 그 물의 97%는 바다에 있다. 담수는 지구상 물의 3%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2%는 빙산이나 빙하의 상태로 있다. 결국 우리는 지구 전체 물의 1%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 1%의 물을 사람과 수많은 생물 종들이 고루 나눠야 한다. 세계 보건 기구(WHO)에 따르면 지구에서 식수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만 한 해에 340만 명이 넘는다.

다행히도 이 나라에서는 마실 물이 없어 죽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조금 가물기라도 하면 이 땅의 모든 방송 언론 매체는 당장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생긴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 다음 수순은 이 나라가 물 부족 국가라고 난리를 치는 일이다. 그러면 토목, 수자원 관련 부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장 댐을 더 만들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마치 댐 건설 외에는 치수 정책이 전혀 없는 것처럼 생떼를 쓴다. 그때 가장 많이 '애용'되는 것이 섬의 물 부족이다. 마실 물이 없어서 뭍에서 탱크로 물을 실어다 급수하는 섬 마을 자료 화면을 수시로 보여주며 위기의식을 부추긴다.

하지만 가뭄이 들어도 뭍에서 물을 실어다 먹어야 하는 섬은 몇 되지 않는다. 물이 부족한 섬들도 밥을 못해 먹을 정도는 아니다. 그저 펑펑 쓰던 물을 자유롭게 쓰지 못해 불편할 뿐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마치 모든 섬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어가는 것처럼 사태를 과장 한다. 물론 그 배후에는 댐건설로 이득을 보게 될 토목마피아들이 버티고 있다. 이들이 댐건설을 추진하는 목적은 수자원이나 홍수조절, 에너지 확보 등이 아니다. 오로지 토목 공사를 통한 이윤 창출과 정치자금 확보 따위다. 이들은 또 홍수가 나도 댐을 만들자고 한다. 어느 산천이든 계곡만 있으면 댐을 만들 궁리에 몰두한다. 섬이라고 다르지 않다. 작은 섬에도 댐을 만들기 위에 혈안이다. 이 나라는 물이 넘쳐도 부족해도 치수 대책은 오직 하나 댐 건설 뿐이다!
▲ 상하추자도 두 섬을 연결해 주는 추자대교ⓒ강제윤

토목 공화국 정부와 언론, 토목 업체들은 진짜 물 부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 사람들은 먹는 물을 구하기 위해 종일 걸어가 흙탕물 한 동이를 구해온다. 그마저 없어서 목말라 죽어가기도 한다. 그런 나라가 진짜 물 부족 국가다! 수도만 틀면 물이 콸콸 쏟아지는 나라. 수돗물을 변기에도 쓰고, 자동차 세차에도 펑펑 쓰는 나라. 이런 나라에 물 부족 국가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이 나라는 물 부족 국가가 아니라 물 낭비 국가다!

이 나라는 물 부족이 아니라 물 낭비 국가다!

갈수기 때면 섬들이 물 부족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섬들마다 인구는 몇 배가 줄었고 상수도 보급률은 높아졌는데도 늘 물이 부족한 것은 왜일까. 섬들 또한 도시처럼 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쓰게 된 까닭이다. 섬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집집마다 식수로 화장실 물을 쓰고, 샤워, 세차를 하고 양식장이나 수산물 가공 공장 등에서도 물을 마구 쓴다. 물을 아껴 쓰고, 노후 관로의 누수를 잡고, 중수도나 우수 시설 을 설치하는 등 물 관리를 효율적으로 한다면 물이 부족할 이유가 없다. 섬에서는 불과 이삼십년 전만해도 물동이와 물지게로 물을 날라다 아끼고 귀하게 썼다. 그때는 지하수 관정을 파기도 어려워 지표수만을 썼지만 물 부족으로 고통 받지 않았다. 온 나라가 그렇듯이 지금 섬에서 물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물 낭비가 심하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정부나 자치단체는 조금 가물기만 하면 어떻게든 섬에마저 댐을 하나 더 지을까 궁리 할뿐 다른 물 대책은 고민하지도 않는다.
▲ 추자도의 밤 바다ⓒ강제윤

그동안 댐이 물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전 지구적 물 부족 사태가 댐 건설만으로 해결 되지 못한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이 댐 이외에 다양한 물 대책을 찾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여전히 댐건설만을 최상의 물 대책으로 신봉하고 있다. 추자도의 담수 시설 같은 해수 담수화는 사막 나라들뿐만 아니라 미국, 호주, 일본 등 댐 건설을 주로 하던 나라들까지도 중요한 대안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작은 섬들 일부에만 마지못해 시설 할 뿐이다. 물론 그런 섬들에는 댐을 만들 장소가 더 이상 없거나 아주 없기 때문이다.

가뭄이 들면 바짝 바짝 말라버리는 댐들을 두고 또 댐을 만들자는 것은 희극이다. 아무리 많은 댐을 만든다 한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면 그 댐의 물을 어디서 가져다 채울 것인가. 추자도가 그랬다. 처음 하나의 상수원 저수지를 만들었으나 가뭄이 들자 역시 물이 부족했다. 물 공급이 증가한 만큼 물의 사용량도 늘어난 까닭이다. 그렇게 모두 4개의 저수지를 건설 했으나 여전히 물은 부족했다. 결국 해수담수화 시설을 도입했다. 그 다음부터는 가뭄 때 물 문제가 해결 됐다. 하지만 지금처럼 물을 낭비하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담수화 또한 궁극적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물 부족 사태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는 물을 풍족하게 쓸 방법보다는 물을 아껴 쓸 방법을 찾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성수대교는 섬에도 있다!

추자대교를 지나 하추자에서 상추자로 건넌다. 대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추자대교는 하추자도 묵리와 상추자도 영흥리 사이 바다 길을 이어주는 212m의 작고 아담한 다리다. 1966년 착공되어 1972년에 완공된 다리가 있었으나 10년도 지나지 않아 교각과 슬래브 곳곳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1988년 무렵부터 붕괴 위험에 빠졌다. 부실 공사 탓이었다. 다리는 결국 1993년 4월 새로운 다리 공사를 위해 모래를 싣고 가던 트럭의 하중의 견디지 못하고 아주 붕괴됐다. 그 사고로 두 사람이 죽었다. 토목 공화국의 부실 공사는 외딴 섬이라고 비켜 가지 않았다. 감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 낙도일수록 더욱 심했다. 성수대교는 섬에도 있었다.
▲ 상추자 공중전화에서 소식을 전하는 이주노동자들ⓒ강제윤

하추자가 상추자보다 면적은 세배 이상 크지만 인구는 상추자가 두 배 이상 많다. 상추자가 고깃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항만이 발달하고 상업시설이 많은 까닭이다. 섬이나 뭍이나 사람은 이익을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 하추자도에는 신양1리, 신양 2리, 예초리, 묵리 마을이 있고 상추자도에는 대서리와 영흥리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추자섬 주변은 크고 작은 무인도와 여들이 자주 뱃길을 막는다. 섬과 여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물 밖으로 나오면 섬이 되고 물속으로 들어가면 암초다. 여는 섬과 섬 아닌 것 사이에서 존재와 부재를 거듭한다. 큰 미역섬, 작은 미역섬, 밖 미역섬은 미역이 많이 자라 붙여진 이름일 터다. 개린여, 납덕이, 두령여, 상섬, 구멍섬, 덜섬, 쇠머리, 검은가리, 노린여, 문여, 오동여, 검등여, 열섬, 예도, 공여, 악생이, 염섬, 수려섬, 직구도, 관탈도, 푸랭이, 병풍도, 수덕도, 쇠코. 추자의 무인도와 여들. 그 무인도와 여들로 인해 추자 섬은 풍족한 어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추자 섬에 살지만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모두 무인도와 암초들이다.

추자도 공중전화, 이주민들의 소식 창고

영흥리 입구부터 해안가를 따라 상가들이 시작된다. 미원 일반 음식점, 신안 종합건설주식회사, 멸치액젓, 대영듸젤, 여로 소주방, 왕족발, 별천지 단란주점, 대림게임장, 스카이 단란주점, 해피다방, 에덴 헤어샵, 추광약방, 오동여 식당.....어선들이 많이 드나드는 포구답게 유흥업소가 많다.
▲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는 추자도의 무인도 직구도ⓒ강제윤

밤 10시, 추자 수협 옆 추자도 여객터미널 공중전화 두 대는 이주노동자들의 소식 창고다. 영흥리와 대서리 버스정류소 공중전화도 같다. 총 4대의 상추자 공중전화는 이주노동자들과 모국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다. 전화 회사, KT링커스에서는 점차 수익성 없는 공중전화들을 없애버릴 계획이라 한다. 이제 저 몇 대 남지 않은 전화들마저 철거되고 나면 이주노동자들은 더 이상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안개의 나날들, 섬은 아침이 와도 안개의 포위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추자면 소재지 부근 영흥리와 대서리의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어 마치 거대한 성의 일부분 같다. 옆집과 떨어져 있으면 태풍이나 파도에 휩쓸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 치의 틈도 없이 양 옆으로 혹은 앞뒤로 밀착되어 있다. 오래된 습속. 땅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사람은, 섬은 군집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섬에서는 모여 살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과거 바다 일은 협업이었다. 또 왜구나, 해적들의 노략질과 살육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모여 살아야만 했다. 삶을 이어가고 죽음에 맞서기 위해서는 모여 살 수 밖에 없었다. 추자도의 주거 양식은 확실히 생존의 확률을 높이는 구조다.

"지가 거북이가 됐건 뭐가 됐건 올 테지라."

두 개의 마을은 추자 항을 따라 몰려있다. 마을의 반대편 해안은 비탈지고 옹색하다. 상추자 북서쪽의 무인도 직구도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그 풍경을 달리한다. 안개의 날에는 섬의 본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사물은 객관적이지만 풍경은 주관적이다. 풍경은 속도에 종속된다. 걷는 속도, 탈 것의 속도, 바람과 안개와 구름의 속도, 마음의 속도에 지배된다. 동일한 풍경을 보고 와서도 그려내는 풍경이 사람마다 제 각각인 것은 사물을 관찰 할 때의 속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가 놓치는 풍경을 걷기의 속도는 포획해 낸다.
▲ 제주- 추자 -완도 사이를 오가는 카페리 강남풍호ⓒ강제윤

먼 바다에 풍랑 주의보가 내렸다. 이 바다에도 곧 주의보가 내릴 것이다. 하추자 신양항 대합실은 섬을 빠져나가려는 여객들로 혼잡하다. 난바다의 섬에는 큰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배가 다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바람이 아니라도 바다는 자주 안개의 군단에 포위당한다. 이제 여름이 오고 우기가 시작되면 섬은 더 자주 고립될 것이다. 완도에서 오는 강남풍호는 안개의 포획에 걸려 출항이 두 시간이나 늦어졌다. 도착 시간은 그보다 더 늦어질 것이다. 안개. 바람이나 거센 풍랑을 피해갈 수 있는 노련한 선장도 안개를 피해갈 도리란 없다. 안개에는 틈이 없다. 세상의 어떠한 지식도 안개의 세상에서는 무용하다. 여객선은 그저 안개의 눈치를 봐가며 느릿느릿 나아갈 뿐이다. 대합실의 노인들은 배시간이 늦어져도 느긋하다. 조급해봐야 달리 방법이 없음을 잘 아는 것이다.

"지가 거북이가 됐건 뭐가 됐건 올 테지라."

노인의 말은 제주도보다 전라도 방언에 가깝다. 추자도는 오랜 세월 전라도 문화권이었다. 배는 예정보다 늦었지만 끝내 추자도까지 도달했다. 이제 나그네도 추자 섬을 떠날 때가 왔다. 나그네의 무게를 추자 섬의 땅과 바다가 받아 준 것일까. 추자 섬으로 오기 전에 무거웠던 마음이 섬을 걸으며 가벼워졌다. 사람의 마음이 늘 무겁거나 가볍기만 하겠는가. 무겁기만 하다면 가라앉아 버릴 것이고 가볍기만 하다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추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추. 마냥 마음의 오고감에 끄달리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추자도ⓒ프레시안

누리집: http://www.pogildo.pe.kr
이메일: bogiln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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