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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생사불이(生死不二)의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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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생사불이(生死不二)의 법당

강제윤의 '섬을 걷다' <16> 마라도

가뭇없는 제주의 시간

어제 제주 섬으로 왔다. 꽃들은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만 섬은 바람 잘 날 없다. 사람살이는 암만해도 꽃보다는 섬 쪽에 가깝다. 동풍이 그치는가 싶으면 서풍이 불어온다. 또 언제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불 것인가. 꽃 피어보지도 못하고 꽃 시절이 벌써 저만큼 간다. 모슬포에서도 정기선이 뜨지만 배시간이 맞지 않아 송악산 유람선 부두로 왔다. 부두에는 단체 관광객들이 마라도행 배를 기다리며 줄지어 섰다. 이 근방, 모슬포 지역은 제주에서도 바람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모슬포를 '못살포'라 했었다. 섬은 바람 불지 않는 날보다 바람 부는 날이 더 많다. 그나마 큰 섬의 포구가 '못살포'라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작은 섬들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오랫동안 나그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생에 붙들리고 끌려 다녔다. 끊임없이 벗어나기를 갈망하면서도 기회가 올 때마다 서둘러 몸을 피했다. 진실로 나그네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생인가. 생의 바깥인가. 삶을 살면서도 나그네는 단 하루도 삶에 안착하지 못했다. 늘 삶의 바깥으로 떠돌았다. 피안(彼岸), 삶 너머로만 떠도는 삶도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나그네는 끝내 스스로 도살장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망설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애착인가 불안인가. 시간들, 삶의 도축 업자들. 가뭇없는 제주의 시간이 간다.
▲ 무우꽃이 나비처럼 곧 날아갈 듯 하다.ⓒ강제윤

바다의 가미가제, 인간어뢰

송악산 해안선을 따라 둥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인공 동굴들.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갈 무렵 일제는 일본 본토 공격을 피할 희생양을 찾았다. 훗가이도와 제주도. 두 섬에서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여 미군으로 하여금 본토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이름하여 결 1호(훗가이도), 결 7호(제주도) 작전. 제주는 일본 본토 수호 전쟁의 작전 지역이었다. 그때 만들어진 전쟁의 흔적들이 알뜨르 비행장의 전투기 격납고와 저기 모슬포 해안, 송악산 자락, 우도 해변의 인공 동굴들이다.

가미가제 특공대는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어뢰, 가이텐 자살 특공대는 바다의 가미가제였다. 일제는 저 인공 동굴 속에 폭탄을 실은 작은 배를 숨겨 두었다. 미군 함정이 나타나면 '인간어뢰'가 돌진해 미군 함정과 함께 자폭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제주도를 초토화 시켜서 일본 본토를 수호하겠다는 전략은 미국의 희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로 미수에 그쳤다. 희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비극이었지만 제주 섬에게는 다행이었다. 제 무덤이 될지도 모를 자리를 파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저 동굴들에 쏟아진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은 인공 동굴들을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 청보석처럼 푸른 제주 바다ⓒ강제윤

애기업개의 슬픈 전설

송악에서부터 흐리던 하늘이 기어코 비를 쏟아낸다. 비가 오면 바람이 뒤 따르는 것이 섬의 생리다. 파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니 막배는 뜨지 못할 듯하다. 잠깐 바람이 잠잠한 때를 기다려 배는 나는 듯이 마라도로 건너 왔다. 서둘러 돌아보고 나오라고 선원들은 관광객들에게 신신 당부한다. 선착장 입구에는 골프카들이 늘어서 있다. 전에 없던 풍경이다. 예전에는 민박집 차량 몇 대가 손님들을 실어 날랐을 뿐이었는데 오늘은 배에서 내린 승객들을 다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골프카가 많다. 비가 오는 탓인지 관광객들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서둘러 차에 오른다. 장애인들이나 거동 불편한 노인들에게는 고마운 차다. 하지만 천천히 걸어서 돌아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섬. 이 작은 섬에서 두 다리 튼튼한 사람들마저 탈것에 의지 하는 것은 씁쓸하다. 장사꾼들만 탓할 일은 아니다. 어쩌겠는가. 관광객들 스스로 걷기를 원치 않는 것을.

마라도는 솟아난 구릉 하나 없이 평평하다. 이 작고 낮은 섬이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게 붙들어주는 힘은 무엇인가. 삶의 무게일까. 삶의 부력일까. 애기업개는 오랜 세월 섬의 수호신이었다. 살아서 처참했으나 죽어서 신이 된 여자아이. 신이 된 아이를 모시는 애기업개 당은 섬의 서쪽 모퉁이에 없는 듯이 있다.
▲ 송악산 해변의 인공 동굴. 일제가 인간어뢰를 숨겨 두기 위해 만들었다.ⓒ강제윤

옛날 가파도와 마라도에 사람이 살지 않던 시절, 모슬포 사는 이씨 여인이 버려진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여인은 관에 신고했으나 부모를 찾지 못했고 아이는 여인에게 맡겨졌다. 아이가 없던 여인은 딸처럼 길렀다. 아이가 여덟 살 되던 해 여인은 아이를 낳았다. 주어다 기른 아이는 애기업개가 되었다. 애기업개는 구성진 소리를 잘도 했다. 갓난아이가 울 때면 애기업개는 얼르며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아가 아가 우지마라. 아방 있고 어멍 있는 아가 너 왜 우느냐."

애기업개는 울음을 삼키며 아이를 달랬다. 그 무렵 마라도는 금(禁)섬이었다. 섬 주변에 해산물이 넘쳐나도 물살이 거세 좀처럼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매년 봄 망종 때부터 보름간은 물살이 없어 입도(入島)가 허가 되었다. 어느 봄 마라도의 '잠수'들이 테우를 타고 마라도로 들어갔다. 테우 주인인 이씨 부부는 아이와 열 세 살이 된 애기업개를 함께 데리고 섬으로 갔다. 잠수들은 지천으로 널린 해산물을 손쉽게 건저 올렸다. 식량이 다 떨어질 즈음 잠수들은 떠날 채비를 했다. 테우가 섬을 벗어나려 하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다. 떠날 것을 포기하고 섬으로 돌아오니 바람은 잠잠해 졌다. 다시 떠나려면 또 바람이 거세졌다. 그러기를 여러 날 반복됐다. 잡아놓은 해산물까지 다 먹고 없어졌다. 물과 양식이 아주 바닥나 버린 날 저녁 잠수들은 기어코 내일은 떠나기로 결정했다.
▲ 마라도 애기업개 당. 아이는 슬픔의 힘으로 신이 된 것일까.ⓒ강제윤

다음날 아침, 가장 연장자인 잠수가 꿈 이야기를 했다. "어젯밤 꿈에 애기업개를 두고 가지 않으면 모두 물에 빠져 죽는다."고 했다. 테우의 주인 이씨 부인 또한 같은 꿈을 꾸었다. 잠수들은 애기업개를 놓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씨 부인은 기저귀 하나를 걸어놓았다. 테우에 사람들이 오르자 다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씨 부인은 애기업개에게 기저귀를 걷어오도록 시켰다.

애기업개가 기저귀를 가지러 간 사이 테우는 떠나갔다. 애기업개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테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3년 동안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마라도에 가지 못했다. 3년 후 사람들이 다시 마라도에 들어갔을 때 애기업개는 하얀 뼈로 남아 있었다. 잠수들은 뼈를 거두어 묻었다. 후일 마라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 한 노인의 꿈에 자꾸 애기업개가 나타났다. 섬사람들은 애기업개가 죽은 자리에 당을 만들고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 마라도 앞 바다. 깊은 물속까지 투명하다.ⓒ강제윤

애기업개당에서 예수를 만나다

애기업개당은 처녀당, 할망당이라고도 한다. 커보지도 못하고, 늙어보지도 못하고 죽은 아이가 처녀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다. 섬의 수호신으로 자라난 것이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나약한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악습이다. 스스로의 악행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희생자를 신으로 떠받드는 것 또한 낯설지 않은 풍습이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죄 없는 어린 것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지로 몰았던 사람들. 가장 비천하게 살다 참혹하게 죽은 어린아이가 마침내 그를 죽인 자들의 신이 됐으니 이는 기뻐해야 할 일인가 비통한 일인가.
▲ 묶어 키우지 않는 마라도의 개들은 한 껏 자유롭다.ⓒ강제윤

나그네는 애기업개 당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전능한 신으로 모셔진 예루살렘의 사내를 본다. 예수나 애기업개나 그들은 사후에도 시달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죽은 사내와 아이를 신으로 모시고 온갖 소원과 부탁을 청하며 영혼이 한시도 안식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애기업개당은 1995년 무렵 한차례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어떤 기독교인이 미신이라는 이유로 당을 망가뜨렸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신전을 파괴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끝내 몰랐을 것이다.

석 달 열흘 불에 탄 마라도 원시림

마라도에는 숲이 없다. 인공조림으로 소나무들을 심었으나 바람 때문에 성장이 더디다. 본래부터 마라도가 이처럼 민둥한 땅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살기 전 마라도는 원시림으로 덮인 울창한 숲이었다. 금(禁)섬이 풀리고 마라도에 사람들이 다시 이주해 살기 시작한 것은 1883년 무렵이었다.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 살길을 찾아 탄원을 한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 처음 섬에 들어온 도박꾼과 일행이 몇 뙈기 밭을 일구기 위해 수 천 년 원시림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마라도의 모든 것을 태우는데 석 달 열흘이 걸렸다는 전설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천년 세월이 불타는데 석 달 인들 길다 하겠는가.
▲ 섬에서는 대문 밖에 무덤이 있어도 낯설지 않다.ⓒ강제윤

나무를 다 없애버렸으니 섬에는 땔감이 없었다. 그래서 옛날 마라도에서는 순전히 연료를 얻을 목적으로 소를 길렀다. 유목민들처럼 소똥을 주어다 넓적하게 빚어 돌담이나 잔디밭에 널어 말린 뒤 땔감으로 썼다. 전기가 없고 등잔 기름이 없던 시절에는 빅게(수염상어)와 도롱이(불범상어)를 잡아 내장을 끓인 뒤 기름을 만들어 불을 밝히기도 했다.

생사 불이의 섬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방수가 되는 줄 알았던 잠바는 무용지물이다. 우산을 준비했어야 했다. 그도 아니면 비옷이라도 사야 했었다. 이미 속옷까지 다 젖은 다음 후회는 부질없다. 골프카를 타고 서둘러 섬을 돌아본 사람들은 다들 선착장으로 갔을 것이다. 비에 젖은 몸에 한기가 밀려온다. 개들도 비를 피해 팔각정으로 몰려든다. 몸이 젖는다고 비를 탓할 일은 아니다. 오랜 세월 나그네는 궂은 날씨 탓만 해 왔다. 비 오는 날 비옷을 준비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애꿎은 날씨를 핑계로 허송세월 했다. 청춘이 어리석은 구름처럼 흘러가고 말았구나! 나그네여.
▲ 마라도 분교ⓒ강제윤

제주 어느 곳처럼 마라도에도 집 근처에 무덤이 있다. 제주만이 아니다. 섬에서는 대문 밖에다 무덤을 쓰는 일도 흔 하다. 무덤은 밭 가운데도 있고 뒷마당에도 있다. 땅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섬사람들이 죽음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어제 밤에 함께 술 마시던 친구가 오늘 죽었다 해서 통곡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섬사람이 본래 무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섬사람들에게는 죽음도 일상인 까닭이다.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담박한 것이다. 생사불이(生死不二)를 늘 목전에서 보고 사는 삶. 삶의 터전이며 생명의 밭이기도 한 바다가 언제든 죽음의 수렁이 된다. 오늘은 상가에 조문 와 있지만 나 또한 내일 바다에서 죽을 수 있다! 바다가, 바람이, 풍랑이 섬사람들을 무문관에 들게 했다. 생사불이의 화두를 깨치게 했다.

하지만 마라도에는 이제 더 이상 무덤이 생기지 않는다. 좁은 섬에 더 이상 무덤을 쓸 땅도 없을 터지만 그보다는 섬사람들의 삶의 근거지가 더 이상 섬이 아닌 까닭이다. 섬은 바다와 관광객들을 상대로 수입을 거두어들이는 직장이며 영업장이 되어 가고 있다. 민박이나 횟집을 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토박이들이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토박이들도 죽으면 제주 본섬에 있는 자식들 곁으로 가서 묻힌다.
▲ 바람 때문에 소나무들이 좀채로 자라지 않는다. ⓒ강제윤

한 몸의 섬과 바다

배 시간이 다가와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다시 파도가 치고 폭풍 주의보가 내리면 또 며칠 배가 다니지 못할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섬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파도가 점점 거세진다. 이 바람에도 섬들은 무사할까. 마라도나 가파도처럼 낮은 섬들이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물속에 잠기지 않고 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주 섬을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땅이라 생각한다. 가라앉을 듯 가라앉을 듯 불안스레 떠있는 섬들. 그러나 섬은 바다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섬은 바다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다. 마라도나 가파도 같은 한 조각 섬이 큰 바람이나 풍랑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태초부터 섬은 바다의 속살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섬과 바다는 한 몸이다. 때로 바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섬의 몸에 상처 입히기도 하지만 그것은 탄압이 아니다. 배척이 아니다. 서로 붙어사는 것들끼리의 사소한 다툼이다. 화가 가라앉으면 바다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평화를 돌려준다. 섬을 먹이고 살찌운다. 이 폭풍 끝에도 마침내 섬들은 무탈하리라.
▲ 마라도ⓒ프레시안

누리집: http://www.pogildo.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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