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거문리 선착장에서 동도 행 나룻배를 탄다. 하루 세 번 왕래하는 나룻배는 동도의 유촌과 죽촌, 서도의 장촌 등을 오가며 주민들을 거문리와 이어준다. 거문리에서 장을 보고 동도로 돌아가는 노인 셋이 나룻배에 탔다. 나룻배는 수상 택시이기도 하다. 편도 요금이 2 천 원이지만 정기 운항 시간이 아닌 때 배를 부르면 만원이다. 야간에는 비용이 두 배로 할증 된다. 나그네는 동도 유촌 마을에서 하선 한다. 요 근년 거문도에서는 쑥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약쑥으로 이름이 나 농가 소득에 큰 보탬을 준다. 암 환자가 거문도 쑥을 먹고 완치됐다는 소문이 퍼진 뒤 거문도 쑥의 주가가 부쩍 올랐다. '쑥대밭'이라는 한탄은 옛말이다. 쑥은 이제 밭에서도 한자리 크게 차지했다. 해풍에 강한 쑥이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면 잎이 바짝 마른다. 해풍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검은 비닐을 덮어 재배한다.
동도의 유촌 마을에는 조선말기 유학자 귤은(橘隱) 김류(金瀏)의 사당이 있다. 귤은은 퇴계, 율곡 등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추앙되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밑에서 수학 했으나 출사 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고향 거문도와 청산도 등지에서 제자를 길러내며 야인으로 살았다. 1854년 4월, 푸차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에 기항했다. 그 때 귤은은 만회(晩悔) 김양록(金陽錄)과 러시아의 함선에 올라 필담을 나누고 '해상기문'(海上奇聞)을 남겼다. 당시 푸차틴 제독은 귤은 등에게 통상 문서를 건네며 조선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철저한 쇄국 정책을 견지 하고 있었던 까닭에 문서는 전달 될 수 없었다. 귤은은 귤은재집(橘隱齋集) 속의 <해상기문>에 러시아의 문서를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푸차틴 제독의 비서관 곤차로프도 거문도 기항 후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거문도를 "마치 물속에 떠 있는 상자 같은 섬"으로 묘사 했다. 곤차로프에 따르면 러시아는 섬사람들을 배로 초대해 필담을 나누고 홍차와 빵, 비스켓, 럼주까지 대접 했으며 주민들은 답례로 생선과 물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거문도 사람들이 러시아 함선에서 대접을 받고 생선 등을 전해 준 사실은 <해상기문>이나 조선 측 기록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쇄국정책에 반하여 이양선과 우호적 관계를 맺은 것이 알려지면 처벌 받을 것을 염려한 주민들이 이를 숨긴 때문일 것이다. 거문도 사람들이 외국 군함에 우호적으로 대응한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뿐이었을까. 거문도는 오랜 세월 국제 항로에 위치해 외국인들과 접촉 경험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거문도 사람들은 폐쇄적인 조선 정부에 비해 더 개방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귤은의 사당은 교회 건물 뒤편에 있다. 거문도에는 교회가 7개나 된다. 교회의 그늘에 가려진 사당은 기독교의 위세에 눌린 전통문화의 상징 같다. 그래도 사당은 대접을 받는 편이다. 섬을 오랫동안 지켜온 토착 신앙은 흔적도 없다. 섬의 당산과 당집은 더 이상 돌보는 이 없이 산 속에 버려져 있다. 외래 신의 완벽한 승리. 영국이나 러시아가 군사력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거문도 '완전 정복'의 꿈을 그들의 신이 이루어냈다.
"지붕이 날아갈까 봐서 무섭소."
해안도로를 따라 유촌에서 죽촌으로 넘어간다. 죽촌 마을 앞길은 물고기 양식장 사료로 쓸 냉동 물고기 하역 작업이 한창이다. 사료 창고에서는 물고기를 자르는 기계소리가 요란하다. 해안가 낡은 오두막 집 마당에서는 할머니 한분이 생선을 손질하고 앉았다.
"말렸다가 반찬 하실려구요."
"아닙니다. 냉동실에 넣어 뒀다가 아이들 오면 먹일라고 그럽니다. 칵칵 씻처갔고 배를 뜹니다. 이거 이리 좋다요. 한데 좀 빈내가 납니다"
할머니는 선한 인상처럼 말씀도 참 곱다. 학꽁치가 맛있기는 한데 날것으로 먹으면 조금 비린내가 난다는 말씀이다. 학꽁치는 할머니가 잡은 것이 아니다. 거문리에 사는 할머니의 조카가 가두리 양식장 바지에서 뜰채로 뜬 것이다. 이 땅의 어머니 누가 아니랴. 할머니도 자식들을 키워서 모두들 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사신다.
"자식들 있어도 다 객지가 사요. 큰 아들은 서울서 살고. 나는 이라고 삽니다. 이게 편합니다. 시골 사람은 시골 사는 게 좋습니다."
몸은 편찮아도 혼자 사는 것이 마음은 편타.
"그렇잖아도 자식들은 집을 폴라고 합니다. 이리 헐었어도 바닷가라 폴라는 사람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뭐 하러 집을 폴아야' 그랬습니다. 나가 살았응께, '죽을 때 까정은 여그서 살란다' 그랍니다. 그런데 여기는 뭐하러 오셨소."
"구경 삼아 왔습니다."
"나는 뭐 폴로 다닌 줄 알았습니다."
배낭을 맨 허름한 입성의 나그네가 장돌뱅이처럼 보이셨나 보다.
"저그 방파제 가면 참 좋습니다. 사람이 여름 되면 넘칩니다. 발에 걸립니다. 쪼깐 안즈꺼인디 그라요. 다리 아픈데 서 있고 그라요. 고기 하나는 거문도가 흔하요."
자식들의 부양 능력 여부와 관계없이 자식이 있다는 '죄' 하나로 혼자 사는 많은 극빈층 노인들이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지 못한다. 팔순의 할머니도 오랜 세월 자식이나 국가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살아오셨다.
"자식들 사정도 에럽고. 아들네 있다고 돈 한 닙도 못 타 묵고, 도회지는 똥도 돈 아닙디야. 그래도 올부터는 달달이 빠딱 8만 4천 원씩, 두 번 얻어먹었습니다. 근디 거문리로 가서 타야하니 나룻배 성게만 오고가고 4천 원씩이나 나갑니다."
그나마 올해부터는 기초 노령 연금을 타게 된 것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된다.
"그래도 살기는 여가 좋습니다. 어지간하면 여기는 살아요. 바닷가 가서 찬거리 해다 묵고. 일해 주고 얻어 묵기도 하고. 내 보지런 하면 삽니다. 께을러서 못하께 그러제라."
거문도에서 나고 자라 거문도로 시집온 할머니. 선원 생활하며 늘 바깥으로만 떠돌던 남편은 이제 집에 정주하는가 싶더니 바로 세상을 떴다. 그때 남편의 나이 쉰다섯.
"아범도 청춘에 가버리고. 혈압이 높아서 그만 밥 잣다가 넘어가 버립디다. 자식들 키우고
입때껏 혼자 사요. 살았을 찍에도 2년마다 한번 옵디다. 고깃배 타고 외국 댕기느라고."
"할머니, 참 고우세요."
"무슨 다 늙어가 여망 꽃까정 핏는 걸요."
할머니는 살풋 웃는다.
"뭐 할라고 여망 꽃은 피능가 모르겄소. 젊어서는 이삐단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만."
나이 팔십에도 예쁘단 소리가 듣기 싫지 않으신 할머니, 천상 여인이다. 할머니의 집은 초가집을 지붕만 스레트로 바꿨다. 그도 세월이 지나니 낡을 대로 낡아 집은 곧 허물어질듯 위태롭다. 할머니는 지금도 해변에 떠밀려온 나무를 주어다 불을 때고 산다.
"바람이 불 때 그중 깝깝하요. 혼자 사께 태풍이 오면 그중 무섭소. 집이 허께, 지붕이 날아갈까 봐서 무섭소."
할머니는 손놀림을 쉬지 않지만 바구니에는 아직도 학꽁치가 가득하다. 나그네는 나룻배 시간에 맞춰 일어선다.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오래 살아 뭐 하꺼시오. 늙으면 가야제라. 말이라도 고맙소만."
말을 그렇게 하셔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나그네가 잠깐 말벗이라도 되어 드렸던 것일까.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 하신다.
"고맙소, 왔다 가니라고 고맙소. 갑시다잉."
서도
거문리에서 삼호교를 건너 왼쪽 길을 따라 걷는다.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은 호젓하다. 전수월 산에서 '무넹이'를 건넌다. 등대가 있는 수월산은 '무넹이'로 서도와 이어졌다. '무넹이는' 좁고, 낮고, 위태롭다. 태풍이나 해일 때면 바닷물이 넘나든다 해서 '무넹이'다. 물넘이. 여기서 거문도 등대까지 가는 상록수 숲은 거문도 도보 여행의 백미다. 해풍에 강한 상록수 터널이 등대까지 가는 나그네를 보호한다. 길가에는 후박나무, 가마귀쪽나무, 자금우, 생달나무, 사스레피나무, 동백나무들이 무리지어 서 있다. 거문도 등대는 1905년에 4월부터 100년 세월 동안 매일 15초 마다 한 번씩 불빛을 밝혀 왔다. 등대는 처음 일본 제국주의 조선 점령의 앞길을 밝히는 식민의 등대로 건립됐지만 이제는 거문도 바닷길의 안전을 지키는 생명의 등대다.
등대를 돌아보고 나와 장촌 가는 길, 섬 사람 하나 낚시 줄을 부지런히 바다로 던지고 있다. 수제비 뜨는 폼으로 낚시를 날리는 것은 숭어를 잡기 위해서다. 숭어는 일반 낚시로는 잘 잡히지 않는다. 대부분은 그물로 잡지만 간혹 이런 홀치기 낚시로도 잡는다. 해안 가까이 떼로 몰려다니는 숭어를 잡아채는 것이다. 홀치기 꾼에게도 오늘은 별무 소득이다. 한두 마리 드물게 다니는 숭어를 나꿔채기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장촌 마을에는 거문도뱃노래 전수관이 있고 그 바로 옆에 장촌 유물 전시관이 있다. 마을 단위의 유물관이 있다는 것은 희귀하고 반가운한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전시관 모두 문을 걸어 두었다. 여름철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때만 여는 것일까.
거문도의 인어(人魚), 신지끼
거문도에도 남해안의 다른 섬들처럼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살이가 시작됐다. 1976년 장촌 마을의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 거문도가 한반도의 고대부터 국제 해상 무역의 주요 항로였다는 증거다.
지금은 교회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오랜 세월 거문도 사람들을 지켜 준 것은 '백도'에 대한 신앙심이다. 주민들은 백도 근해에서는 사람이 빠져죽은 적이 없다고 믿어왔다. '백도'라는 수호신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백도와 함께 거문도 신앙의 또 한축은 '신지끼' 라는 인어였다. 장촌 해변은 신지끼 전설이 서린 곳이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거문도 전역에서 신지끼 목격담이 전해졌다. 서양과는 달리 한국에서 인어의 전설은 드물다. 인천의 장봉도에도 인어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일회적인 목격담이다. 장봉도의 인어는 신지끼처럼 섬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지 않다.
신지끼는 주로 달 밝은 밤이나 새벽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얀 살결의 길고 검은 생머리 인어 신지끼가 절벽에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면 어김없이 큰 풍랑이 몰려 왔다. 처음에 사람들은 신지끼의 저주로 풍랑이 오는 것이라 여겨 신지끼를 기피하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차츰 그것을 달리 해석하기 시작 했다. 신지끼의 출현을 저주가 아니라 풍랑이 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신호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신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악마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악마가 될 뻔한 신지끼를 섬의 수호신으로 만든 것은 섬사람들의 지혜였다.
장촌 마을 뒷산 중턱에 자리 잡은 초등학교 옆길을 돌아 녹산 등대로 간다. 등대가 있는 녹산과 동도 사이의 좁은 해협은 거문도 내해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등대로 가는 해변에는 묘지들이 많다. 이 섬의 공동묘지일까. 유채꽃밭에 누운 두 기의 무덤이 발길을 붙든다. 봄볕 아래 꽃 무덤이라니! 하나는 봉분이 크고 또 하나는 작다. 나란하지 않고 무덤이 위 아래로 자리 잡은 것은 망자의 항렬이 동격이 아니란 증거다. 무덤의 주인은 부부가 아닐 것이다. 혹 큰 봉분은 합장한 부부 묘고 작은 봉분은 홀몸으로 살다간 자식의 무덤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누구의 무덤인들 어떠랴. 대다수 섬사람들처럼 저 유택의 주인 또한 살아생전 풍요로운 삶 따위는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섬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쳤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는 마침내 고단한 섬살이의 보상을 받았다. 생의 시절, 대궐 근처에는 가보지 못했을 그가 오늘은 꽃 대궐의 주인으로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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