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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영국군 수병 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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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영국군 수병 묘지에서

강제윤의 '섬을 걷다' <14> 거문도 (상)

셋이면서 하나인 섬

세계는 자신이 아는 만큼 존재한다. 세 시간의 항해 끝에 '거문도 사랑'호가 거문도 내해로 진입한다. 여수항을 출항한 여객선은 나로도와 손죽도, 초도 등의 섬을 경유해 거문도로 왔다. 거문도에 오기 전까지 나는 이 항로의 중간에 손죽도와 초도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두 섬은 나의 세계에는 없는 섬이었다. 거문도 여정을 통해 나의 지도에는 두 개의 섬이 더 생겼다. 내 세계는 그만큼 넓어 졌다.

여수에서 114 킬로, 먼 바다로 나왔지만 거문도 내항 바다는 잔잔하다. 서도와 동도, 고도 세 섬이 팔을 벌리고 서로를 품어 내해를 이루었다. 여객선은 고도에서 닻을 내린다. 고도 거문리 포구는 천연 방파제의 보호를 받는 천혜의 항구다. 거문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다. 동도와 서도, 고도 세 섬이 모여 거문도를 이룬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세 섬은 어깨 걸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낸다. 세 섬은 오로지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한 섬이다. 거문도는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다.

거문도처럼 두세 개의 섬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제주의 추자도는 상추자, 하추자, 통영의 사량도는 상도, 하도 두 개의 섬이 하나의 이름을 가졌다. 거문도는 서도가 그 중 크고 동도, 고도 순이다. 고도와 서도는 다리로 이어졌다. 거문도의 행정과 상업 중심지는 가장 작은 섬, 고도다. 고도의 거문리에 대부분의 민박, 횟집, 식당을 비롯해 면사무소와 파출소, 농 수협 등의 관공서가 몰려 있다.
▲ 거문도 선창가에서 뼈를바른 갈치와 학꽁치를 건조하고 있다.ⓒ강제윤

여객선도 서도와 동도를 경유 하지만 최종 목적지는 고도의 거문리다. 작은 섬 고도가 거문도의 중심지가 된 것은 외세의 영향이 크다. 1885년부터 2년간 영국 군대의 거문도 무단 점령 때 영국군은 군대의 주둔을 위해 고도에 항만을 개발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행정의 중심이었던 고도는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이자 물류 중심지가 됐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거문도 항에 내린 단체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서둘러 유람선으로 이동한다. 백도 유람을 목적으로 거문도를 찾은 관광객들. 이들 대부분이 노인이다. 여행사를 통해 온 단체 관광객들은 유람선을 타고 두 시간 남짓 39개의 바위섬, 백도를 구경한 뒤 거문리 포구로 돌아온다. 관광객들은 민박집에서 일박을 하고 아침이면 거문도산 갈치와 학꽁치, 돌미역 등을 사들고 떠난다. 백도 관광은 전형적인 효도관광 코스다. 거문도는 백도 관광의 중간 기항지로 성업 중이다.

"도미는 양식은 색이 검고 자연산은 빨갛지"

거문도는 손죽도, 초도 등과 함께 여수시 삼산면에 속한 섬이다. 삼산면의 인구 대부분이 거문도에 산다. 한때는 거문도에만 1만 3천의 사람이 살았으나 현재는 삼산면 전체에 2300여 명만 남았다. 거문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사철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관광업의 은덕이 거문도 전체에 미치지는 못한다. 이 땅 어디나 그렇다. 관광객이 몰려도 혜택은 일부 상업 지역에 국한 된다. 거문도 관광 산업의 이익은 고스란히 여객선과 유람선 업자, 거문리 상인들 몫이다. 섬뿐이랴. 온 나라가 개발의 광풍에 휩싸여 일확천금을 꿈꾸지만 개발 이익은 결코 우리 것이 아니다.
▲ 국립 공원 거문도에서 새장에 잡힌 가련한 동박새. ⓒ강제윤

3월 말의 거문도 어판장은 아직 활기가 없다. 4월 중순은 돼야 갈치 배들이 출항을 시작한다. 6월이면 갈치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와 선창가에서도 갈치를 낚을 수 있다. 갈치 잡이는 11월이면 파장이다. 겨울부터 초봄까지는 삼치가 더러 잡히지만 많지는 않다. 수협 위판장에는 갓 잡아온 굵은 삼치들만 몇 상자 놓여있다. 관광객들이 사가는 갈치는 지난 가을 잡아다 냉동 저장 했던 것들이다. 생 갈치 외에도 선창가에서 잘 팔리는 상품은 뼈를 발라 말린 갈치와 학꽁치포다.

거문도 내해에는 가두리 양식장이 많다. 서도와 동도가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덕분에 양식이 가능하다. 가두리에서는 돔과 우럭, 문어, 전복 등이 길러진다. 횟집마다 자연산 회를 판매 한다고 붙여 놓았지만 양식 물고기와 구별은 쉽지 않다. 거문리 포구 작은 슈퍼 앞 평상에 노인 두 분이 앉아 있다.

요즈음은 주민들도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기가 쉽지 않다 한다.
"고기가 옛날 하고 틀려갖고. 옛날에는 더러 낚아다 묵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어장배들이 싹쓸이 해빙께 낚어 묵도 못하요."

그렇다면 자연산만 판다는 거문리 횟집의 물고기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도미나 우럭 같은 것은 거의 다 양식이지. 자연산도 있지만 많진 않고. 그래도 여그 물이 워낙 깨끗하니까 싱싱하고 괜찮아요. 양식이라도."
▲ 거문도 영국군 수병 묘지.ⓒ강제윤

노인은 양식과 자연산의 구별법을 알려준다.
"도미도 양식장에서 나온 건 깜장 색이 많고, 자연산은 암만해도 빨간색이 많이 돌지. 멍게같은 건 양식은 쓰디 써. 자연산은 달디단디."

노인은 공무원으로 일하다 10여 년 전에 퇴직 했다. 며느리가 국수를 삶아놨다고 노인을 부른다. 노인은 배가 안 고프다며 나중에 먹겠다 한다. 며느리는 국수가 퍼질 것이 걱정이지만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그물로는 일체 고기를 못 잡게 해야 해"

거문리에 한국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8.15 해방 직후부터다. 일본인들이 살다 떠난 집들을 적산 불하 받았다. 일본인들은 "얼마 있다가 곧 올테니 잘 관리하고 있으라" 당부 하고 떠났지만 헛된 꿈에 불과했다. 거문리에는 아직도 일본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 겉모양은 바뀌었어도 골조는 그대로다. 저 노래방 건물도 일식 목조 건물을 개조 한 것이다. 노래방 건물에는 나까끼지라는 일본인이 살았었다. 그는 거문도의 어패류를 수집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중개상이었다.

"한 십 년 전만 해도 나까끼지 아주머니가 여길 찾아오곤 했는데, 자손들 데리고. 요즘엔 발 딱 끊어 버렸네. 죽어 부렀는가 어쩐가."

거문리 부둣가에는 제법 큰 어선들이 수 십 척 정박해 있다. 어로를 준비하는 그물 손질이 바쁘다. 하지만 큰 어선들은 대부분 거문도 배가 아니다.
▲ 거문리 앞바다ⓒ강제윤

"저 배들은 거의 여수 같은 타지 배들이고 여기 배는 몇 척 안 되요. 사실은 요거이 새우 조망이라고 고대구리 저인망 단속을 심하게 하니까 새우조망 허가를 받아서 나오는 것인디. 허가 기간이라 해야 불과 이 삼 개월 밖에 안 되요. 나머지는 불법 조업이지. 다들 단속 대상이에요. 어떤 섬들은 주민들이 단합해 갖고 그물로는 일체 고기를 못 잡게 하고 낚시만 하게 한다든데. 그래야 어장도 살리고 바다도 보호되고 그럴텐데 그게 잘 안되요."

해경이 단속을 하지만 어린 물고기까지 싹쓸이 하는 저인망 불법 어업의 근절은 쉽지가 않다.

"적발 돼봐야 몇 백 만원 벌금 내빌고 또 잡으면 금방 벌어 빌제. 그라이 고대구리가가 근절이 안 돼. 그러니 고기가 씨가 마르재."

어초를 심어 어장을 살리려는 정부의 노력도 있지만 노인은 성과에 대해 부정적이다. 거문도 어초 사업은 실패 했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물속에 안 들어가 봤으니 알 수가 있나. 백 개를 넣는다고 해놓고 백 갤 넣는지 열 갤 넣는지. 거기다 어초 넣는 것도 순 엉터리야. 어디가 뻘 구석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우에서 쌔려 넣어버려. 거기가 고기가 살 만한 곳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집어넣기만 하지."

어초를 넣어 물고기를 키워도 불법 조업을 하는 고대구리 배들이 어초 주위를 그물로 둘러싸서 싹쓸이 해가는 통에 남아나지 않는다. 게다가 찢겨진 그물이 어초에 쌓이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정부나 어민들만이 아니다. 노인은 낚시꾼들도 큰 문제라고 생각 한다. 낚시꾼들이 쓰는 밑밥이 바다 속 백화 현상의 또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 거문도 백도는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만들어낸 비경이다.ⓒ강제윤

"밑밥에 파우더 같은 걸 섞어 뿌리니 그게 방부제라 밑밥이 썩지도 않아. 해초가 없으면 고기는 살아진당가."

그렇다고 낚시꾼들이 찾아오는 것을 말릴 수도 없어 주민들 끼리 밑밥 규제 논의가 있었다. 낚시 배 주인들의 반대로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즈그도 묵고 살라고 그라는디 어쩔 것이여. 한동안 대립이 되가지고 인심만 나빠지고."

어족이 고갈되면서 요즈음은 거문도를 찾는 낚시꾼들의 수도 많이 줄었다. 낚시꾼들은 가까운 바다가 죽으면 더 먼 무인도와 여 등을 찾아 나선다. 물고기가 떠난 바다는 적막하다. 죽어가는 바다를 보며 노인은 깊이 탄식 한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밑밥을 안 넣어도 고기가 많이 물렸는데 요새는 밑밥을 주고 홀케도 고기가 없어. 나 살자고 후손의 바다 죽이는 일이요."

영국군 수병 묘지의 봄

거문도 파출소 뒤 해안 길을 따라 6백 여 미터를 가면 영국군 수병 묘지가 있다. 묘지에는 화강암 비석과 나무 십자가, 두 개의 묘비가 서 있다. 이곳에 영국군 수병 셋이 누웠다. 화강암 묘비에는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당시인 1886년 6월 11일 폭탄 사고로 죽은 수병 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무 십자가는 영국군이 물러간 후에 묻힌 영국군 병사의 묘다. 나무 십자가 묘지의 주인은 1903년 10월에 사망한 군함 알미욘 호의 수병 알렉스 우드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떠난 후에도 1930년대까지 항해 도중 이 섬을 드나든 것으로 전해진다.

1885년 4월,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핑계로 영국 내각은 중국 주둔 함대 사령관 윌리암 도드웰 해군 제독에게 거문도 점령 명령을 내렸다. 거문도 내해는 수심이 깊어 큰 군함의 정박이 가능하고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의 대피항이다. 게다가 대마도와 제주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요인은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거문도는 오랫동안 영국과 러시아 두 제국이 눈독을 들였다.

1885년 4월 15일, 영국 군함과 수송선은 거문도를 점령한다. 영국제국주의 해군은 1887년 2월까지 거문도에 주둔한다. 이른바 '거문도 사건'이다. 영제국주의는 러시아 견제를 핑계로 거문도를 점령했지만 조선영토를 식민화 하려는 야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 정부는 거문도가 점령당한 사실을 20 여 일 동안이나 알아채지 못했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 40여 년 전에 이미 해군 함정 사마랑호를 동원해 제주에서 거문도까지 해역을 한 달 여에 걸쳐 정밀 탐사한 바 있다. 그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이었던 해밀턴의 이름을 따 거문도를 해밀턴 항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다. 거문도 점령 후 영국군대는 사람이 적게 살던 고도에 군대 막사를 짓고 항만 공사를 했다. 테니스 코트와 당구장 등도 이때 처음 거문도에 생겼다. 2년 동안 거문도 주민과 영국 점령군은 비교적 사이좋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영국군은 주민들에게 치료약을 공급하고 노임을 지불해 가며 공사 일을 시켰다. 섬 주민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한 영국군의 유화 전략이었겠지만 조선 왕조 하에서 강제 부역에만 종사했던 섬 주민들은 그것을 고맙게 여겼다. 섬 주민들은 영국군과 협상 차 거문도에 온 조선 정부의 대표 엄세영에게 "자기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노임 받고 일하는 것을 방해 한다"고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전한다. 조선 왕조 지배 세력의 섬에 대한 수탈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재빠른 일본 상인들은 서도에 유곽을 만들었다. 구전에는 영국 수병들이 밤중에 헤엄을 쳐서 유곽으로 가다 빠져 죽기도 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해변의 묘지에 묻힌 수병들은 어떻게 죽어 갔을까. 군사 훈련 중 폭발 사고로 죽은 것인지 거문리 마을 노인의 말처럼 "영국 놈들이 밤에 몰래 술 먹을라고 헤엄쳐오다 빠져 죽었"는지 오늘의 우리가 정확한 이유를 알 길은 없다. 병사들의 죽음이란 대체로 신비와 용맹의 이름으로 미화되어 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상은 어이없는 죽음도 군대의 명예를 위해 조작되기도 한다. 이 묘지의 주인들이라고 다를까.

제국주의 침략의 말단 하수인이었던 어린 수병들, 그들은 고향을 떠나올 때 이역만리 외로운 섬에 묻히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묘지 주변의 유채는 이미 만개했다. 길가 밭에 심어진 외콩 꽃도 환하게 피었다. 동백꽃은 한참 절정을 향해 타오른다. 떨어진 동백꽃들로 숲은 핏빛이다. 꽃 시절이 오는가 싶더니 꽃 시절이 간다. 한 나무 가지에서도 어떤 꽃은 피어나고 어떤 꽃은 시든다. 꽃들에게도 꽃 시절은 짧다. 나그네의 고향에서 뻘뚝이라 부르던 보리수 열매는 주황빛으로 익어 간다. 뻘뚝을 한 웅큼 따서 입에 넣는다. 달고, 시고, 쓰고, 떫은 즙이 입 안 가득 고인다.
▲ 거문도ⓒ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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