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명박 정부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북한의 공세가 심상치 않다. 북측은 남측이 제기하고 있는 '인권문제', '상호주의'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입장을 나타냈다. 지난달 26일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적이 핵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장소를 빨리 확인해서, 적이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타격하는 것"이라는 김태영 합참의장의 발언이 시발점이었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북핵 문제가 타결되지 않으면 개성공단 확대는 어렵다"라고 말한 것도 빌미가 됐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대응방침을 확정한 듯 조금씩 대응 수위를 높여갔다. 개성 남북경협사무소 남쪽 요원 철수(3월 27일), 미사일 발사 시험(3월 28일), 군부의 남북 대화 중단 선언(3월 29일)이 이어졌다. 4월 1일에는 <노동신문>이 이 대통령에게 '역도' '매국 역적'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북한 군부는 3일에도 전날 국방부가 김태영 의장의 발언이 "곡해된 것"이라고 밝힌 것을 "한갓 변명"이라고 일축하며, '군사적 대응조처'를 거론한 전통문을 보냈다. 북측은 10일 금강산에 상주하는 조달청 직원까지 내보내 남측 당국자의 군사분계선 통과를 봉쇄해 버렸다.
北, 모든 공개 창구 닫아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19일 김하중 통일부 장관만 지목해 '반통일 역적' 등의 원색적 표현을 동원해 비난한 데 이어 22일 유명환 외교장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외교안보라인 전반에 대해 실명 비난했다는 점이다.
이는 우선 북한이 사실상 남북간 모든 공개 창구를 닫아 버린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의 한 대북전문가는 "북한이 3월 말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나서기로 결정했으며,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을 주도했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비롯한 대남고위라인이 대부분 활동 중지 상태에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남측의 경협관계자를 만난 북측의 한 관계자도 "올 상반기에 남측 인사들이 대규모로 방북해 공동행사를 치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라고 밝혔다.
이같은 움직임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은 '2007 남북정상선언'에 대한 이행 의사를 남측 당국이 보일 때까지 당국간 대화를 중단하고 사안별로 이명박 정부에 대해 공세적으로 나올 것으로 보인다. 또 대규모 민간 공동행사를 미루고 제한적으로 남북 교류와 협력사업을 추진하면서 당분간 '2007 정상선언' 고수와 실천을 위한 6.15 민족공동위원회 교류사업에 주력할 가능성이 커 졌다.
김영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겸 민족화해협의회 회장이 5일 "남조선(남)의 현 위정자들이 북남 사이 화해와 협력을 바란다면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며 두 선언에 기초한 남북관계의 발전을 촉구한 것도 북한의 이같은 기조를 보여준다.
정부 내 미묘한 변화 감지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북측과의 대화 의지를 몇 차례 표명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3월 26일 통일부 업무보고 때 선거가 끝나면 남북간 협상이 여러 면에서 시작될 것이라면서 그때 남북관계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상대로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진영이 압승하면서 이 대통령은 남북대화 추진에 어느 정도의 정책적 자율성을 확보했다. 4월 8일 북미 싱가포르 회동에 따른 북핵 문제의 진전 또한 정부의 대북정책 선택 폭을 넓혀줬다. 북핵문제가 진전되면서 정부도 '비핵 개방 3000' 구상에 따라 남북경협 확대 등에 시동을 걸 명분을 갖게 된 셈이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부의 외교안보 당국자를 만난 일부 기업인들에 따르면 정부가 대규모 공적 투자가 필요한 사안이 아닌 민간 기업의 대북투자와 협력사업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비핵 개방 3000' 구상을 구체화하는 방안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최근 방미 기간 서울-평양 연락사무소 설치 구상을 천명하고 이를 북한에 제안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 제안에 대해 김하중 장관은 "대통령이 앞으로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북한이 잘 검토해서 적극적으로 호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대통령이 방미 기간에 '연락사무소 구상'을 띄운 것은 어쨌든 북한을 향해 손을 내 민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정부 안팎에서는 대통령이 미국 언론에 밝힌 연락사무소 구상을 북한에 정식으로 제안하는 기회를 빌려 남북 당국간 대화 재개를 제의하는 시나리오가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 일각에서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 남북대화에 핵심역할을 했던 인사를 내세워 북한과 접촉을 시도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상반기 중 대화 복원은 요원
그러나 북한 당국이 '자주적 존엄'을 거론하며 이명박 정부를 직접 비판한 만큼 올해 상반기에 남북 당국간 대화가 복원되기는 어려워졌다. 또한 북한과 미국이 8일 '싱가포르 회동'을 통해 북핵 프로그램 신고문제에 합의하고, 북핵 해결의 3단계 이행에 대한 논의가 원만하게 이뤄진 상황에서 북한이 남북대화에 쉽게 나올 지 의문이다.
오히려 북이 남측에 공세적 입장을 취하기로 정리했을 때 이미 북미관계 해결 전망을 세웠고,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을 우선한다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북미관계가 진전되면 싫든 좋든 미국의 대북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04년 '조문파동'과 대규모 탈북자 입국으로 민간교류까지 10달 정도 중단됐던 최악의 상황까지 예상된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10.4 정상선언을 이행할 의사는 아직까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에서 남북관계도 지난 10년간의 기존 틀이 새로이 정립되는 조정 기간을 거치고 있다"며 "북도 진정성을 갖고 대화에 나서는 한편,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의 대북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확인한 것이다. 또한 남북대화보다 한미동맹을 우선하겠다는 의지도 거듭 강조했다.
지난 10년간의 남북대화를 '퍼주기'로 인식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전략적 한미동맹'의 복원을 내세우며 쇠고기협상 양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인상 등 '대미 퍼주기'에 나섰다. 10.4 정상선언의 전면적 이행과 민족공조를 남북대화의 기조로 삼으려는 북한의 입장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또 이명박 대통령은 "언제든지 대화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구체성이 없는 비료나 식량 등의 지원을 조건으로 북한측의 호응을 기대하고 있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우리는 북한 주민의 생활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 '북한의 정권과 주민을 분리'해온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인식과 비슷한 보여 북한의 반발이 피할 수 없게 됐다.
즉 남측은 북한이 경제적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남북대화에 나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고, 북측은 북미관계가 타결되면 남측이 2007 정상선언의 이행에 나설 것이라고 보고 있는 셈이다. 남북 당국간 인식 차이가 큰 만큼 상호 접점을 찾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북의 극적인 정책 변화가 없는 한 올해 상반기 남북 당국간 관계는 소강상태 또는 긴장국면이 조성될 전망이다. 5월로 예상되는 6자회담 재개가 그나마 남북대화에 돌파구를 열 수 있는 변수가 될 것이다.
일관된 대북정책 기조 유지 절실
북한은 미국과 남측의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대북정책이 조정, 변화되는 것에 대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북한은 2000년대에 들어와 일관된 대외, 대남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북미관계를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와 남북관계를 동시에 발전시켜 나간다는 북한의 정책기조가 아직까지는 흔들리지 않고 있는 듯하다.
6자회담이 재개되고 북미관계가 진전되면 북한은 '개방의 문'을 좀 더 열 것이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최근 "6자회담 합의의 이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동북아 정세의 전환적 국면은 조선(북)의 경제부흥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며 "세계 각국과의 경제적 협력, 교류를 보다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변화하는 국제정세 흐름에서 남북대화의 중단은 한반도 비핵화와 6자회담 진전에 장애를 조성할 수도 있다. 자칫 지난 10년간 쌓아놓은 성과를 잃고, 대북정책의 지렛대마저 놓쳐 버릴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한반도 전문가 루디거 프랑크 교수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최근 '실용주의와 대북정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지난 50여 년간 실패했던" 대북정책으로 돌아가면 "남한의 철수로 생겨날 공간엔 재빨리 중국과 러시아가 들어설 것"이라며 이들 나라와 북한의 각종 합작사업, 신의주 특구, 북한 철도산업에 대한 러시아의 진출 등이 가능함은 물론 "평양은 워싱턴은 물론 도쿄와도 새롭게 협력하는 길을 찾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이 같은 현상은 자원과 물류분야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대북 진출로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루디거 교수는 "서울은 어느 날, 한때 북에 대해 갖고 있던 소중한 지렛대를 모두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며 "옐친 시대의 러시아가 (대북관계에서) 그러했다"라고 말했다. 한미동맹의 틀에 갇혀 독자적인 남북대화의 독자영역을 포기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일침이 아닐 수 없다. '기다리다 보면' 남북대화가 재개될 것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안이한 대북관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답답한 것은 이명박 정부가 대북기조나 북한의 대남기조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시점에서 남북대화 복원을 위해 이명박 정부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남북 민간교류의 영역을 넓혀 주면서 북한에 일관된 '대화 신호'를 보내고, 6자회담 합의 이행의 3단계 국면에 접어들 시점에 남북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부분적이라도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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