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21년 영국 식민 통치 시기. 식민 지배자들은 지금의 파키스탄에 있는 어떤 지역에서 철도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부들이 땅 속에서 벽돌을 꺼내 온 것을 우연히 지켜 본 관리들이 영국 본국에 연락을 해 대대적인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발굴이 시작된 지 약 10년 만에 어느 정도 작업이 대개 마무리 되면서 문명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었다.
여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역사의 정체성은 당대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는 인더스 문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인도에서는 영웅 간디가 등장하여 비로소 아래로부터의 민족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었고, 영국 세력은 타오르는 민족 운동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곳곳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 분열의 씨를 뿌리는 일에 역사학을 교묘하게 활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식민 지배자들은 인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인도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는 과정 속에서 인도가 서로 다른 언어가 매우 많다는 사실과 그것을 구별해 보면 크게 둘로 나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를 기준으로 하여 인도 민족을 분열시키고 그 위에서 통치할 것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식민주의 학자들은 아리야인과 드라비다인이 마치 별개의 인종인 것처럼 간주하여 역사를 아리야인의 역사와 드라비다인의 역사로 나누고 문화나 풍속 기타 모든 것을 아리야인과 드라비다인의 그것으로 나누었다.
그러한 작업이 진행되어 가고 있던 때, 서양 사람들에 의해 이미 인도의 아리야인은 세계 최고의 정신 문명의 주인으로 자리 잡았고, 유럽 선진 문명의 잃어버린 날개 한 쪽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면서 졸지에 드라비다인은 세계 최고의 문화 '민족'과는 너무나도 다른 '미운 오리 새끼' 꼴이 되어버렸다.
인더스 문명이 아리야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던 때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 사건은 남부 인도 사람들에게는 한낮의 스콜과도 같은 반가움을 선사했다. 이후 남부에서는 역사에 좀 관심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더스 문명과 드라비다인과의 관계를 잇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파헤쳐도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이 남부에 살고 있는 드라비다어를 사용하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이 확실하게 규명되지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이 인더스 문자를 드라비다어와의 관련 속에서 수십 년 연구를 해 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만족할 만한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이 문명이 몰락한 후에 들어 온 아리야어 즉 산스끄리뜨어와 관련을 지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만족할 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더스 문명의 여러 유물을 통해 현재 힌두 최고의 신인 쉬바의 원형이 인더스문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규명되었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부처의 깨달음과 관련되는 보리수 숭배의 기원도 인더스 문명에 있고, 힌두교에서 가장 널리 퍼진 신앙 형태인 세정 의례 또한 그 기원을 이곳에 둔다는 등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규명되었다. 그러면서 문자가 해독이 되지 않아 그렇지 여러 가지 맥락에서 볼 때 인더스 문명의 유물에 기록된 언어는 드라비다어이고, 그 문명의 주인공은 그 드라비다어를 사용한 남부의 드라비다인일 것이라는 설이 아직도 가장 유효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후 그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곳에서 문명의 몰락을 맞고, 이곳 남부까지 이주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문제가 집중적으로 대두되었다. 맨 먼저 인더스 문명의 몰락 원인으로 제기된 것은 아리야인의 침략이었다. 아리야인은 기원전 1500 년경 인더스 문명의 가장 중심지인 현재의 파키스탄의 신드 지역을 통과하여 인도아대륙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아리야인들이 남긴 신들에 대한 찬송집인 《리그 베다》의 신화를 보면 아리야인이 누군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떤 원주민과 싸우고, 그들을 복속시키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그 싸우고 복속시킨 대상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래서 아리야인이 인더스 문명을 멸망시켰다는 주장이 크게 힘을 얻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문명이 전쟁으로 멸망을 당할 정도였다면, 성채가 파괴되었다거나, 전쟁에 의해 신체가 크게 손상당한 흔적의 유골이 대규모로 발굴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아리야인 침략으로 인한 몰락설은 한 때 힘을 얻었으나 이내 폐기되어 버렸다.
이후 새롭게 제기된 학설이 강의 범람으로 인한 몰락설이다. 인더스 강은 다른 소위 4대 문명과 함께 범람이 잦은 곳이다. 그래서 그 유적지를 가보면, 잦은 범람으로 인해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을 했다가 다시 돌아 와 우물을 다시 축조하고 도시를 다시 정돈한 흔적이 많이 나온다. 당시 사람들은 각 지역끼리 뭍은 물론이고 강을 통해 교역을 하였고, 지금의 인도양 연안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무역을 할 정도로 천문과 지리에 밝았다. 그래서 설사 엄청난 크기의 범람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것을 다른 곳으로 전혀 이식시키거나 강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동을 하지 못 하였을 리는 없을 것 같다는 게 전반적인 학계의 의견이다.
그래서 다시 제기된 설이 환경 변화로 인한 몰락설이다. 나는, 모헨조다로와 하랍빠를 답사한 1983년 현장에서 큰 의구심에 쌓였다. 모헨조다로를 가기 위해서는 인도의 델리에서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삼륜차 타고, 마차 타고 등등 온갖 교통 수단을 다 타야만 했다. 그 정도로 그 지역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도착해보니 정말 완전한 황무지였다. 그런데 강물은커녕, 나무 한 포기 없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저 많은 불로 구운 벽돌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심하게 혼란스러웠다. 바로 여기에 수수께끼의 열쇠가 숨어 있었다.
인더스 문명의 벽돌 건축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문명보다 더 발달된 수준이었다. 그것은 그곳 사람들은 태양에 말려 벽돌을 만들어 사용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불에 구워 벽돌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당연히 나무가 많이 있었던 숲이 상당했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금은 숲은커녕 나무도 없다. 그렇다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환경이 크게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구운 벽돌을 만드는 바람에 숲을 황폐화시켜 버렸을 거라거나, 지금과 같은 황무지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점차 확장되어 인도아대륙의 신드, 라자스탄 지역까지 확대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만나게 된다. 물증은 없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이 이론이 그래도 가장 납득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이 지역에 강이 말라붙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이 이론이 힘을 얻는 데 더욱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사실이 인도 현대 정치에서 엄청나게 큰 정치적 소용돌이와 연계되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인더스 문명이 이후 힌두 문명의 모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 최고의 고대 문명 가운데 하나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그 유적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던 파키스탄 정부가 이곳이 세계 최고의 문명의 발상지이면서 경쟁국 인도의 힌두 문명의 젖줄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이래로 이런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힌두 문명의 근원지이지만 지금은 남의 땅에 속해 있는 그 사실이 인도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럽게 되어버렸다. 힌두 문명을 과시하면 할수록 그 문명의 요람인 파키스탄은 더욱 더 빛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문명국으로서의 인도의 자존심은 크게 상처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 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인더스 문명의 원래 발생지가 지금의 파키스탄에 있는 모헨조다로나 하랍빠와 같은 곳이 아니고 현재는 말라서 사라져 버리고 없지만, 지금의 인도 영토 안에 있는 사라스와띠(Saraswati) 강 유역이라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이론은 힌두 근본주의가 한창 그 기세를 올리던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확대 재생산 되었다. 당시는 인도 정치가 힌두주의에 입각하여 반파키스탄, 반이슬람, 힌두 복고의 기치를 건 수구적 성격의 반동 정치가 득세하던 때였다.
역사에서 수구 반동의 움직임은 항상 들불같이 순식간에 불붙는다. 히틀러의 나치주의가 그렇고,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이 그랬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빈 라덴과 알카에다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그에 입각한 테러 전쟁이 그러하다. 이에 맞서는 부시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과 대테러 운동 또한 마찬가지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 대국화 움직임이 일본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도 그렇고, 한국에서 전쟁 불사를 주장하는 개신교 집단의 위세가 하늘을 순식간에 찌를 듯한 것 또한 같은 현상이다.
결국 1990년대 인도에서는 힌두 민족주의의 광풍이 불고, 상당수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사라진 사라스와띠 강 문명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면서 힌두 민족주의의 광풍에 자극을 받은 반이슬람 힌두 광신도들이 무슬림을 핍박하면서 집단 폭력을 일으키고 결국 학살로 이어지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이에 양심적인 학자들이 나서서 힌두 민족주의자들과의 일대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 일이 단순히 역사의 문제 즉 학문의 영역 안에서만 다룰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역사라는 것은 특정 '사실'을 두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해석'을 이미 못 박아 두고 그에 맞춰 '사실'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역사학이 학문의 장을 넘어 정치 도구로 거처 이동을 한 현상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 고유의 성격상 역사학 (특히 고대사)은 특정 이데올로기와 만나게 될 때 대단히 무서운 폭발력을 갖게 된다. 특히 최근에는 많은 나라에서 국가주의가 이데올로기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역사는 국민국가를 둘러 싼 정치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중국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중국은 미국이 호시탐탐 자기 나라를 사분오열 시키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고 그러한 국가 존재의 위기를 역사학을 통해 극복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티베트의 문제나 동북공정의 문제 모두 고유한 의미의 역사학의 문제가 더는 아니다. 역사학을 정치의 영역이 아닌 학문의 영역에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동북공정이나 고구려사의 문제를 정부에서 주도하는 체제나 방식 안에 들어가 풀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분열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 곳에서 특정 민족/종족 중심의 역사학을 계발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은 분규와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한 민족/종족 중심의 역사학 계발은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에서는 민족 분규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번지고, 서아시아와 '중동'에서는 국가 폭력과 테러로 인한 전쟁의 일상화로 자리 잡으며, 동아시아에서는 국가주의의 발호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역사학자가 갈등을 부추기고, 내전을 부추기고, 학살을 부추기는 데 앞장서게 되어 버린 것이다.
가혹한 식민 지배와 분단과 내전의 민족 상잔의 비극을 겪은 한국에서 역사학자가 민족주의에 기울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역사학자가 어떤 역사학을 하든지 그건 개인 사상의 자유다. 하지만 그러한 민족 정신을 조장하는 역사가 민족의 자긍심을 일으키기는 하겠으나 결국엔 남북한 사이의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안에서의 적대 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민족 분규와 민족 사이의 분규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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