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이라는 말은 요즘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부터이고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영국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이다. 그가 1949년에 낸 <근대과학의 기원: 1300-1800>이라는 책이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사가가 아니라 일반 역사학자로 <휘그역사학> 같은 유명한 책도 저술한 인물이다.
그는 '과학혁명'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좀 길기는 하나 그의 글을 인용해보자.
'그러한 혁명이 중세뿐 아니라 고대 세계의 과학의 권위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 기독교가 일어난 이래의 모든 것의 빛을 잃게 하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단막극 정도로, 즉 중세 기독교의 체제 내부에서 서로 자리바꿈한 정도의 사건으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과학혁명이 물질계의 전모 및 인간생활 자체의 구도를 바꾸어 놓는 한편 정신과학의 탐구에 있어서까지 인간의 사고 습성을 변화시킨 이래, 그것이 근대세계 및 근대정신의 진정한 기원으로서 너무나 큰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관습적인 유럽사의 구분이 시대착오적이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문명사에서 있어서의 이 새로운 장이 진정으로 시작된 것은 1660년'이며 '그리스도교의 대두 이래 역사에 있어서 이와 비교될 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이정표는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과학혁명을 인류사의 최고의 사건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사건에 '혁명'이라는 정치적 비유를 사용할 때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다. 정치에서 말하는 혁명이 '갑작스럽고 급격하고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며, 그리하여 과거와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갖고 있다면 그런 '과학혁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터필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 17세기에 중점을 두기는 하지만 그 시간대를 1300-1800년의 500년으로 늘였다. 그러나 500년이란 긴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도저히 혁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버터필드 이전에 과학혁명 개념을 주장한 사람들도,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나온 1543년에서 뉴턴의 책이 나온 1687년까지의 144년을 이 기간 대에 포함시키나 144년이라 해도 이미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라는 의미는 상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화학 같은 분야는 천문학이나 물리학보다 훨씬 늦게 18세기말에나 발전했으니 이를 포함하여 혁명이라고 하기는 더 어렵다.
쿤의 패러다임 변화
1962년에 <과학혁명의 구조>를 써서 큰 인기를 모은 토마스 쿤(T.Kuhn)의 견해도 별 다를 것이 없다. 사실 쿤은 과학혁명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자기 나름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20세기 후반에 과학사 붐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과학사 지식을 일반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이 처음 사용한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요즘 과학자뿐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일반화되었다. 패러다임이 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예술사, 신학 등 일반 학문세계에서 '생각의 틀' 정도로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영향이다.
실제로 그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넓어서 어느 과학 분야에서 기본이 되는 이론과 법칙들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이루는 과학지식, 그것에 사용된 개념들을 포함한다. 이외에도 과학자 사회가 공유하는 과학의 방법, 가치, 믿음, 습관까지도 포함한다.(김영식: 과학, 역사 그리고 과학사, pp.177-8)
그러나 자자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학자로서 특별히 참신성이나 독창성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알렉상드르 코이레와 버터필드 같은 사람들로부터 배운, 과학에서의 발전이 점진적이 아니고 급격하고 단절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라는 관점을 보다 포괄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제시했을 뿐이다.
그는 과학에서 진정으로 창조적인 개념이나 이론을 성장시키는 것은 '혁명'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그것들은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기존에 받아 들여져 온 과학인 '정상(正常)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로부터 고립된 일부의 천재들이 반기를 들게 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혁명적인 뒤집힘(顚覆)에 의해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이 해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확립된다. 이 과정이 바로 과학혁명이라는 것이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쿤에 의하면 전형적인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런 과학혁명의 개념은 홀(A. Hall), 웨스트폴(R.Westfall)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계속 주장되며 아직까지도 이 시기 과학발전에 대한 주된 해석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웨스트폴 같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결별이야 말로 과학사에서의 불연속성을 보여주는 주된 사건으로 이로 인해 발전한 신과학은 전통적인 자연철학과는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도전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주장은 최근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돕스 (B.J.T. Dobbs)는 혁명이 갑작스럽고 과격하고 완전한 변화라면 과학혁명은 이런 특징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서히 이루어졌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결별도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케플러는 피타고라스주의에 몰두해 있었고 점성술사였다. 따라서 그가 수학적인 원리를 추구하기는 했으나 근대적인 천문학자로 보기는 어렵다. 또 가장 늦은 시기의 인물인 아이작 뉴턴(1642-1727)도 결코 근대 과학자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 인물은 아니다. 그가 18세기까지 살았으나 그에게 있어 주된 관심사는 그가 명성을 얻은 물리학이나 수학이 아니라 신학(神學)과 연금술이었다.
이에 대해 웨스트폴은 뉴턴이 오늘날 기억되는 것은 물리학, 광학, 수학 때문이지 신학이나 연금술 때문은 아니라고 반론을 편다. 웨스트폴의 주장은, 그들에게 중요한 점이 있다면 그들이 당시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아니고 그것이 가져온 후대의 발전이라는 측면이다. 그것이 근대적인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을 한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업적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아 오늘날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만든 측면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 과학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강조하여 평가한다면 그 이외의 것은 경시되거나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태도가 17세기 과학자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태도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의 전제와 가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 그들의 업적 전체를 놓고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 17세기 과학을 근대적인 과학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런 검증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제이콥(M.Jacob) 같은 사람은 돕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다 종합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과학혁명은 17세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18세기의 자연철학자(이 당시만 해도 과학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고 과학자들은 자신을 자연철학자로 불렀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19세기부터 사용된 것이다)들이 뉴턴의 업적 가운데에서 신학과 연금술을 버리고 물리학과 수학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웨스트폴의 주장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17세기의 과학발전을 하나의 통합되고 완결된 역사적 사건으로서 '과학혁명'으로 부르는 것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6-18세기 유럽 과학발전의 실상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해 보자.
(매주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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