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세가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보수적인 남한 정부의 등장과 총선, 임기 말에 접어든 조지 부시 미 행정부와 미국 대선, 베이징 올림픽 등의 변수가 물고 물리며 혼란스런 양상을 띠고 있다.
대남 압박 수위 더 높아갈 듯
남북관계에서 새로 등장한 변수는 역시 이명박 정부다. 현 정부는 △북핵 문제 진전을 전제로 한 남북관계 추진 △북한 인권문제 제기 △인도적 지원 규모 조절 및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연계 등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또한 남북관계를 한미관계에 종속시키는 한편, 북한이 먼저 행동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이는 대북 강경책이라기보다는 부시 행정부가 2006년까지 견지했던 '적대적 무시' 정책과 닮아 있다. 단거리 미사일을 쏘건, 개성공단 당국자를 쫓아내건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쉬운 건 북한이니 먼저 성의를 보이면 알아서 해주겠다는 태도다.
그렇다고 아쉬운 소리를 먼저 할 북한이 아니다. 남측이 자신들에게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먼저 대화하자고 나오는 상황을 조성할 뿐이다. 최근 북측 당국자들을 만난 한 인사에 따르면 북한은 쌀·비료 지원도 요청하지 않기로 했다. 비료를 뿌려야 하는 '시비' 시기를 고려했을 때 아직까지 비료 지원 요청을 하지 않은 걸 보면 그 전언의 신빙성은 높아 보인다.
대신 북한은 개성공단 경협사무소 남측 직원들에게 퇴거 요청을 하고, 바로 다음 날 서해상에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이명박 정부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다.
북측의 이같은 움직임은 남한 총선에 개입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 목표가 '이명박 흔들기'인 만큼 총선이 끝났다고 해서 멈추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남측에서 협상을 하자고 나올 때까지 압박 수위를 점점 높일 것이다.
개성공단 사태에 '의연하게' 대응하겠다고 하고, 미사일 발사에 대해 '통상적인 훈련'이라고 규정하는 걸 보면 정부 역시 북의 움직임을 총선에 이용할 뜻이 없어 보인다. 어떤 효과를 낼지 모르는 '북풍'을 활용하느니, 현재의 태도를 유지하는 게 장기적으로 낫다고 본 듯하다.
총선이 그리 의미있는 변수가 아니라면 북한의 긴장고조 행위와 남측의 무시 정책은 평행선을 그리며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꽃게잡이철 서해상의 충돌, 추가적인 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이 이어질 것이다. 심한 경우 개성공단, 금강산·개성 관광, 민간교류 부문에까지 먹구름이 낄 수 있다.
미국 제안에 또 한 번 'NO'
남북관계가 장기 교착 국면이라면 한반도 정세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북핵 문제는 여전히 갈림길에 놓여 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28일 담화에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문제 등과 관련해 "미국이 계속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보려고 우기면서 핵문제의 해결을 지연시킨다면, 지금까지 겨우 추진되어 온 핵시설 무력화(불능화)에도 심각한 영향이 미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13일 제네바에서 있었던 북미 회담의 협의 사항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제네바에서 양국은 핵 신고의 최대 쟁점인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문제와 시리아 핵확산 문제를 △공식적인 핵 신고와 분리하고 △미국의 주장에 북한이 반박하지 않는 '간접 시인' 방식으로 △비밀리에 처리한다는 데 합의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핵 신고의 형식일 뿐 내용에 관한 합의는 아니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과 도달한 결론을 가지고 최고 지도부와 상의해야 했고, 외무성 대변인의 이날 담화를 보면 북한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UEP 의혹과 시리아와의 핵 협력설은 날조라는 북한의 기존 입장에 다른 것이다. 직접이건 간접이건 두 가지 의혹을 시인하는 순간 북한은 1994년 제네바합의 파탄의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납치 문제를 털어놓았다가 강력한 역풍이 불었던 악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의 합의 거부는 그같은 원론적인 이유 외에도 협상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핵 신고와 관련한 미국의 입장이 '완전 공개 신고'에서 분리·비밀 신고, 간접시인 등으로 뒷걸음질 치는 상황에서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더 큰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여기에는 시간이 북한 편이라는 판단도 깔려있다. 부시 행정부가 임기를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북핵 폐기 2단계인 불능화를 어정쩡하게 봉합한 상태에서 임기를 마무리한다면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핵실험과 플루토늄 40kg 확보만 가능케 한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 성적표를 원치 않는 부시 대통령은 강경파들의 반발이 있더라도 핵 폐기 3단계의 문을 여는 데까지 가기 위해 한 번 더 양보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북한에 식량 50만 톤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관련 협의에 착수한 것은 북한과의 현 상태를 타계하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북핵 협상이 여전히 갈림길에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 때문이다.
통미봉남, 감정과 주도권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이처럼 남한과의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미국과의 줄다리기를 지속하면서 최대한의 성과를 챙기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 기간 동안 필요한 식량 등은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 한반도 상황의 안정을 바라는 중국에서 조달하면 된다.
그렇다고 북한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를 여전히 직접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관망과 공세를 혼합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4월 중순 열리는 한미정상회담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미국은 북한과 핵협상을 계속할 것이며 관계 개선의 의지가 있다고 할 경우 이 대통령도 마음을 달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란스런 한반도 정세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이 긴장고조 행위를 이어가더라도 미국만을 바라보겠다는 이명박 정부는 통미봉남의 수모를 겪었던 김영삼 정부를 빼닮았다.
하지만 통미봉남은 단순히 수모를 겪느냐 마느냐 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북미 제네바합의는 한국이 철저히 배제된 채 체결됐지만, 그로 인한 경수로 건설비의 대부분은 한국이 댔다. 현재의 국면에서 한국이 빠진 채 핵 협상이 급속히 진척될 경우 제네바합의 때와 똑 같은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북핵 문제, 남북관계에 관련한 개념조차 여전히 잡지 못해 백악관을 방문해 '듣기만' 했다는 청와대의 외교안보 사령탑은 이 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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