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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스님의 인신공양으로 세워진 세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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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스님의 인신공양으로 세워진 세병관?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5>

▲ 통영의 상징, 세병관과 복원 중인 통제영 설경. ⓒ이상희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국보 305호 세병관(洗兵館)은 통영의 상징이다. 세병(洗兵)이란 이름에는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종을 만들 때 어린 아이가 희생되었다는 에밀레종(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 전설처럼 세병관 건립에도 인신공양(人身供養)의 인주전설(人柱傳說)이 전해져 온다. 토목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궁전이나 성곽, 신전, 가옥, 교량, 제방 등을 건설할 때 기초에 인간을 생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인주(人柱)라 한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신의 분노가 달래지고, 인간의 영(靈)이 축조물로 옮겨지면서 축조물이 튼튼해질 거라는 믿음 때문에 생긴 잔혹한 풍습이었다. 실제 인신공양이 있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험난한 대형토목 공사들에는 대체로 그런 전설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1603년, 삼도수군통제영 관아 건설공사가 시작됐다. 객사인 세병관을 짓기 위해 터를 닦아놓고 초석을 놓은 뒤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장정이 달라붙어 기둥 하나를 세우고 나면 이내 쓰러져 버리기를 수십 차례, 끝내 기둥 하나 세우지 못하고 하루가 저물어 갔다. 이 상황을 지켜본 통제사는 수하에게 명하여 고사 지낼 준비를 하게 했다. 고삿상을 차린 통제사는 술을 따르며 진노를 거두고 공사를 허락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지신에게도 고시래를 했다. 고사상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그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통제사에게 비방을 알려주었다.

"사시(蛇(時, 오전10시경)가 되면 이곳 입구의 고갯길에 철립(쇠 삿갓)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그를 잡아다 우물에 집어넣고는 고사를 지내야만 비로소 만사형통하게 될 것이니 명심하라."

잠에서 깬 통제사는 군사를 동원해 우물을 파게 한 뒤 사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사시가 되자 백발노인의 예언대로 검은 쇠 삿갓을 쓴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통제사는 쇠 삿갓 쓴 사람을 잡아오게 했다. 그런데 까닭 없이 잡혀 온 사람은 통영 말로 '소도방 떠꿍'(가마솥 뚜껑)을 머리에 인 어린 비구니였다. 비구니는 삼월 삼짇날 풍습인 화전을 부치기 위해 솥뚜껑을 이고 가는 중이었다. 결국, 불쌍한 비구니는 이유도 모른 채 우물에 빠뜨려져 죽임을 당했고 세병관 건물 기둥은 무사히 세워지게 됐다. 통영 지방에 전해지는 철립 쓴 비구니 전설이다. 세병관에 깃든 인주 전설은 실제라기보다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대형 토목 공사 중에는 사고로 사람 목숨이 희생되는 일이 적지 않았으니 이 전설이 꼭 허황되다고 만 할 수 없지 않겠는가.

▲ 세병관 입구 문화동 벅수, 통영의 벅수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강제윤

조선수군의 심장

세병관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벅수 한기 서 있다. 벅수는 돌장승이다. 비보(裨補)와 벽사(辟邪)를 위해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비보란 허한 기를 보하는 것이고 벽사란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뜻이다. 돌장승에는 토지대장군(土地大將軍)이라는 글자가 음각 되어 있으며 드물게 1906년이라는 제작 연대까지 새겨져 있다. 당시 동락동(현 문화동) 주민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 마을의 동남방이 허하다 하여 마을의 평안을 염원하며 돌벅수를 세웠다 한다. 한때는 마을에서 제사를 모신 적도 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드리는 개인적 신앙물이 되었다.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세병관 일대 문화동 마을이 예전에는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던 장소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다. 일제 때는 세병관에 벽체와 창문을 달아 학교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일제는 수백 년 이어온 통제영 건물들을 파괴해 버렸는데 세병관만이 재앙을 면했다. 세병관이 학교로 개조하기 좋은 구조를 가진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병관은 삼도수군 통제영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유물이 됐다. 세병관은 옛 유물 중 하나라고 그냥 지나치거나 허투루 봐서는 안 될 중요한 건물이다. 원래 고건축물이라는 것이 모르고 보면 낡은 건물일 뿐이지만 의미를 알고 보면 살아 있는 역사다. 세병관은 조선 시대 전라, 경상, 충청도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던 삼도수군 통제영의 심장이었다.

▲ 세병관 천장은 화려한 단청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상희

본래 통제영에는 세병관 외에도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 100여 채의 관청과 영문이 있었다. 지금은 통제영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나는 통제영 복원이 껍데기뿐인 빈 건물의 복원이 아니길 바란다. 보존해야 할 귀한 문화재가 아닌 다음에야 사람이 생활하지 않는 건축물은 그저 모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복원되는 통제영 건물들은 사람들이 실제 거주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일테면 12공방으로 되살려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12공방에 통영의 장인들이 상주하면서 공예품을 만들고 후진을 양성하고 또 관광객들은 작품을 감상하고 구매할 수 있게 한다면 진정 살아 있는 복원이 되지 않겠는가. 596억 원의 혈세를 들인 공사가 그냥 빈 건물의 진열이라면 너무 허망하지 않겠는가. 그건 껍데기뿐인 복원, 세트장을 만드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모형 건물들은 전국에 수도 없이 많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런 껍데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팔작집은 지붕의 용마루 좌우에 삼각형의 벽, 합각(合閣)이 있는 외관상 가장 화려한 지붕 형태를 가진 건물이다. 장대석기단(長臺石基壇)에 위로 갈수록 기둥 두께가 작아져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민 흘림기둥 50개를 세우고, 벽체나 창호 없이 통 칸으로 만든 건물이다. 바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뒤쪽 중앙에 한 단을 높여 전패(殿牌)를 보관하는 전패단을 두었고 전패단 위에는 홍살문을 세워 권위를 부여했다.

▲ 객사 세병관은 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었다. ⓒ이상희

왕의 권위를 상징한 객사, 객사 동쪽 건물이라 동헌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 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 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다.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다. 대게 지방 관청에서는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일 것 같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다.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이다. 그래서 객사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셨다.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다.

일반적으로 객사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좌우에 날개 집인 동익사(東翼舍)와 서익사(西翼舍)를 두었으면 누각이 딸려 있다. 중앙의 정청에는 전패(殿牌)를 두고 지방관인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객사에 봉안한 전패는 왕의 초상을 대신했는데 '전'(殿)자가 새겨져 있어 전패라 한다. 요즘 관청에 대통령 사진을 걸어두는 것과 비슷하다. 전(殿)은 궁궐, 전하 등의 뜻이 있다. 지방에 출장 간 관원이나 수령이 동지, 설, 왕의 생일에나 하례 의식 등이 있을 때도 관원들과 함께 배례했다.

전패는 왕의 상징물인 까닭에 매우 엄하게 관리되었다.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시킨 자는 본인은 물론 일가족을 처형했으며 그 고을은 혁파되고 수령은 파면되었다. 대궐의 왕 또한 중국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올렸다. 객사에서 정청의 좌우 건물을 낮춰 지은 것은 정청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객사 앞에는 붉은 칠을 한 홍살문을 두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했다. 또 왕의 교지나 교서를 받는 의식을 거행한 곳도 객사였다. 왕을 대신해 시찰을 온 암행어사나 관찰사 등이 업무를 보던 곳도 객사였다. 통제영의 객사인 세병관은 장수들의 전략 회의 장소로도 사용됐다.

객사는 또 왕명을 받은 관리들의 숙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중앙에 정청을 두고 양 날개에 숙소건물을 만들었다. 그래서 관사나 객관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세병관 건물은 일반적인 객사와 양식이 약간 다르다. 양 날개에 숙소로 쓰는 건물이 없고 홍살문도 객사 안에 있다.

▲ 두보의 시에서 따온 세병, 평화의 염원이 가득 담긴 현판이다. ⓒ강제윤

평화를 기리는 만하정(挽河)도 복원되기를!

세병관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현판이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다. 세병관의 세병은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甲兵長不用(정세갑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 물을 끌어다가, 갑옷과 무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인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예전에는 중앙동 한일은행 서쪽 언덕에 만하정(挽河亭)이란 정자도 있었다. 만하정은 1785년에 세운 2층 정자다. 지금은 만하정이 있던 언덕이 마라정 혹은 마루정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두보의 시 '세병마'에서 따온 만하(挽河)와 세병(洗兵)이란 이름에는 은하수 물을 끌어와 갑옷과 무기를 씻어 영원히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평화의 염원이 깃들어 있다. 두보는 당나라 현종 때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 당시 반란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고 현종의 이민족 국가들에 대한 침략전쟁이 불러온 전쟁의 참극을 직접 보고 겪은 사람이었다. 두보의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세병관에서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이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 백성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세병관이 단지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었다면 후대인 우리가 일부러 찾아봐야 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군사령부 건물이면서도 그토록 간절히 평화를 기원하던 곳이라니! 세상 천지에 이런 평화의 염원을 가득 담은 군사시설이 어디에 또 있을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소인가. 그러므로 한산해전의 전승지 통영에 와서 사람들이 배워야 할 것은 호전의식이나 숭무의식 따위가 아니다. 평화를 바라고 평화를 지키려는 숭고한 평화의식이다. 통제영 복원 공사에 만하정 복원이 포함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선조들이 염원했던 평화의식을 기리는 뜻에서 반드시 복원됐으면 싶다. 만하정이 있어야 비로소 평화를 염원하는 세병관의 뜻이 완성되는 것이다.

▲ 무기를 거두는 문, 군사 시설 중 이처럼 평화로운 문이 또 있을까! ⓒ강제윤

세병관 출입구에는 지과문(止戈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또한 얼마나 의미심장한 현판인가. 창을 거두는 문이라니. 지과문. 무기를 쌓아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무기를 거두는 문이라니! 세병관만큼이나 절절한 평화의 염원을 담고 있는 이름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세병관은 결코 전쟁을 기리는 곳이 아니다. 평화를 염원하는 평화 훈련장인 것이다!

세병관 천장의 들보, 기둥과 마루들은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체취와 행적과 말과 울음소리까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가만히 기둥에 귀를 대고 귀 기울여 보라. 역사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터이니. 그런데 박경리 선생은 이 건물을 무섭다 했었다. 선생의 소설<김약국의 딸들>에는 "세병관 건물 아름드리 기둥에는 옛날 비자(婢子)를 잡아넣었다는 전설이 있어 밤이면 귀신이 난다 해서 이 근방 사람들은 피한다."고 했다. 비자는 여종을 말한다. 세병관 기둥을 세울 때 철립 쓴 비구니를 넣었다는 전설의 변형인 듯하다. 비구니든 여종이든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이라면 어찌 기둥 밑을 떠날 수 있을까.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그 서러운 울음소리 들리는 듯하다.

□ 강제윤
시인, 에세이스트, 여행자,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섬학교>와 <통영학교> 교장. 도서출판 호미 기획위원.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 등단. 문화일보 선정 평화인물 100인. 2006년부터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동안 250여개의 섬을 걸었다. 지금도 섬들을 걸으며 섬의 문화와 풍속,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2011년 3월부터는 통영 동피랑 마을에 거주하며 통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일도 병행해 왔다. <통영학교>는 2012년 12월 22일 개교 예정이다.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어머니전(문광부 우수문학도서)><섬을 걷다><그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자발적 가난의 행복(문광부우수문학도서)><보길도에서 온 편지><올레 사랑을 만나다>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 이상희
사진가. 향토 음식 연구가. 통영에 살면서 20여 년간 통영과 통영의 섬들을 사진으로 기록해 오고 있다. 2012년 5월 통영 거북선호텔 아트홀 개관 초대전 '별 하나 떨어져 섬이 되다'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오랫동안 통영의 섬들을 카메라에 담아온 온 이상희의 아름다운 사진들은 개발의 바람으로 원형이 사라져 가는 섬들에 대한 마지막 기록으로서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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