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사롭지 않은 김 전 장관의 말은 이명박 새 정부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작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때까지만 해도 '평화와 경제의 결합'이라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가 운위되던 서해에서 긴장의 파고가 높아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통일부 폐지가 아니라 통합"이라던 북한
북한이 대선 국면에서 이명박 후보에 대한 언급을 일절 삼간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태도는 대선 후에도 계속됐다. 대선 직후 방북했던 한 인사에 따르면, 북측 관계자들은 새 정부의 통일부 폐지를 비판하는 남측 민간단체 간부들에게 "무슨 소리냐, 폐지가 아니라 (외교부와) 통합이다"라며 오히려 남측 인사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관망세를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당선인이 1월 중순 북측의 회동 제의를 거부한 뒤에도(<동아일보> 3월 5일) 북한은 1월 남북군사실무회담, 2월 철도협력분과위에 나왔다. 새 정부의 대북정책을 예단하지 않고 명확한 메시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겠다는 것이었다.
1월 금강산 해맞이 행사 등 각종 민간행사를 취소하거나 축소하려고 했던 것은 불필요한 남북 마찰의 소지를 없애려는 의도였다. 새 정부 출범 전후의 '조정기'를 무탈하게 넘기면 기존의 남북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기대'가 배어 있었다.
평양 월드컵 예선 남북 대결에서 남측 응원단의 방북을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기 일정으로 볼 때 3월 말까지도 기다릴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신보>의 경고, 왜?
북한의 '인내심'이 다해가고 있다는 신호는 북의 의중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나왔다. 이 신문은 지난달 29일 이명박 정부의 핵심 대북정책인 '비핵·개방·3000 구상'에 대해 "비현실적이며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비록 "이(명박) 대통령이 아직까지 뚜렷한 대북정책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전제하긴 했지만 "김영삼 정권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인상", "민족을 모독하는 일"이란 언급으로 볼 때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가 끝났음을 강하게 암시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반(半) 공식적으로 입장을 정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북한의 태도 변화는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의 선(先)핵폐기 정책, 남북관계의 특수성 불인정, 대북정책을 대미정책에 종속시키려는 태도 등이 명확해진 데 따른 것이다.
또한 북한의 변화는 소위 '대남 사업단위'의 부정부패 의혹에 대한 내부 감찰이 끝나가고 있다는 내부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등에 대한 감찰을 통해 대남정책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한 북한이 새로운 정책 구상을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명박 당선인 측과의 접촉을 위해 베이징에 파견된 노동당 조직지도부 인사들이 빈손으로 돌아가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무산된 것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게 한 듯하다.
YS 시절 방불케 하는 공방
<조선신보>에서 선을 보인 대남 태도는 2일 시작된 한미합동 '키 리졸브' 군사훈련에 대한 집중 포화에서 보다 뚜렷해졌다.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는 2일 훈련 개시에 맞춰 내놓은 성명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비싸게 마련해 놓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한 주동적 대응 타격으로 맞받아나갈 것"이라고 강력 비난했다. 연례 훈련에 대한 일반적인 대응으로 보기엔 강도가 너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북한은 이 훈련에 맞춰 서해상에서 다량의 해안포 발사 훈련을 벌였다. 김연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이 정부가 군사적인 측면에서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 반응을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 후 나타나는 남북간의 공방은 <조선신보>의 표현대로 "김영삼 정권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남측 정부는 3일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촉구했다. 이에 북한은 "무책임한 발언에 따른 모든 결과에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북한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이 남측 민간단체의 금강산·개성 방문을 무기한 중단한 것도 그렇다. 대선 직후 민간행사를 취소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 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해석된다.
한미정상회담, PSI 참여, 비료 지원 등이 최대 변수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고는 볼 수 없다. <조선신보>의 진단대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최근 태도는 4월 총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란 걸 북한도 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의 태도가 남북관계를 깨겠다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라며 "다만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4월 총선과 한미정상회담 후에도 이명박 정부의 태도가 바뀌지 않을 경우 북한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털어버릴 것이다.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한국이 전면 참여하는 등 핵심 군사 현안이 불거지거나, 남측이 대북 비료지원을 핵 프로그램 신고 등에 연계할 경우 포기의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북중관계 재정상화로 활로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북중관계 '재정상화' 작업은 그같은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1일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을 찾은 것은 남북관계의 악화에 따른 경제적 '빈 공간'을 중국을 통해 보충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베이징 올림픽 성공에 모든 걸 걸고 있는 중국은 북한의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왕자루이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평양에 파견하면서 북한 달래기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남북관계가 '경색'으로 정착되는 대신 북중관계롤 회복시켜 놓음으로써 한숨 돌린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장기교착 국면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2006년처럼 미사일 시험발사, 핵실험 등 전형적인 '벼랑끝 전술'을 쓰기엔 미국이 대선 국면에 접어들고 있어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눈치도 봐야 한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에 새 행정부가 들어서고 대북정책에 대한 검토를 끝낼 2009년 하반기까지 핵 신고를 둘러 싼 줄다리기를 계속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벼랑끝 전술을 못 쓰고 교착 상황을 이어간다고 해서 이명박 새 정부를 흔드는 일을 포기할 북한이 아니다. 남측의 대북정책을 떠보고 균열을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김장수 전 장관이 경고한 서해상 무력 충돌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