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나면 새로워지는 장관 후보자들의 무수한 의혹 속에서 가장 자유롭다고 평가받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후보자가 2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난데없는 곤욕을 치렀다.
부동산 투기 의혹도, 자녀 이중국적 논란도 없는 '클린 후보'인 그가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피아구분'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야당이 된 통합민주당 의원들은 "이명박 정부에서 가장 잘 된 인사"라며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반면, 정작 지원사격을 해줘야 할 한나라당 의원들은 그의 사상이라도 검증하겠다는 듯 맹렬히 몰아붙였다.
청문회는 민주당 최성 의원의 말대로 '장관 취임 축하연' 같은 분위기였다. 유 후보자가 청문회를 통과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청문회는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부 1·2차관과 주일대사를 역임했던 유 후보자의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리였다.
정몽준 맹공에 "그게 아니라…"
유명환 후보자를 가장 곤란케 했던 질문은 이명박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일정의 재조정과 관련된 것이었다.
미국의 군사적 변환 필요성과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결합되어 합의된 전작권 환수를 재협상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만약 유 후보자가 '적극 검토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이라도 한다면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한미동맹에 커다란 균열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전작권 환수를 반대했던 한나라당에서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환수 일정 재조정을 제기하고 있다. 유명환 후보자는 이에 대한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의 질문에 "이미 양국 정부가 합의를 했고 이행 단계에 있다"라며 "국민들의 안보우려가 없도록 한미간에 계속 협의하겠다"라고만 말했다. 현실을 알고 있는 유 후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러자 정몽준 의원은 "처음부터 잘못된 시작이었다"고 따졌고, 유 후보자는 "이 시점에서 말하기는 적절치 않다"라는 말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 의원은 "정해졌기 때문에 나는 모르겠다는 말이냐"라고 추궁했고, 유 후보자는 "그게 아니라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하고 국민적으로 논란된 문제라서…"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평가하지 않겠다" "구체적으로 입장을 밝히는 게 적절하지 않다"라는 말만 이어나갔다.
"PSI 어떻게?" "상황 봐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에 관한 문제에서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는 PSI에 전면 참여할 경우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PSI 8개 항 중 5개 항에만 참여해 왔다. 그러나 새 정부가 PSI의 전면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는 계속 나오고 있고 한나라당도 찬성하는 입장이다.
유 후보자는 정몽준 의원의 PSI 관련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이미 PSI의 목적과 취지를 지지한다고 표명했고 8개 항 중 5개 항에 선택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라면서 "이 문제도 앞으로 상황을 봐서…"라고 얼버무렸다.
내심이야 어찌됐건 그는 차관 시절이던 2006년 의회에서 "(북한과의) 무력충돌 가능성이 커서 참여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부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이날 인사청문회에서 유 후보자가 이렇게밖에 말 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과거 발언을 부정할 수도 없고, 새 정부의 방침을 거스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안이 있는지 검토하는 게 타당하다"라고 덧붙였다.
한미동맹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동맹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표적인 '미국통' 외교관으로 노무현 정부의 대미외교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던 유 후보자가 그런 진단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유 후보자는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대미정책에 어떤 차이가 있냐"는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의 질문에 "과거 정부에서도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항상 얘기했고, 한미관계를 새로운 안보 수요에 맞게 재조정해서 한미동맹의 폭을 한반도 말고도 지역과 세계로 넓혀야 한다는 소신을 얘기했다"고 답했다.
이런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김용갑 의원은 재차 한미동맹 문제를 물어봤다. 이에 유 후보자는 "한미동맹의 폭을 넓혀가는 노력을 새 정부는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다"라고만 덧붙였다.
보다 못한 한나라당의 김무성 의원이 보다 노골적으로 물었다. "차관으로 있을 때 한미관계의 심각한 위기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냐?" 유 후보자는 "결과론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김 의원은 "청문회 하는데 답변을 안 하겠다고 하면 청문회를 왜 하나?"라고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북핵 상황에 대한 유 후보자의 답변도 부정적인 상황인식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유 후보자는 "현재의 북핵 상황은 해결을 위한 진통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하다"라며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 (핵 시설) 불능화를 진척시켰고 우리는 상응하는 에너지·물자 지원을 계속 해왔다"라고 말했다.
"화해협력정책은 변할 수 없는 것"
하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유 후보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정동채 의원은 "외교장관으로 유 후보자를 선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잘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고, 이강래 의원은 "외교부 인선 참 잘됐다"고 했다. 민주당의 다른 의원들도 발언 모두에 "축하한다"라는 말을 하며 청문회 통과를 기정사실화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지난 10년간의 포용정책에 대한 유 후보자의 평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그는 "남북관계라는 건 특수관계로 남북화해와 긴장완화를 추구하는 건 절대 명제라고 생각한다"며 "화해협력정책의 기조는 변할 수 없는 정책이라고 생각하고 이명박 정부에서도 계속 지켜나갈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강래 의원이 "그런 생각을 확고히 가지면 일하기 힘들 것이다"라고 '우려'를 표하자 유 후보자는 "제 생각이고, 내가 아는 한 신 정부도 남북대화에 있어서 북핵이 해결되면 더 적극적으로 대북 지원·화해협력 정책을 이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동채 의원의 질문에도 "북한과 우리는 하루속히 화해협력을 통해 남북교류를 증진시키고 민족공동번영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정권에 관계없이 화해협력정책이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구상'이 포용정책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다 아우르는 정책"이라고 답했다.
이같은 답변을 들은 이강래 의원은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 (한나라당이) 야당이기 때문에 지난 정부하고 차별화된 정책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면서도 "지난 정부에서 차관과 주일대사를 했던 사람을 장관으로 발탁한 것은 외교정책에서의 연속성, 안정성, 중립성을 표방한 것으로 잘 된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이어 "그러나 기존에 해온 것과 상반된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고 기존의 말을 뒤집을 상황도 올 것이다"라며 "청와대 내부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가진 생각과 유 후보가 가진 소신이 괴리가 있을 것 같은데 균형있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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