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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뉴욕필 선율, 이명박 대통령 가슴부터 녹여라"

한반도브리핑 <82> '비핵·개방·3000'의 답답한 현실 인식

26일 6시 7분 북미관계에 새 장이 열렸다.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던 조지 부시 미 행정부 시기에 평양 한 복판 동평양대극장에서 미국의 국가가 연주된 것이다.

무대에는 북한의 인공기와 미국의 성조기가 나란히 게양됐다. 국가 연주가 끝나자 객석에 있던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양형섭 부위원장, 박관오 상임위원, 민족화해협의회 박경철 부회장 등이 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이번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북미관계를 급진전시키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6자회담과 북미대화에 호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공연 ⓒ로이터=뉴시스

"뉴욕교향악단이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함으로써 우리 인민과 미국 사이의 문화교류가 큰 걸음을 내딛게 되기를 원한다."

평양을 방문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환영하며 북한의 송석환 문화성 부상이 한 말은 이번 공연에 거는 북한 당국의 기대를 함축하고 있다. 30여년 전 미국과 중국 간 외교관계 수립의 계기가 된 '핑퐁외교'에 버금가는 '오케스트라외교'가 되기를 바라는 북한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 셈이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최근 인터뷰에서 "미국은 지금까지 북한과 핑퐁 외교를 갖지 못했다"라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공연 자체로 북한은 엄청난 정치적 효과를 얻었다. 뉴욕필의 역사적인 평양 공연은 북한은 물론 남한과 중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전 세계에 생방송됐다. 이를 통해 북한은 단숨에 세계의 이목을 평양에 집중시켰다.

공연단이 돌아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북한 관련 기사가 쏟아질 것이다. 북한은 공연 취재를 희망하는 각국 취재진 130명에게 단기간이긴 하지만 활짝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단일행사 방북 취재단으론 최대 규모다. AP, 로이터, AFP 등 주요 국제 통신사들과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등 3대 신문사, CNN, ABC, BBC, 폭스 뉴스, CBS 등 주요 방송사들이 역사의 현장을 취재했다.

특히 북한은 뉴욕필의 평양 공연 취재를 위해 방북한 ABC의 밥 우드러프, CNN의 크리스천 아만포 등 미국 유명 기자들에게 영변 핵시설을 직접 공개함으로써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를 자연스럽게 홍보했다. 잘 짜여진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하다.

北, 대형 '이벤트' 후엔 적극적 행보 나서

북한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올해를 "역사적 전환의 해"라고 규정했다. '역사적 전환'에 대해 "말 그대로 세기적 사변이 예고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내놓았다. 이 표현에는 북미관계의 역사적 전환, 더 나아가 '3자 또는 4자 종전선언'에 대한 기대감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뉴욕필의 평양공연은 그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

북한은 갈 길이 바쁘다. 지난해 11월 15년만에 열린 전국 지식인대회(11.30-12.1)에서 북한은 2012년까지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야 한다는 거창한 계획을 발표했다. 2012년까지 김정일 체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경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사상, 군사, 경제 3개 부문에서 강국을 뜻하는 강성대국의 달성을 대내외에 선포하겠다는 것이었다.

올해가 그 첫해다. 북한에 새로운 5개년 경제계획이 시작되는 올해에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하고, 주민 생활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6자회담을 재개해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6자회담과 남북관계의 선순환' 구조를 유지해 대외투자 유치를 통한 경제향상을 할 수 있느냐, 아니면 또다시 북미·남북관계가 소강국면 내지 갈등 국면으로 변화되느냐하는 전환기에 처해 있다. 전통적으로 북한은 대규모 이벤트이후 적극적인 행보에 나섰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뉴욕필의 평양공연은 북한이 선택이 전자에 있음을 시사한다.

부시 행정부도 임기 안에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25일 서울에 온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도 상응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해도 좋다"라고 재차 확인했다. 26일 베이징에 간 라이스 장관은 중국과 북핵 6자회담 진전 방안 등을 협의했다. 조만간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 뉴욕필의 공연을 나란히 앉아 관람하고 있는 리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과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 ⓒ연합뉴스

비핵·개방·3000은 '상호주의'의 다른 말에 불과

답답한 것은 국내 상황이다. 통일부 폐지 여부가 논란이 되더니 이제는 통일부 장관 자질론이 불거졌다. 통일부 조직 개편, 4월 총선 등을 앞두고 있어 4월 중순으로 예상되는 한미정상회담까지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을 듯하다.

더구나 새 정부에서 남북관계는 정책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대북관계에서 이념 대결이 아닌 실용주의 원칙을 적용할 것임을 천명했지만 구체적 실천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 기조는 국익에 바탕을 두고 글로벌 코리아를 지향하는 '실용외교'로 집약된다. 한미관계의 창조적 발전과 자원·에너지 외교 강화, '비핵·개방·3000 구상' 등 새 정부가 천명한 주요 국정과제들도 이같은 기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안보정책과 관련, 새로운 평화구조 창출이라는 전략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북핵 폐기의 우선 해결, 비핵·개방·3000 구상 추진, 남북간 인도적 문제 해결 등의 핵심과제를 선정했다.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문호를 개방할 경우 한국이 적극적인 대북 지원에 나서 1인당 국민소득을 10년내에 3000달러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비핵·개방·3000구상의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이 먼저 핵 폐기를 하고 실질적 변화를 이행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른바 대북 상호주의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 핵심공약인 비핵·개방·3000 구상은 단계별 추진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실질적인 남북경제공동체 진입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북핵 폐기→대규모 프로젝트 통한 남북경협 확대→남북경제공동체 협력협정(KECCA) 체결→남북 경제공동체 기틀 마련이라는 과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시장통합을 이루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이명박 정부의 구상은 말의 성찬에 불과하고 실제상황에서는 공염불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 이명박 대통령이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YS 시절 그 암울한 세월을 원하나

우선 북핵문제 해결, 한반도 비핵화는 남북관계의 틀이 아닌 6자회담의 틀에서 논의,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6자회담은 2·13합의와 10·3합의를 통해 북핵 문제 해결의 동력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구나 현재 6자회담은 북미간 대화와 합의를 추인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도 이 같은 구도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하고 있고, 앞으로도 극적인 반전이 없다면 차기 미국 행정부에서도 이 같은 정책은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비핵화 우선'에 몰입하겠다고 한다. 이같은 '선(先) 비핵화 후(後) 남북경협' 구상은 남북관계를 6자회담,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북미회담에 종속시키겠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우리 정부는 북한에 '통미봉남'아니라 '통미통남'을 요구했고, 북한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 병행발전'정책으로 화답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북한의 남북관계 중시노선은 확고하게 정착됐다.

이명박 정부는 이 성과를 계승하기보다는 스스로 남북관계가 파탄 났던 10년 전 김영삼 정부 시절로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 '선 비핵화 후 남북경협'이란 구호를 한 꺼풀 벗겨보면 미국이 하자는 대로, 6자회담의 합의대로 따라가겠다는 지극히 소극적이고, 비주체적인 태도가 드러날 뿐이다.

'진짜 '실용'을 기대한다

더 큰 문제는 대화의 상대방인 북한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구상에 동의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개방'발언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아직까지 이명박 정부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만 "북남관계의 발전에 민족의 자주도 있고, 나라의 평화도 있으며 민족의 대단합도 있다"며 6·15공동선언과 10·4남북정상선언의 철저한 이행을 강조하고 있다. 가급적 남북관계가 악화되기 않고 신뢰와 공영의 관계로 유지되길 희망하는 태도로 보인다.

그러나 한미일 공조, 대북 개방정책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경우 북한은 대남 강경입장으로 선회할 수도 있다. 북한은 "북남관계는 우리 민족끼리의 관계"이며, "우리 민족끼리의 관계인 북남관계에 외세가 끼어들 틈은 없다"며 한미공조에 대해서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미공조의 강화가 대북 압박정책, 더 나아가 북한체제의 변화로 이어질 지도 불투명하다. 북미관계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수립을 위한 6자회담의 틀은 여전히 유용하고, 미국도 이를 깨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오히려 올해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설 경우 북미관계 정상화는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명박 정부는 현장과 실용을 강조하고 있다. 정말로 '실용 정부'라면 우선 부시 행정부가 집권 초기에 '악의적 무시'정책을 통해 북 체제를 고사시키려 하다가 왜 2005년을 전후해 정책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의 극적인 정책전환이 북미대화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메신저가 해외에서 북측 인사를 만났다고 한다.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폭넓은 대화가 오고갔다는 후문이다.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격론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공식 만남은 아니지만 비공식 대화라도 새 정부와 북한의 입장 차이를 좁힐 수 있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구상은 냉정하게 평가하면 실행수단을 가진 대북정책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언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실천은 어떤 형태로든 남북간 대화를 통해 효율적인 이행방안을 마련해야 가능하다. 특히 6자회담과 남북관계를 분리, 병행 추진하는 길이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 공영의 유일한 방법임을 직시해야 한다.

지난 10년간 공들여 정착시킨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구조를 유지,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대북특사를 파견하고, 상반기로 예정된 2차 남북총리회담을 정상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6자회담이 재개되는 시점이 적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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