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후보 지명전의 최대 승부처였던 5일 '슈퍼 화요일'에서 공화당의 후보로 사실상 결정된 존 매케인 상원의원에게 따라 붙는 표현들은 많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매케인이 전통적인 공화당의 정책에서 벗어난 정책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단아'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다.
이라크전 찬성…럼스펠드엔 '적대시'
매케인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이란, 그리고 북한 등 대외 문제나 군사 현안에서 거의 대부분 강경한 입장을 취해 왔다.
사담 후세인을 증오했던 매케인은 이라크 전쟁을 강력히 지지했고,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더 많은 미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매케인은 이라크 전쟁을 이끌었던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을 '역사상 최악의 국방장관'이라고 부르는 등 부시 행정부의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2006년 11월 한 연설에서 "우리는 이(이라크)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고 역사는 그 책임자들을 기억할 것"이라며 국방부 고위 관리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이라크 상황은 불길하지만 여전히 승리할 수 있다"며 미군 증파를 주장했다.
대외 정책에 있어 강경한 것과 전쟁 포로나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처우를 중시하는 것은 다르다. 매케인은 포로들에 대한 강제 이송을 강하게 반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 이후 테러 용의자들을 신문 관련 규정이 약한 나라의 비밀감옥으로 끌고 가거나 그들을 고문하는 것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매케인은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처리를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사회 이슈 '온건', 전통 공화당 지지층들 비판
대외 정책에 있어 부시 행정부와 티격태격하면서도 큰 틀에서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매케인을 '이단아'로 만든 것은 국내정책 때문이다. 매케인은 공화당의 일반적인 정책과는 다른 길을 여러 번 선택했다.
부시 행정부의 감세 정책과 관련된 입장이 대표적이다. 매케인은 2001년 "감세안은 중간층들의 희생으로 대기업에만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매케인은 또한 적자 재정을 반대하고 균형 예산을 주장해 재정 문제에 있어 전통적인 보수주의를 견지, 부시 행정부나 레이건 행정부를 비판해왔다.
반면 동성애, 낙태, 이민법 개혁 등의 사회적 이슈에 있어서는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보수주의자들의 이반을 겪었다.
매케인과 부시 행정부의 정책적 차이점이 가장 큰 분야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문제다. 매케인은 인도와 중국이 새로운 기후변화 협약에 서명한다면 미국도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인도, 중국의 결정과는 상관없이 미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기후변화 협약 서명을 거부하고 있다.
'초당적 협력'의 달인
매케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민주당 의원들과도 긴밀히 협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탄소 거래와 이산화탄소 감축량을 연계하자는 취지의 입법에서 민주당 출신 무소속 상원의원 조 리버만과 협력했던 게 대표적인 사례였다.
매케인은 또한 국경 지역을 철통같이 관리하는 반면 불법 이민자들에게는 사면받을 기회를 주자는 취지의 이민법 개정안을 2007년 민주당과 협력해 제출하기도 했다.
이미 미국에 들어와 있는 불법 체류자들은 미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시각은 일반적인 공화당 의원들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2002년 선거자금과 이익집단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마련된 선거자금법을 민주당 의원인 러스 페인골드와 함께 통과시켰던 것 역시 매케인의 초당적인 협력 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매케인-페인골드 법안)
최고령 대통령 될까?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4성 해군 제독을 지낸 집안에서 1936년 태어난 매케인은 한국 나이로 올해 73세이다. 그가 올 11월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 된다.
미 해군대학에 입학한 매케인은 1958년 꼴찌에서 다섯 번째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 졸업 이후 해군 소속 비행기 조종사로 22년간 군에서 생활한 매케인은 베트남전에 투입돼 1967년 134명의 미군이 사망한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베트콩의 총에 맞아 북베트남에 추락한 매케인은 미군 관련 정보를 넘겨 달라는 베트콩의 요구를 거절해 5년 반 가량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그곳에서 그는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받았고, 팔을 크게 다쳐 지금도 한쪽 팔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해군에서 나온지 1년 후인 1982년 애리조나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매케인은 84년 재선에 성공한 뒤 86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현재까지(4선)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0년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전에 나온 매케인은 직선적인 스타일로 인기를 끌어 초반 기세를 올렸고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으나, 조지 부시 측의 네거티브 공세와 기독교 우파들의 부시 지지로 인해 패했다.
다시 상원의원으로 돌아가 상원 군사위원회 활동을 정력적으로 했던 그는 그 후 낙태 등 사회적인 문제 일부에서 자신의 과거 시각을 강경한 쪽으로 수정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공화당의 기독교 우파 세력인 복음주의 교단은 매케인은 여전히 자신들과 같은 입장이 아니라고 압박하고 있다.
공화당 기독교 우파, 매케인 지지할까?
<워싱턴포스트>는 5일 매케인을 지지하지 않아 왔던 전통적인 보수파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 11월 본선 승리의 관건이라며 플로리다 예비선거 이후 공화당 저변으로부터 지지를 얻어내기 시작했다고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선거 전략가로서 과거 매케인을 돕던 존 위버는 "일단 매케인이 후보지명만 따내면 일반 공화당원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매케인은 5일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우리는 미국의 가장 큰 몇 개 주에서 승리했다"며 "우리는 공화당이 선두주자를 대선 후보로 지명해왔다는 생각에 익숙해 있다"고 말해 공화당의 대선 후보는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함을 시사했다.
매케인은 이어 "나는 어떤 과장된 전망도 하길 원치 않는다"면서 "다만 애리조나의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말한 '너희가 자라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날에 우리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말할 수는 있다"고 자세를 낮췄다.
매케인은 또 "우리는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지만 대선 승리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섰으며 나는 우리가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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