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의회가 1500억 달러의 경기부양책을 조속히 처리해 줄 것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줄 것 △저소득층 자녀들에 대한 3억 달러의 학비 보조금 지원 법안에 대해 결론을 내려 달라는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부시 대통령의 이날 연설에는 새로운 것도, 열의도 없었다고 혹평하는 한편 그가 국내외에서 벌여놓고 마무리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후임 대통령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기침체 시인
부시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미국의 경제가 현재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을 시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은 주택시장 침체, 물가 상승, 일자리 증가세 둔화 등을 언급하며 "현재 미국 경제가 불확실성의 시기를 겪고 있다"면서 "가정마다 미국 경제의 앞날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어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이 미국 경제의 성장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성장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며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지난 주 행정부와 하원 양당 지도부가 합의한 감세안을 비롯한 150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조속히 통과시켜 달라고 의회에 요청했다.
<뉴욕타임스>는 부시 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에 대해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들이 백악관과 하원이 합의한 부양책에 벌써부터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라크전쟁엔 '인내심' 요구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미군을 증강 배치함으로써 "1년 전 아무도 상상치 못한 성과를 이뤘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라크의 상황이 여전히 어렵다는 것을 시인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적들은 타격을 받았다"면서도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퇴치되지 못했고 아직도 힘든 싸움이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알카에다 등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고 적들은 여전히 위험하며, 아직 해야 할 더 많은 일들이 남아 있다"면서 "성급한 미군 철수는 어렵게 얻은 정치적·안보적 진전을 헛되게 할 것"이라며 미군 철수는 있을 수 없음을 못박았다.
부시 대통령은 또 이란에 대해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이란과 대치할 것"이라면서 이란에 대해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고 외국의 테러활동 지원을 중지하며 정치적 개혁을 단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그는 미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자유 확대 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 평화협정 지원, 이라크·아프가니스탄·레바논의 민주주의 지원, 미얀마와 짐바브웨, 수단, 쿠바 등에서 독재정치 하에 신음하는 국민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북한' 한 번도 언급 안 한 최초의 신년 연설
한편 지난 6차례의 신년 연설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북한을 언급하며 '악의 축' '무법정권' 등으로 일컬었던 부시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는 '북한'이란 단어를 단 한 차례도 거론하지 않았다.
이는 북핵 불능화와 신고 등 6자회담 합의사항이 비록 교착 상태이긴 하지만 진전되고 있다는 백악관의 의중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부시 대통령이 언급한 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조속히 비준 동의해 달라고 의회에 촉구한 것이 전부였다.
부시 대통령은 작년 말 의회가 페루와의 FTA를 비준동의해 준 데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한 뒤 한국, 콜롬비아, 파나마 등과의 FTA도 처리해 줄 것을 호소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들 세 나라의 많은 생산품들은 미국에 관세 없이 들어오고 있지만 많은 미국산 물품들은 이들 나라의 시장에서 심각한 관세에 부딪혀 있다"면서 "FTA가 국가간 무역을 공평하게 하고 미국 상품들이 1억여명의 소비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며 미국인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美 언론들 혹평 쏟아놔
<뉴욕타임스>는 부시 대통령의 연설이 미래를 향한 것이라는 백악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날 연설은 과거에 대한 요약으로 채워졌다고 평했다.
이 신문은 이어 부시 대통령이 7년 전 백악관에 입성하며 "분열이 아닌 통합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미국은 전쟁으로 인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고 많은 미국인들의 관심은 차기 대통령에 가 있다고 비꼬았다.
신문은 또 이날 연설을 위해 의사당에 들어온 부시 대통령은 특별히 야심이 크다고 할 수 없는 한 명의 정치인일 뿐이었다고 혹평했다.
신문은 부시가 대통령직 수행의 피로감을 반영하듯 특별한 색깔이 없는 사람(grayer)이 됐다며, 향후 51주 간 백악관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현실적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 부시 대통령이 막판 스퍼트를 하겠다고 종종 얘기해왔으나 그의 연설로 볼 때 막판 전력질주의 보폭은 분명히 좁을 것이라며, 그가 내놓은 여러 제안들에는 새로운 게 하나도 없었다고 꼬집었다.
"차기 대통령은 미국 이미지부터 살려야"
<로이터> 통신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과 이란과의 긴장, 파키스탄 등지에서의 정치적 혼란 등을 해결하지 않은 채 백악관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됐다며 뒤처리를 맡은 후임 대통령들로부터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윌리엄 갤스턴은 이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차기 대통령은 국내외에 널려 있는 기겁할 정도로 많은 일들을 맞이할 것"이라며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에 이르기 까지 부시 대통령으로 인해 미국은 "위기에 포위됐다"(arc of crises)라고 말했다.
이 통신은 또 미국의 차기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이나 쿠바 관타나모수용소 등으로 인해 상처받은 미국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부시 대통령의 실정을 지적하기도 했다.
최근 <뉴욕타임스>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29%로 사상 최악을 기록했으며 이는 9.11 테러 다음해 있었던 신년 연설 당시 지지율 82%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 수치이다.
백악관이 이날 올려 놓은 국정연설 전문에는 부시 대통령의 말에 박수가 72번 나왔다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연설에서는 공화당의 일부 의원들이 애써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이끌었고 민주당 의원들은 박수를 거의 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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