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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에게 키신저는 있는가?

[기자의 눈] 외교안보의 정치화부터 경계해야

"반공주의자 닉슨이 데탕트를 만든 것처럼 보수파인 이명박이 오히려 남북문제를 더 잘 풀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다. 그러나 닉슨은 기본적으로 (전쟁반대를 교리로 하는) 퀘이커교도였고, 그 옆에는 키신저라는 어마어마한 전략가가 있었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 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토론회)

이명박에게는 키신저 같은 전략가가 있나?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명박은 닉슨처럼 될 수 없는가? 꼭 그렇진 않다. 군계일학의 참모는 없어도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낸다면 괜찮은 전략을 만들어 낼 그룹이 있기 때문이다.
▲ 리처드 닉슨 대통령(오른쪽)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로이터=뉴시스

"반노(反盧)한다고 냉전으로 회귀하면 안 된다"

지난 주 <조선일보>를 통해 16편의 글을 발표한 동아시아연구원(EAI) 같은 전문가집단을 보자.

"한반도 평화체제는 완전한 물리적 핵폐기(비핵화 3단계 완료)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신뢰할 수 있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비핵화 3단계의 본격추진)에 돌입해 있을 때 구축됨이 타당하다." (차두현 국방硏 연구위원)

"워낙 남북경협이 없던 시절에는 정부가 나서서라도 사업을 추진할 필요성이 있었다. 퍼주고라도 경제관계를 만들어 나갈 당위성이 있었다.(…) 정부로서는 시장에 직접 개입할 것이 아니라 각종 법과 제도의 구축 및 철도·도로·통신 등 인프라 정비지원을 통해 경협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조동호 이대 교수)

"북한이나 중국을 봉쇄하고 고립시키려는 '냉전형 한·미·일 3각연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북한과 중국을 포섭할 수 있는 '외연확대형 협력전략'이 대안이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

"한미동맹 강화가 한중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거나 한중관계 강화가 한미관계를 약화시키면 한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 이중 그물망 짜기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이태환 세종硏 수석연구원)

세칭 보수 성향의 학자들이 대부분이었고 혐북(嫌北)·반DJ·반노(盧)적 편견이나 종미(從美)적 시각도 일부 드러났지만, 전문가적 객관성과 냉철함이 돋보이는 대목들이 적잖았다. 이명박 당선인측과 직간접적으로 연이 닿아 있을 이들의 견해대로만 된다면 새 정부의 외교가 최소한 냉전시대로 퇴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EAI 원장인 김병국 고려대 교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노무현 때리기'로는 더 이상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없다. 자주를 노래한 참여정부의 구한말식 사고로는 안 된다는 '盧No'는 네거티브 주장일 뿐 미래를 열 포지티브 꿈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을 다스리지 않으면 냉전적 사고에 다시 빠지게 될 위험성이 적지 않다. 냉전적 사고로 새로운 시대를 열 수는 없다."

진보 진영을 긴장케 하라

냉전적 보수인사의 표상으로 여겨졌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어떤가.

"한미일 삼각동맹을 새롭게 구축하면서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 한미일이 공조할 경우 효과적일 수 있지만 강공책을 쓸 경우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 삼각동맹은 우리의 제1교역국인 중국, 자원외교로 국제무대에 재부상하는 러시아와의 관계에 다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 한번 구축한 (북한과의) 대화틀을 허물기는 쉬워도 복원하는 데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7일, 한나라당 최고위원회)

이런 인사들이 제 목소리를 낸다면 이명박 정부가 비록 보수적이지만 한반도 문제를 풀 실마리를 못 찾으란 법이 없다. 미국에서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그리고 동서냉전을 끝낸 것은 민주당이 아니라 보수적인 공화당 행정부였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은 적어도 '퍼주기' 자체로, 혹은 한미동맹에 이상기류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과거 정부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정말로 퍼줬는지, 왜 퍼줬는지, 한미관계가 정말 그렇게 얼룩졌는지, 한미동맹을 위해서라면 미국의 어떤 요구라도 들어줬어야 했는지를 냉정히 따지길 바란다.

그렇게 나온다면 정부에 대한 비판모드로 돌아설 진보 진영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관계가 잘 안 된다는 것만으로, 미국과 뭔가를 협의하고 합의하는 것 자체만으로 정부를 비판하면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는 왜 잘 되어야 하고, 통일부는 왜 존치돼야 하며, 미국과는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이고 실증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실로 외교안보 문제를 제대로 얘기할 토론 마당이 열린 것이다.

인수위 업무보고 유감

그러나 이명박이 닉슨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게 있다. 바로 외교안보의 정치화다. 그것은 어렵사리 싹튼 열린 토론의 가능성을 짓이겨 버리는 건 둘째 치고 비핵화고 실용외교고 어렵게 만든다. 장달중 교수의 논평을 더 들어보자.

"대북정책이 대남정치의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적잖았다.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 때문에 지지그룹이 이반해 정치적 입지가 위축됐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그룹은 대북 상호주의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원칙적인 접근을 요구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유연한 정책을 들고 나오면 정치적 지지의 철회로 이어질 수 있다."

당장 4월 총선이 문제다. 북핵이 폐기되면 북한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이명박 당선인은 핵폐기 전까지 아무것도 안 할 것이냐는 질문에 핵 포기로 얻을 인센티브를 보여주며 북한을 적극 설득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표밭이었던 극우 세력을 이회창당에 뺏기지 않기 위해 임기 초반 경직된 대북 정책을 내놓을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되면 대북 설득은 물 건너간다. 북핵 불능화가 완료되면서 한국이 움직일 공간이 그 어느 때보다 넓어지는 2~3월의 이야기다.

앞선 정부에 대한 부정과 응징의 멘탈리티로 똘똘 뭉친 당선인 주변인들의 행태는 더욱 우려스럽다.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4일 외교부 업무보고 후 "외교부는 스스로 5년간의 외교정책 추진에 대해 반성했다"며 "외교부 본연의 자리를 되찾겠다고 답변했다"고 말했다. 7일 통일부 업무보고 뒤에는 "통일부는 지난 5년간 북한에 끌려 다닌다는 인식이 많았고 평화와 안보 분야의 진척이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었다고 지적했다"고 말했다.

놀라운 얘기다. 자신들의 과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공무원들의 생존본능이 놀라운 게 아니라 업무보고의 실제 내용과 자기들의 생각을 교묘하게 버무려 발표하는 인수위의 왜곡이 놀랍다. 업무보고 분위기를 알 만한 두 부처의 간부들에게 정말 그랬냐고 물었더니 허탈하게 웃기만 했다.

이런 사람들이 당선인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면 외교안보 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실용외교? 그 어느 정부보다 이념외교를 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비록 보수적이지만 냉전시대로의 회귀는 안 된다는 전략가들조차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이명박의 키신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평소 애독하는 <조선일보>의 외교전략 시리즈부터 일독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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