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각장애인 장진수 씨(가명)는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받긴 했다. 점자형 선거공보는 공직선거관리규칙에 따라 1~4등급 등록 시각장애인에게만 보내진다. 장 씨는 그중 하나이긴 하지만, 점자를 읽고 쓸 줄은 모른다. 고교 시절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은 장 씨. 그는 점자를 익히기에는 이미 손끝의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점자는 고도의 촉각을 요구한다. 그러다 보니 장 씨와 같은 후천적 시각 장애인은 대체로 점자를 배우는 데 애를 먹는다. 전체 시각장애인 가운데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은 사실 5%에도 미치지 못한다.
휠체어를 타는 지체장애인 강지은 씨(가명). 그에게 지난 총선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강 씨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2시간이나 걸려 힘겹게 투표소를 찾았다. 투표를 하겠다는 일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강 씨가 도착한 투표소는 건물 2층에 마련돼 있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시민과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 그를 들어 2층으로 옮겼다. 자신의 '몸'과도 같은 휠체어를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맡긴 강 씨는 수치심과 불안감에 휩싸였다.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항상 거론되는 장애인 참정권 문제. 하지만 매번 문제 제기에서 그칠 뿐이다. 장애인 참정권을 가로막는 산적한 문제들은 소리 없이 다음 선거로 밀린다. 그리고 같은 문제가 또 반복된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공직선거법이 대체 공보물 제작 등의 장애인 참정권 관련 조항을 '의무사항'으로 규정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모든 시각장애인은 점자로, 청각장애인은 수화로 의사소통할 거란 고정관념 또한 장애인 참정권을 침해하고 있다.
▲ 점자는 초성, 중성, 종성을 모두 쪼개어 표시하기 때문에 같은 내용도 약 3배의 지면이 필요하다. 하지만 같은 면수 제한을 둠으로써, 점자형 공보물은 비장애인용 공보물에 담기는 정보의 약 3분의 1만이 담기게 된다. 이에 따라 점자형 선거공보물에 면수 제한을 없애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연합뉴스 |
시각장애인은 후보 약력만 읽어라?!
공직선거법 제65조 4항은 "후보자는 시각장애 선거인을 위한 점자형 선거공보를 작성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점자형 공보물 제작이 '의무'가 아니라 '임의'인 것이다.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제작하지 않아도, 이는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점자형 공보물에도 일반 공보물과 같은 면수 제한을 두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점자는 초성, 중성, 종성을 모두 쪼개어 표시하기 때문에 같은 내용도 약 3배의 지면이 필요하다. 하지만 같은 면수 제한을 둠으로써, 점자형 공보물은 비장애인용 공보물에 담기는 정보의 약 3분의 1만이 담기게 된다. 이에 대해 연세대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 활동하는 김현태 씨는 "사실상 후보 약력만 보란 얘기"라고 꼬집었다.
이에 따라, 점자형 공보물 제작을 의무화하고, 면수 제한 규정을 삭제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의 김재왕 변호사는 "선관위가 공보물 발송의 편의를 위해 임의규정과 면수 제한을 만든 것이 아닌가란 의심이 든다"며 "선관위가 진짜 해야할 일은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선거정보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시각장애인 중 5%만 점자 사용, 다양한 형태의 공보물 제작돼야
더불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공보물이 '점자' 형태로만 제공됨으로써, 점자를 읽을 줄 모르는 시각장애인 대부분의 선거정보 접근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보건복지가족부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을 통해 실시한 '2008년 장애인실태조사'를 보면, 시각장애 발생의 93.2%가 후천적이었다. 또 시각장애인의 48%가 65세 이상이었다. 이 때문에 시각장애인 96.6%가 점자 해독이 불가능했고, 2.4%만 겨우 점자를 읽을 수 있었다. 점자를 배우고 있는 경우는 1.0%에 불과했다.
장 씨는 그 1% 중 하나다. 그는 "점자를 배우고는 있지만 손끝의 촉각이 예민하지 않아, 애를 많이 먹고 있다"며 "'안녕하세요'를 읽는 데만 5분이 걸린다"고 말했다. 이런 시각장애인에게 점자 공보물을 제공하는 것은, 공보물을 아예 제공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관련, 김 변호사는 "'시각장애인=점자사용자'라는 등식은 편견"이라며 "다양한 형태의 시각장애가 있단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중에는 시력을 전부 잃은 경우도 있고, 시력이 낮게나마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또 선천적 장애도 있고, 후천적 장애도 있다.
따라서 점자 형태의 공보물 외에도 '음성' 형태의 공보물을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고 김 변호사는 지적했다. 책자형 선거공보에 음성변환용 바코드를 입력하거나, 공보물을 음성으로 녹음한 테이프 또는 CD를 그는 예로 들었다.
또 전자 문서 형태(컴퓨터 문서 파일)의 공보물을 후보의 홈페이지나 선관위 홈페이지에서 내려받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화면낭독프로그램이 있는 사람은 음성으로 내용을 출력해 들을 수 있고, 저(低)시력 장애인은 화면확대프로그램으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미 공직선거법 제218조 14항에 따라 재외국민에게는 전자 문서형 후보자 정보자료를 발송하고 있다. 전자 문서형 공보물 발송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 지난 9월 서울 금천구 문일고등학교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제18대 대선투표소 장애인 투표편의시설 실태 참관'에서 이문희 한국장애인단체 총연맹 사무차장(오른쪽)과 이완범 금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이 직접 투표를 시연해 보고 있다. ⓒ연합뉴스 |
TV 토론회 자막·수화 제공도 '의무' 아닌 '임의'
청각장애인이 처한 상황도 비슷하다. 공직선거법 제82조 2항은 "각급선거방송토론위원회는 대담·토론회를 개최하는 때에는 청각장애선거인을 위하여 자막방송 또는 수화통역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 역시 의무규정이 아니라 임의규정이다.
또 수화는 어휘가 많지 않아, 토론회에서 나오는 전문 용어를 전부 표현하는 데 한계가 크다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TV 토론회가 문자통역 없이 수화만을 제공하고 있다. 공직선거법이 수화와 자막 중 하나만을 제공해도 되는 것처럼 규정하고 있어서다.
김 변호사는 "토론회는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에 대한 주요 정보를 접하고 그들의 능력을 파악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회"라며 청각 장애인도 이 기회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토론회 방송이 수화와 문자통역을 의무 제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휠체어는 '몸'의 일부 … "함부로 만지고 들 수 있단 생각 버려야"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을 들어 2, 3층으로 옮기는 모습도 이번 대선에서는 사라져야 할 풍경으로 꼽힌다. 김현태 씨는 "여전히 투표소 1층 의무설치에 대해 '들어 옮기면 되지 않냐'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한다"며 "하지만 휠체어를 들고 옮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 씨는 "여차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생길 수 있다"며 "어떤 척수 장애인은 신체가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부상을 당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지체장애인에게 휠체어는 '몸'의 일부다. 따라서 휠체어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맡겨야만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이들의 인격도 자동으로 침해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사람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없듯이, 지체장애인의 휠체어 역시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것이란 설명이다. 김 씨는 "인격 침해를 당하며 투표를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비판했다.
김재왕 변호사는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을 주문했다. 김 변호사는 "지난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며 장애인 참정권 문제가 지속해서 제기됐다"며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이번 대선에는 '화끈한' 변화가 필요하다"며 "선관위가 조금 더 장애인 참정권 문제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최근 투표시간 연장을 골자로 공직선거법 개정 요구가 계속되는 상황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투표시간 연장과 장애인 참정권 보장은 모두 '국민주권주의 실현'과 '평등한 선거권 보장'이란 같은 목표를 갖는다"며 "공직선거법 개정요구에 장애인들의 목소리도 함께 담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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