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수능성형'이 있다면, 대학 졸업생들에겐 '취업성형'이 있다. 가혹한 청년실업난에 허덕이는 청년 구직자들. 이들은 "취업만 된다면 기꺼이 성형수술을 받겠다"고 말한다. 매년 겨울방학이면 상반기 대기업 공개채용 시즌을 앞두고 수많은 대학 졸업 예정자들이 성형외과로 몰리는 이유다.
그렇다면 정말로 외모가 취업에 큰 영향을 끼치는 걸까. 한국고용정보원의 지난해 조사결과를 보면, '외모'는 확실히 취업의 당락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취업지원 업무담당자 500명은 구직자의 취업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5점 만점)으로 외모(3.88점)가 성별(3.29점), 외국어 능력 및 해외연수 경험(2.59점), 출신대학 평판(2.53점)을 앞선다고 답했다. 이 정도면 "거울 볼 시간에 공부를 더 하라"는 부모님 잔소리에 "외모가 더 중요한 시대다"라고 맞받아쳐도 될 정도다.
물론 '예뻐지고 싶은 것은 여자의 본능'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단지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취업을 위한 조건으로 불필요한 성형에 내몰리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 ⓒ수험생 관련 카페 화면 캡처 |
서비스업 여성노동자들에게 특히 엄격
특히 금융권, 백화점, 음식점, 호텔, 항공 등 서비스업 직종들이 '고객 만족'을 앞세워 여성 종사자나 구직자들에게 가하는 외모 압박은 상식 수준을 넘어선다.
서비스업 구직자들이 느끼는 외모 강박은 어느 정도일까. 기자는 지난 1일 모 승무원 사설학원을 방문해 직접 취업 상담을 받아봤다. 이 학원 강사 김 모 씨는 상담 내내 호감을 주는 '인상'과 몸의 '비율'을 강조했다. 김 씨는 "영어나 학벌 등의 자격조건은 점차 중요도가 낮아지고, 외모가 취업 승패를 결정하는 주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른바 '이미지 메이킹(만들기)'을 목적으로 사설학원에 다니는 구직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승무원 학원들이 제공하는 교육 과정의 절반 이상은 화장법, 자세 교정, 미소 연습 등 외모 가꾸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에 더해 일반 기업을 희망하는 구직자들마저 면접을 대비해 아나운서 사설학원 등을 다니며 외모에 돈과 시간을 투여하기도 한다.
급기야 '성형외과 쿠폰'을 수강생 특전으로 내세우는 사설 취업학원도 생겨났다. 서울 강남에 있는 한 승무원 사설학원은 학원에 등록하는 재학생에게 수십만 원 상당의 성형외과, 치과, 피부과 쿠폰을 제공해오고 있다.
▲ 일부 취업 사설학원은 구직자들에게 성형외과 쿠폰을 제공하기도 한다. ⓒ홈페이지 화면 캡처 |
취업만 하면, 외모 강박은 끝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서비스업종 여성 종사자들은 끊임없이 회사로부터 외모 규제를 받곤 한다.
대표적으로 대형 항공사인 아시아나 항공은 여성 승무원을 대상으로 용모·복장 지침을 만들어 이를 반드시 따르도록 하고 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여성 승무원은 반드시 손톱의 큐티클(각피)을 제거하고, 업무 중에는 항상 치마를 입어야 하며, 안경은 착용할 수 없다.
2007년 대규모 파업으로 사회적 이목이 집중됐던 대형마트 이랜드의 여성노동자들도 당시 회사가 립스틱 색깔까지 지정해줬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한 은행은 직원들이 화장을 했는지 여부, 스타킹을 신었는지 여부 등을 불시에 확인해, 이를 인사평가에 포함하기도 한다고 알려졌다. 회사가 요구하는 규격화된 외모를 유지해야만, 여성들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이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여성 승무원에게 안경 착용을 금지하고 렌즈 착용을 강제하는 것, 남성보다 더 엄격한 체중 규정을 적용하는 것, 건물 안내데스크 여 종사자에게 성적 매력을 풍기는 유니폼을 착용토록 하는 것, 은행의 여성 직원에게만 유니폼 착용을 요구하는 것은 '성차별'이라고 인정한 판례들이 나왔다.
성별에 따른 '건강 불평등' 초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같은 외모지상주의와 성차별이 여성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지난달 25일 한 여대생이 양악 수술을 받은 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벌어졌다. 양악 수술은 치아와 연결된 아래턱과 위턱을 동시에 깎는 매우 위험한 수술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안면 비대칭이나 부정교합 등 턱의 성장에 문제가 있을 때만 행해지던 수술이었다.
하지만 최근 한 연예인이 양악수술 이후 달라진 외모로 재기에 성공하면서 '미용'을 목적으로 양악 수술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수술 경험이 부족한 의사들마저 앞다투어 양악수술을 간판에 내걸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살림의료생협 전희경 이사는 지난달 '여자다워지느라 아픈 시대'라는 부제의 한 토론회에서 "성형외과 의사, 체형관리사, 방송인 등 수많은 전문가가 여성들에게 몸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며 "이런 '교정'이란 발상은 이미 '정상적인 몸', 즉 '여성적인 몸'이 하나의 규범으로서 정해져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 이사는 "이러한 '몸 규범'은 여성의 건강을 해치고, 성별에 따른 건강 불평등을 만든다"며 "실제 남성의 저녁 식사 결식 비율은 2.1%인데 반해, 여성은 6.1%로, 여성이 더욱 골다공증 등의 질병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규제 필요
전 이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적극적 정책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자다운 외모를 위해 고군분투할 것을 조장하는 다양한 사회 문화적 환경 요인에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며 "예컨대 무분별한 다이어트·성형 광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손질된 비현실적 신체 이미지 등을 일정 정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소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논리로 문제를 정당화해왔지만, 인간의 다른 어떠한 본성도 적절한 규제 없이 무한대로 허용되는 경우는 없다"며 "국민 건강을 위해 정부가 음주와 흡연을 규제하는 것처럼, 마네킹을 미용체중이 아닌 건강체중에 맞게 제작토록 하는 등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기업이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지원자의 외모를 기준으로 삼지 못하도록 하는 적극적 정부 규제도 필요해 보인다. 이력서에 증명사진을 반드시 부착해야 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영국은 이력서에 사진을 부착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미국과 호주 역시 이력서에 사진을 동봉하거나 붙이는 행위를 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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