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인이 해야 한다"는 백악관의 고집은 이번에도 꺾이지 않을 모양이다. 부시 행정부가 '낙하산을 태워 보낸' 폴 울포위츠 총재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해 여자친구에게 특혜를 베푼 대가로 불명예 사임을 하게 됐지만 그 후임자를 선택하는 조건에도 자질이나 실적보다는 '백인 미국인'이란 인종적 요소가 우선하는 것이다.
이에 불만을 느낀 다른 국가들이 "세계은행 총재 선택권을 나눠 갖자"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백악관은 '전례'와 '이사회 의결권(11월 기준 16.4%)'이란 방패 뒤에 숨어 요지부동이다.
백인-미국인-공화당 성향, 3박자 갖춰야…
<파이낸셜타임스>는 28일 울포위츠 총재의 후임으로 로버트 죌릭 전 미 국무부 차관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죌릭 차관은 국무부 차관으로 임명되기 전에는 20년 동안 미 무역대표부(USTR)에서 일하면서 전 세계를 상대로 협력외교를 벌여 온 베테랑 관료다.
협상과 '힘의 균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파워를 과시하려는 이념주의자와는 거리가 있지만, 1998년에는 울포위츠, 존 볼턴 등 네오콘 대표주자들과 함께 클린턴 당시 대통령에게 사담 후세인 제거를 요구한 적도 있는 등 '공화당 성향 관료'의 한계를 크게 뛰어넘는 인물도 아닌 것으로 평가됐다.
죌릭 전 차관과 함께 빌 프리스트 전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도 유력한 후보군에 포함돼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프리스트 전 의원이 10년 이상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예방을 위한 기금 마련 등 세계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미국의 예산 증액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고, 또 아프리카 전역을 방문한 바 있어 차기 세계은행 총재로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물망에 오르는 인사들의 면면에서도 알 수 있듯 백악관은 울포위츠 총재에 이어 후임도 미국인이자 백인, 그리고 공화당 성향 인사가 돼야 한다는 분명한 기준을 두고 있다. 국방차관 출신 울포위츠가 낙점됐던 2005년처럼 부시 행정부의 인재풀 안에서 '코드'가 맞는 인사가 임명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지난 26일 G20(20개 국가그룹) 의장국인 남아공과 차기 의장국인 브라질이 "세계은행 총재 인선에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을 확보하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했고, 유럽 국가들도 미국이 간택하는 식의 총재 인선 과정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세계은행 관리자들 사이에서도 "관료나 정치 보좌관 등으로 좋은 평판을 얻은 사람은 충분치 않다.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고도로 숙련된 관리자로서 실적을 갖춘 사람이 와야 한다"는 메모가 돌아, 자질 위주의 총재 인선을 바라는 내부의 요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코드 인사를 통해 개발도상국과 빈곤 국가들에 지원되는 세계은행의 돈줄을 쥐려는 부시 대통령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에 가까운 소리다.
울포위츠 총재가 이미 다음달 30일로 사임 날짜를 정해둔 만큼 이번 주 내에는 백악관의 후임 발표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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