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결국 고이즈미 전 총리의 '전철'을 밟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 여기서 전철이라 함은 국정운영이 녹록찮고 지지율도 하락세를 면치 못하자 과거사를 들쑤셔 우익 표라도 모아보자는 '꼼수정치'를 뜻한다.
아베 총리가 하필이면 3.1절에 맞춰 "(일본군이나 정부가)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한 것은 그 신호탄으로 여겨진다. 고이즈미 전 총리도 지난 2002년 취임 1년 만에 지지율이 40%대로 떨어지고, 자민당 총재 선거 전망이 밝지 않자 기습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감행한 바 있다.
"정치 명문가 혈통이라 믿었건만…"
<뉴스위크> 최신호(3월 5일자)에는 궁지에 몰린 아베 정권의 실상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기사가 실렸다.
"아베 정권이 정권말기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야당 총재의 발언은 지난 2월 18일 집권 자민당 간사장의 '군기잡기' 발언을 통해 고스란히 증명됐다.
히데나오 나카가와 간사장이 "총리가 내각회의에 들어오는데 기립하지 않거나 잡담을 멈추지 않는 정치인들은 각료로 적절치 않다"며 각료들에게 "절대 충성과 자기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뉴스위크>는 "취임 5개월 만에 총리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져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아베 총리에 대한 불신은 '각료들의 역주행'에서 시작됐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손자로 정치 명문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베 총리인 만큼 내각만은 잡음 없이 야무지게 꾸려갈 것으로 여겼던 일반의 기대가 '제대로' 깨진 것이다.
야나기사와 하쿠오 후생노동상은 올 1월 한 강연회에서 저출산 문제를 언급하다 "출산은 15살에서 50살까지 여성에 제한돼 있다. 여성은 애 낳는 기계"라고 말해 야당과 여성단체의 퇴진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정부 세제개편을 추진하는 자문기구 책임자가 민간인 신분으로 공무원 관사에 입주해 혼외 여성과 동거하는 등 부적절한 처신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당과 정부 간의 불화도 평상수위를 넘었다는 분석이다. 자민당 중진인 가타야마 토라노수케 중의원은 "아베팀은 자민당 통제에 고전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고이즈미 파'인 중진 의원들을 휘어잡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일본 정치를 연구하는 미국 전문가들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제너럴 커티스 교수는 "아베는 전략도 없고 협력도 부족하다는 불평을 정부 내에서도 흔하게 들을 수 있다"며 "아베에게는 부시 대통령의 칼 로브 같은 정치고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치 평론가이 키치야 고바야시 역시 "우파인 만큼 선원 관리는 탁월할 줄 알았는데 아베는 그저 '잘 키운 아이(well-bred son)'일 뿐이었다"고 혹평했다.
아베의 개헌 요구 외면하는 국민…국민의 민생 요구에 침묵하는 아베
70%를 넘어섰던 취임초기 지지율이 30%대로 반토막 난 데에는 민심과 이반된 국정운영도 큰 몫을 했다.
지난 달 20일 <요미우리 신문>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는 아베 정권이 주력 과제로 삼은 의제들이 모두 유권자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자료다.
아베 총리는 헌법 개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정권 초반부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정작 유권자들 중 이를 선결 과제로 꼽은 응답자는 6.2%(복수응답)에 불과했다. 그 대신 가장 많은 유권자들이 선결 과제라고 지적한 의제는 사회 복지 61.7%였고 그 다음으로는 경제문제 52%, 저출산 해결을 위한 육아지원 34% 순이었다. 북한 문제를 꼽은 응답자도 32.8%나 됐다.
아베 총리는 유권자들이 해결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는 의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우익 진영 안에서만 메아리 치는 헌법 개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헌법 개정이 선거에서 대중들의 표를 모으는 이슈가 아니라는 점은 당 내에서도 인정하는 바다. 가타야마 사츠키 자민당 대변인은 "참의원들은 헌법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며 "그 대신 어떻게 지역구에 일자리를 만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고 밝혔다.
과거사 들쑤시면 무조건 표가 된다?
이처럼 집안단속 실패와 의제설정의 미숙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아베 총리가 지지율 반등의 카드로 내민 것이 이번 종군 위안부 발언인 것이다.
아베 총리는 올 7월 참의원 절반을 교체하는 선거를 앞두고 '터닝 포인트'를 찾아야만 했던 만큼, 지지율 하락을 한국과 중국 공격으로 모면했던 고이즈미 전 총리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의 종군 위안부 발언은 한국을 겨냥했다기 보다는 종군위안부 비난 결의안을 심의 중인 미 하원에 보낸 시그널로 풀이된다. 전통적 지지층인 극우진영의 신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가 막아냈던 결의안을 아베 정권에서 막아내지 못한다면 '집토끼'가 달아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인 것이다.
올해가 난징 대학살 7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중국 정부가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 표명을 요구할 경우, 아베 총리는 이에 대해서도 극우파 취향대로 대처할 가능성이 높다.
이로써 아베 총리는 취임 직후 한국과 중국을 잇달아 방문하면서 그나마 성과를 거뒀다고 자신했던 동아시아 관계마저 고이즈미 이전 상태로 되돌아 가는 셈이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한 고이즈미 전 총리에게 표를 줘서 '과거사는 표가 된다'는 학습효과를 심어줬던 일본 유권자들이 아베에게도 똑같이 온정을 베풀지는 아직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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